코로나19, 구글 우주의 구글 학교는 평등에 기여하는가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면서 우리학교는 EBS와 구글 중 구글 사용이 간편하다는 쪽이 우세해 구글에서 제공하는 클래스룸을 통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구글은 교육부와 계약하기를 학생과 교사들에게 무제한의 용량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구글의 무료정책과 보편성이 휩게 설득력을 얻었다. 20년 전 숙제를 다움 카페에 게시하도록 하여 받기도 했던 나는 학생들이 카페에 게시된 친구의 글을 서로 쉽게 읽고, 또 내가 거기에 답글을 달면서 시간의 제한을 넘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글은 시작부터 찜찜했다. 구글 뿐 아니다. 소위 정부와 언론에서 선전해대는 온라인 수업이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압당기는 선진적인 조치일까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복지와 평등에 기여할까 생각할 때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철저히 자본의 마케팅과 이익 추구 논리로 작동하는 구글이라는 기업이 교육의 플랫폼을 장악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 공짜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소비자의 입장처럼 단순하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육부가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았고, 학교에서도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은 채 이렇게 일이 벌어졌다. 나도 학교계정 아이디를 부여받고, 다시 교사와 학생들의 계정을 만들어 각자에게 나눠줬다. 이렇게 우리는 구글 우주 안의 구글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되고 말았다.
자,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로서 나는 이제 구글 아이디를 네 개를 갖게 되었다. 처음 구글 아이디는 유튜브였던가 구글 어스를 위해서였던가를 사용하기 위해서 구글계정을 생성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료교사가 공유해야 할 업무를 구글 드라이브에 올리며 초대해 제한적으로 구글의 플랫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네이버나 다움의 상업적 광고와 뉴스 조작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으로서 사용자의 주체적인 선택과 인터네셔널한 편리성에 매력을 느껴 구글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적어도 나나 학교의 교사나 학생들에게 구글 우주는 당분간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말았다. 당분간이라는 단서가 당분간으로 끝나길 바라지만 결코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다. 이것은 마치 분유회사가 산부인과의 엄마들에게 분유를 무료로 제공해 아기가 그 맛에 익숙해지고 중독되어 결국 소비자인 엄마가 그 회사의 분유만 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은 달콤하게 침투해 어느새 권력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당장 내가 실망한 것은 구글클래스룸 안에서 학생들이 서로의 과제물을 쉽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관리자인 교사의 입장에서는 편할지 모르지만 학생들 쌍방이 쉽게 서로 소통하는 구조는 아니다. 마치 학교계정을 가진 내가 빅브라더가 되어 구글 클래스룸을 이용하는 모든 아이디에 관여하고 그들의 정보를 스캔할 수 있는 것처럼 구글은 정보의 위계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 학교와 나는 이미 구글의 말초신경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구글이 보유한 거대한 빅데이터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무료의 댓가고 무료가 평등에 기여하지 많는다는 것의 의미다.
내 입에는 자꾸 불평등이라는 말이 맴돈다. 나는 영어 등 외국어를 주변에서 많이 쓰고, 요즘은 약어로 써버리는 경향이 언어문화가 몹시 불편하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진짜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한글의 혁명적 기능이 서양에서 금속활자와 도서출판이 기능했던 것과 같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의 편리성은 평등에 기여했고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각 나라는 자신들의 언어를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자로 기록하면서 국가와 민족의 위계에서 벗어나 독립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어의 차별에 대해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것에 대해 거의 무방비하고 무의식적이다. 예전에 한자말을 그렇게 사용했듯이 영어 등 외국어를 멋으로 알거나 그 특유의 의미와 맛 때문에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이 심해지면서 은어수준의 줄임말들이 과도하고 급속하게 유포되었다. 나름 소통을 위해 또 소통에 기여하고 있는 점이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여전히 장벽이고 언어의 새로운 진화가 낳은 불평등과 차별을 묵과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며 말하고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말해야 한다.
구글클래스룸을 사용하며 구글에 대한 노출과 의존이 심화되는 것이 빅데이터를 다루는 빅브라더에게는 비교 불가능한 권력을 선사하고 있지만, 낱낱의 개인들에게는 혀끝의 설탕처럼 무료의 편리만 있을 뿐 단절과 배타적인 기술 장벽을 만들고 있다. 정말 우리가 구글 우주 안에서 살아가기에 구글은 너무나 이기적이다. EBS는 어떨까? 구글이라는 세계기업의 통치는 아니더라도 국가권력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플랫폼은 분유처럼 그것에 의존하게 만들고, 평등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편리한 벽이다.도시와 산하를 가로지르며 달리는 고가도로의 편리함과 같다. 그 위에 올라가면 편리하지만 그 밑과는 무관한 세계이다.
만인과 생명의 평등을 위해서 우리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 코로나19가 가져다준 불길한 징후가 나를 불편케 한다. 과연 우리가 임시적일 수 있을까? 그럴 순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비상사태가 이미 장기화되고 있다. 임시가 상시가 되고 있다. 이제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위계의 통치가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중이 사용하는 매체가 명확히 개개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사회를 명확히 지향해야 한다. 조중동이라는 거대언론이 한국사회를 어떻게 망쳐왔는지 생각해보면 자본이나 국가권력이 지배하는 매체의 위험성은 명확하다. 우리는 서로서로 누구나 쉽고 편리하고 또 안전하게 소통할 수 있는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가야 한다. 하지만 누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나조차 페이스북과 유튜브의 위험과 한계를 인식하면서 열심히 페이스북과 유퓨브를 이용하고 있으니.
그래도 지금 시작하는 클래스룸을 통한 구글의 학교와 학생에 대한 지배는 위험한 미래사회를 예견케 한다. 임시가 상시가 되지 않도록 대안을 논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