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서정시학> 신인상 당선작 _ 환승역 외 2편 / 배성희
환승역 / 배성희
가을비다 해 질 무렵
천 개의 눈을 감고 있는 유리창마다
촘촘하게 수두자국을 남긴다
보도블록으로 낙엽냄새가 스며든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팔 없는 빈 소매 잠바주머니에 넣고
좌판에 쭈그려 앉은 사내
천 원짜리 나일론 스카프 젖을까
왼손으로만 투명비닐을 덮어준다
내가 걸친 옷은 젖지 않는다
중력에서 풀려난 몸
오늘 밤 使者의 손을 잡고
수증기처럼
사라질지 알 수 없는데
끝까지 가져가는 비밀이 있다
불린 쌀 한 줌 입에 머금은 채 쏘다닌
49일 마지막 날
없는 안경테를 만지며
공원묘지 행 버스를 기다린다
팥빙수 먹기 / 배성희
세상의 모든 빗방울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독 오른 도마뱀 한 쌍
원목탁자의 흉터 닮은 전기 톱날 소리
얼음덩이 갈려나가는 소리
젖은 발가락을 오그린 채
팥빙수를 먹기 시작했어요
귀 없는 시체를 흔들어 깨워서라도
말하고 싶었어요
썩어가는 벽지나
벌레와의 동거에 대해서
젖은 발가락을 다 말리면
또 다른 도마뱀끼리 낄낄
찢긴 레일의 복판을 꿰매고 가는 지하철 소리
비 그치고 집으로 갔어요
벌레 먹은 방 갈아 마시러
와플 하우스 / 배성희
조용한 신발이 필요하다
바닥마다 엠보싱으로 만드는 하이힐 말고
소리 없이 드나들 때
불쑥 나타난 내 그림자를 보고
파랗게 질리는 얼굴
거실 구석
바퀴벌레 기어가는 소리도 들린다
나란히 앉아 개그를 보고 웃는 일은 없다
각방에서 모니터를 마주하고
키득거린다
벤자민 화분이 시들었다
눈치 없이 무성해서 살충제를 뿌렸더니
광랜에너지로 충만한 보금자리
아내는 홈쇼핑 마감 때만 극치에 오른다
빨간 총잡이 나는 매일 밤
비키니 여전사의 엉덩이를 미행한다
<서정시학> 2009. 여름호
배성희 시인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생물학과 졸업. 현재 과학교사로 재직
[당선소감]
터널 속에 뜨는 달, 그 매혹
꽃의 목을 따고, 전깃줄을 끊고, 탈옥수처럼 숟가락으로 땅굴을 파던 시간,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거듭 생기면서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겨울 담벼락에 두드러기 모양 달라붙어 있던 담쟁이덩굴손은 어쩔 수 없이 지독한 자화상이었다.
길게 휘어진 터널에 갇혀 출구가 필요했던 나를 시의 뮤즈 곁으로 이끌어준 빛은 무엇인가? 그 특별한 자기장 안에서 씁쓸한 좌절과 시련에 맞설 수 있는 에너지를 한 가닥 찾을 수 있었다. “괴물과 오래 싸우면 괴물이 된다”는 니체의 논리에 공감하고, 언어와 오래 연애하면 詩를 쓸 수 있다고 감히 생각했다.
위태로울 때마다 주저앉지 말라고 부축해주던 친구들, 詩를 통해서 만남이 넓어지고 새로운 힘이 생긴다는 격려, 다른 세상을 향해서 창문을 하나씩 만들고 열어가는 기쁨은 얼마나 소중한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원고에 스며있는 짙은 그늘과 간절함을 불씨로 인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순투성이 일상의 겉보기 현상에는 거리를 두고 삶의 본질을 탐색하는 것이 참된 글쓰기라고 배웠습니다. 생명을 옹호하는 정신으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라는 스승의 가르침도 명심하겠습니다.
어렵게 허락받은 길! 이해도 설명도 어려운“사람이라는 수수께끼”를 형상화하는 고민에 의미를 부여하고, 겸손한 자세로 계속 공부하며 정진할 것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