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졸저 『흔적(痕迹) : 80옹 회고록』에 올렸던 내용이다. 항해일지 원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내 기억에서 가장 인상 깊고 민망스럽기도 하지만 또한 가장 자신의 고유한 내면의 나 다움을 느낀것 것이라 좀 더 자세하게 재구성하여 올리고자 한다.
벨기에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왕국)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룩셈부르크, 독일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베네룩스 3국 중 하나이다. 이곳의 대표적인 항구는, 초등학교 시절, 가난한 우유 배달 소년 네로와 그의 충직한 개 파트라슈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플랜더스의 개》란 동화로 익히 잘 알려졌던 엔트워프(Antwerpen)이다.
북해에서 흘러드는 에스코강은 프랑스 북부, 벨기에 서부와 네덜란드의 남서 지방을 흐른다. 강 입구 주위의 낮은 지역에 많은 운하를 파고 항구와 부두를 만들어 라인강과 연결하기도 하여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이다. 뿐만 아니라 내륙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인근 도시들인 브뤼셀, 됭케르크 심지어 산악지대인 스위스까지 갈 수 있어 스위스에도 항구가 있게 되었다. 작지만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더구나 일찍이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을 식민지로 삼아 콩고 자유국으로 만들었다. 1960년대에 벨기에로부터 독립 후 격동기에 카사부부 · 루뭄바 · 촘베 · 모투부 같은 검은 대통령의 이름을 많이 들었다. 모두가 콩고국의 대통령들이었다. 독립 후에도 벨기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7년 4월이든가 홍콩 선주(船主)였던 M.V Eastern Summit호에 승선 중, 벨기에 국영 해운회사(海運會社)였던 CMB(Compagnie Maritime Belgie)사에 용선(傭船)되어 콩고의 현관인, 마타디(Matadi)항을 여러 차례 들락거렸다.
역사상 지배자와 식민지 사이에는 늘 그랬듯이 대부분 자원의 착취나 지배국의 이익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정책적으로 만든 굵직한 해운회사였다. 콩고강이란 말도 우리가 어릴 적 교과서에서 배웠듯이 미국의 탐험가 헨리 스탠리(Henry M. Stanley)가 영국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을 구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동안은 벨기에의 엔터워프항과 콩고의 마다디항을 기점으로 그 사이의 아프리카 서안(西岸)의 크고 작은 항구들을 들락거렸다. 처음에는 벨기에 국적선으로 운영하다가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값싼 외국의 홍콩 국적 선박을 용선하여 대체하여 운항중이었다.
기항하는 항구들이 아프리카의 작은 빈국(貧國)들이라 처음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차츰 익숙해지자 그런대로 잘 넘어갔다. 신항행일지의 ‘밀항자’ 사건이 있었던 곳도 마타디항에서 였다.
무엇보다 그 돗대기시장 같았던 아프리카항들에서 벨기에로 귀항하면 마치 고향에라도 온 듯한 안온함과 편안함을 가질 수 있어 재충전의 기회가 되기도 한 것이다.
언제인가는 기억이 가물하다. 벨기에의 엔트워프항인 것만은 분명하다. 엔트워프항도 강변의 넓은 저지대를 파고는 강물로 채움으로서 육지 속의 거대한 항만시설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떤 곳은 한적한 변두리 지역과 맞닿아 있어 아직도 도시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광이 펼쳐져 있다. 거기에다 치안(治安)이나 민심(民心)이 안정되어 있어 안심하고 다닐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정박 중에 짬이 나면 볼 일이 없어도 그냥 땅을 밟고 싶어진다. 여럿이 함께해서 좋은 때도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혼자가 좋다.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신선하기도 하고 그에 따라 온갖 상상의 날개를 달아 먼 곳까지 날아가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구(北歐)의 여름 낮은 지겹도록 길다. 복잡한 도시의 잡음을 벗어나 한적한 공원길이나 차량이나 인적이 드문 길을 걷는 것이 좋았다. 또 그런 곳이 많았다.
외로운 나그네인지라 일과 후 저녁을 마치고 걸어서 영화구경 하고 나와도 아직 한낮이다. 그래도 출출하면 거리의 햄버거집에서 웬만한 것 하나 사면 충분하다. 일반적으로 그쪽 사람들의 체구가 커서 그런지 우리보다 확실히 식사량이 많다. 햄버거 하나의 크기를 봐도 그렇다. 어스름이 시 작되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할 때쯤이었다.
슬슬 길을 걸어가는데 방구(방귀)가 나온다. 평소 흔히 있는 일이다. 옛날 보리밥만 먹던 때와는 달리 하루 세끼 하얀 쌀밥만 먹는데도 그렇다. 속이 시원찮았는지도 몰랐다.
예전에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배워서 그런지 보이지 않는 방구도 그냥 날려버리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적 어른들은 길 나설 때 미리 집안에서 볼일을 보시고 나섰지만 혹시라도 도중에 변의(便意)가 생기면 십리 정도의 거리는 되돌아 집으로 와서 해결하고 다시 나섰다. 그 대소변이 아깝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비료(肥料)의 자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실내도 아니고 탁 트인 공간이라 그냥 날려 보내기에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나만의 세상이었다.
옛날 어릴 때 보리밥 많이 먹던 시절에 했던 버릇이 무심코 떠올라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손으로 권총 쏘는 시늉을 하면서 ‘뿡~’ 한 방을 뀌고 또 몇 발짝 내디딜 때 또 ‘빵~’했다. 아마도 그냥 한 것이 아니고 입에서 ‘빵’하는 소리까지 효과음을 곁들였나 보다. 어떤 때는 양손으로 ‘쌍권총’도 쐈다. 몰아(沒我)지경이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는 나만의 자유! 하루 24시간, 자신을 놓아 본 적이 없는, 아니 놓을 수가 없는 생활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것이다.
얼마를 갔을까, 갑자기 뒤에서 ‘하하하…’ 웃는 소리가 들린다. 얼굴이 화끈하며 전신이 긴장했다. 급히 돌아보니 나이 지긋하신 노부부가 손을 잡고 바짝 뒤따라 걸어오면서 내 멋진(?) 사격 솜씨를 봤던가 보다. 박장대소를 한다.
분명히 시작할 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었는데…? 아무튼 계면쩍기도 하고 내 스스로가 부끄럽기도 하여 그냥 뒤퉁수만 긁으며 “I am sorry.”만 연발했다. 혹시 공기 오염이라도 시켰다고 항의라도 하려나 싶었는데 아니란다.
“Oh, no, You are great sharpshooter.(명사수)”라고 했다. 틀림없이 얼굴이 붉어졌을 법한데 느낌에는 쉽게 되돌려지지 않은 듯 했다.
이것도 인연이었다. 나란히 걸으며 어느 나라 사람, 선장 등등 얘기가 오고 가다 부인이 자기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란다. 나그네 신세에 거절할 이유가 없다.
길가의 줄지어 선 꼭 같은 모양의 작은 단독 주택이었지만 깨끗하고 아담했다. 벽이나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에는 올망졸망한 장식품들이 비집고 들어가 있다. 찻잔 비슷한 작은 그릇에도 흔한 들꽃 같은 것이 앙증맞게 한 송이씩 피어 있는 것도 신기해 보였다.
경상도 말로 반드깨미(소꼽놀이) 하듯 작은 dining room(거실) 겸 kitchen(주방)의 소파에 앉았지만 막상 나눌 대화의 빈곤에도 곤혹스러웠다. 우선은 언어(言語)가 가로막는다. 그저 손짓발짓에다 그림이 오히려 유모어스럽고 재미가 있는 듯 하지만 순간적일 뿐이다. 한마디의 말 속에도 주고받을 깊은 내면의 의지가 들어 있음을 절실하게 의식했다. 북구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대부분 라틴어가 원류가 되고 있어 웬만큼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쉽게 영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영어의 수준이 더 문제이다. 당췌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말도 그렇기는 하다. 같은 말이라도 여자 꼬실 때는 마치 외국어처럼 어렵다는 것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나 같이 막 배운 영어임에랴!
어둠이 창밖을 스며들 때 그 집을 나섰지만 몇 번이나 뒤돌아보게 한 시간이었다. 참 좋은 인연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가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내 자신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깊은 자책이 가슴을 친다. 지금까지 헛살아왔다는 실망도 들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하루살이를 위해 임기응변적 얕은 몸짓으로 버텨온 것일 뿐이었다. 그 동안의 삶에 대한 깊은 자성(自省)을 갖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분명히 주인 영감님의 이름을 적어 받았는데 없다. 천려일실(千慮一失)이었다. 더구나 그쪽 사람들의 이름은 문자 자체는 알파벳이지만 읽기도 쓰기도 어려워 외우지도 못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의 사는 모습이 고령화 사회의 정형(定形)이었던 것을…. 집안에 노부부(老夫婦)가 혹은 할머니 한 분이 하얀 커텐을 열어 놓고 예쁜 꽃화분이 있는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길 가던 나그네를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눈으로 인사를 건낸다. 우리네 생각으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특이하다고 느낀 것은 부부가 쓰는 침대는 달라도 방은 한방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대화가 이루어지면 친절하고 상냥하게 받아 준다. 그러나 막상 외국인이 이웃에서 살게 되는 경우에는 소위 텃세가 많이 심하다고 들었다. 그 또한 세상 어디가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친절한 초대, 대담하게 남의 집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누는 분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어디를 가나 선장이라면 교양이 있고 신사로 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방구 권총은 명절날 30여명 가족이 모이면
늑점이님처럼 자유롭게 쌍권총으로 폭소를 자아내게하는 넉살좋은 친구도 있어서 피식 웃었답니다.
바람새는 방구를 뀌지 않기에 배가 늘 불편하다면서 의사 선생님이 참지 말고 '풍'하라고 했답니다.
그래야 뱃속이 편하고 대장에 변이 달라붙지 않는다고. 근데 그게 쉽지 않더라구요.
늑점이님은 방구 땜시 내장이 건강하니까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는 뜻이지요. 뿅뿅이 아니고 풍풍하십시오.ㅎㅎ
덕분에 벨기에 지도도 펴보고 살아가는 모습도 검색해 보았습니다.^^
다재다능하신 서완수님의 건강하심과 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