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이 끝나면 겨울 난방용 火木을 해야한다.
4개 소대에 각각 페치카가 있고 막사 뒤 언덕엔 중대장을 비롯해 장교 6명이 침식할 방과
따까리들이 자는 방을 합해서 7개의 방이 있는데 흙을 고르고 돗자리를 깐 작은 온돌방이
다.그야말로 도배라는 건 하지도 않고 흙냄새 폴폴나는 골방 같은 곳에서 중대장 소대장님
들이 침식을 한다.
그리고 취사장에서 쓸 화목까지 해야 하는데 그 量이 어마어마하다.
(내가 제대후 충북땅에사는 전우가 부친상을 당해 문상을 갔었고 밤을 새는데 그때가 12월
초순여서 추웠다. 문상객이 많아 밤샘용 비닐하우스를 쳐놨는데 화투치며 담배 태우느라
공기가 화생방 수준여서 거기에 있을 수가 없었고 담배를 태우는 나도 결국 밖으로 자주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나뿐만이 아니였다.)
그때 같이간 전우가 다섯명인데 상주인 전우가 5톤 트럭에 5~60 센티 길이의 통나무를
가득히 실어와 마당 한구석에 쌓아 놓았다.
우리는 서로 운동겸 도끼로 번갈아 통나무를 쪼개서 불을 피우고 그 둘레에 앉아 월남에서
겪었던 얘기로 밤샘을 했는데,날이 새면 발인을 하고 근처 山으로 가게 됐었다.
처음에 5톤 트럭에서 내려 놓은 통나무들이 무척 많다고 생각했었는데,날이 밝기도 전에
통나무들은 다 타서 없어졌으니 놀라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당시 GOP에서 화목을 그리도 많이 해서 쌓아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원래는 페치카용으로 무연탄 가루가 보급된다는데,하여튼 신병 120명정도는 산에가
서 길이는 1미터이상.한아름 반 정도를 칡 덩쿨로 묶고 멜빵을 해서 한짐씩 지고 중대 막사
뒤,나무 저장소 앞에다 놓고 다시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간다.
거기는 민간인들이 휴전후 부터 들어갈 수가 없는 지역여서 나무가 지천인데 枯死된 나무
가 너무 많아 나무하기는 쉽지만,그런 나무들은 금방 타니까 생잡목을 절반씩 섞어서 메고
와야 한다.조금씩해서 지고 가면 안되니까 우리 조교들은 중간에서 점검을 했다.
지름 20센티 정도의 생나무들은 톱으로 잘라야 하는데 톱이 어디있지도 않고 도끼 용으로
썼었던건 야전삽 끝을 숫돌에 갈아 그걸 도끼용으로 썻던게 여러게 있다.그걸 얼마나 오래
그렇게 썼는지 야전삽 끝 원래 모양은 없고 일자인데 그것도 뒷쪽에 꼭갱이용도 거의 달아
서 처음보는 사람은 그 도구가 처음엔 어떤 것 였었는지 모르게 변형이 돼있다.
어쨌던 우리도 선배들이 썼던 그걸로 생나무 밑둥도 도끼용으로 찍고 자르고.
순전히 힘으로.
그렇게 화목을 지고와서 중대 막사 뒤에 갖다놓으면 거기에 신병들이 백명정도 있는데
그애들은 그 화목을 눈.비를 피할 수 있게 지붕만 있는 임시창고에 줄나라비로 서서 날러
관물함 정돈하듯이 무너지지않게 쌓는데 그 量이 대단히 많다.
15일 정도 매일 그것만 하니까 얼마나 많으냐면...60년도쯤에 장마당에 갖다 팔면 중간
부자 소리는 들을만큼이다.(산에 나무는 무지하게 많다)
그렇게 많아도(사용처가 여러군데니까)2월 중순도 안가서 다 소비가 된다고 하며 화목을
더 많이해서 쌓았다.
(근데 나는 화목이 소모될때 하사관학교에서 교육받느라고 못봤다)
우리 조교들은 신병들이 나무의 量을 너무 적게 해서 메고 가거나 단단히 안 묶어서 지고
가다가 허무러 질 수도 있어서 다칠 우려도 있고 다른 안전 사고도 예방해야 하고 교육
시키는 것 보다 더 바뻤다.
前에 있었던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당시 신병 교육을 받을때는 계절 탓도 있지만,군사적인.그쪽 지역에 대한,
우리 9사단에 관한 역사에 대해 많이 배웠다.중대장 박도경 대위는 평양사람인데 교육방침
중에 첫째가 部隊가 생긴 유래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다.
"백마인들은 다 알아야 한다.즉 아무개가 태여나면 그 아무개는 아버지는 물론이고
할아버지 때까지는,그리고 그당시 사회성은 어떻고 주변국은 어떻고 그 모든 걸 알아야
하듯이 군부대도 마찬가지다.부대가 생긴유래도 알아야 하고 사단군가는 물론이고 그당시
대한민국 모든 보병사단중에 보병9사단 예하 28연대에만 유일하게 "도깨비연대 군가"가
있게된 경위.그 군가가 생긴 유래를 알아야한다.
그리고 그걸 배운 신병들은 교육후 다른 중대에 재배치 되는데 거기서 근무하며 제대할때
까지 후임들에게 반드시 전수해 줘야한다.
그외에 그당시 육군 보병들의 군가도 전부 배워서 그 군가 내용의 정신대로 군생활을 하라.
또한,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것은 군인은,나라에 대해,
:절대忠誠! 무조건忠誠! 해야 한다.이유와 불만이란건 있을 수 없는 거이야 알갔어.!!:
지금도 박도경 중대장이 외치는 "군인의길"이란 교육시,열정에 찬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요즘 젊은이들은 박도경 중대장이 잘했다고는 생각 않을 수도있다.
이후에 내가 제대할 때까지 3명의 중대장을 더 만났었는데 그들중 한명만 이름이 기억나고
나머지 두명은 그저 평범한 대위였다.
6.25 사변과 특이나 1.4후퇴 당시 다시 북진할때, 휴전 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휴전시
아군과 적이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을 경계로 결정되니까 피아간에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위해 치열한 격전은 당연한거 였다.
우리 백마 동문님들도 백마고지에 가보신 분들이 많아 아시겠지만,중요지역이고 휴전이
된다면 작전지역으로도 高地 점령은 필수..그래서 요즘에 관광지가 된 곳이 백마고지다.
선배님들 얘기를 들어보니 백마고지 탈환 작전은 치열했다.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고지
탈환에 28연대가 세번이나 재탈환 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때 격돌했던 중공군의 숫자가 10만명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로 인해전술 작전으로
쳐들어오는 중공군을 격퇴하기에 28연대가 온힘을 쏟았다는 대목이 장렬했다.
그래서 보병 제9사단 군가 가사(歌詞)가 백마고지 작전내용으로 되어있고 당시 신출귀몰
하고 임전무퇴로 버티던 28연대의 용맹성에..중공군이 드디어 후퇴를 하며 내뱉었다는 말.
"도깨비같은 놈들!!" 이라고 했다.그래서 당시 보병예하 사단중에 9사단 28연대에만
聯隊歌가 생겼다고 선배들에게 들었다.
지금 들어도 가슴 뿌듯한 9사단군가와 도깨비연대가를 다시 적어본다.
[ 9사단 군가 ]
1). 철원뜰 백마고지 싸움터로삼고서
싸우고 또 싸워서 대승을 이룬
그 용맹 길이지켜 나라겨레 수호에
나가자 9사단의 깃발을 높이들고
2). 십만의 오랑케를 한칼에 쳐 물리쳐
개가를 높이올린 북진능선에
무훈도 찬란하다 力戰에 백마용사
빛내자 9사단의 불멸의 전승기를
후렴). 오너라 풍진아 正義에 방패앞에
우리들은 백마부대 9사단의 용사다.
(가사만 봐도 9사단의 활약상을 담은 백마고지 작전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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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사단 28 도깨비연대가 ]
1). 백두산 솟은봉에 정기를 받고
압록강아 끊임없는 구름을메고
이나라의 젊은이들 굳굳이 뭉쳐
붉은 원수(오랑케)를 쳐 물리치자
나가자 나아가 우리 앞으로
이강토 이겨레를 누가 침범해
(白衣)의 삼천만을 어깨에 메고
그 이름 장하도다 28연대
그 이름 빛나도다 도깨비부대
(우리는 북괴군을 괴뢰군이라고 했지 "오랑케"라고 하진 않았습니다.중공군을 오랑케로
불렀고 백마고지에선 51年초,북괴군을 원조해 남침했던 중공군과 싸웠고
大勝했던 28연대의 작전 내용 입니다.파병 되기전까지 경례구호도"북진" 였습니다.)
(白衣.우리 민족이 옷에 물들이는 기술이 없어서 흰색 옷만
입었었다는 사실같지 않은 얘기도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위에 노래를 가사와 곡조도 틀리지 않게 부를수 있습니다.^^
66년 1월달에 원주 1하사관학교에 지원해 大隊와 연대를 거쳐 사단본부에 가서 신고
했다.나는 9사단을 떠났고 내 기록카드와 함께 원주 1군하사관학교에 도착했다.
첫댓글 선배님!
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선배님의 백마사랑은 후배님들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늘 감사 드립니다...ㅎㅎ
연대가 가사가 제가 있을 때와는 약간 다릅니다.
백두산 서슬푸른 정기를 받고 압록두만 끊임없는 흐름을 배운
이 나라의 젊은이가 굳건히 뭉쳐 금수강산 통일의 길 앞장서 가자
나가자 나가 오직 앞으로 이강토 이겨레를 누가 침범해
백의의 사천만을 어깨에 지고 그 이름 장하도다 28연대
그 이름 빛나도다 도깨비부대
최제호님 말씀이 맞습니다,
군가도 시대에 맞춰 가사가 바뀌는 모양이군요.
바뀐 가사 내용이 맘에 듭니다.
해방됐을 때는 2천만였고 최재호님의 30년전에는 4천만,지금은 오천만..(...이 넘겠죠.)
(그런데 그보담.약 65년전에 28연대만 연대가 가 있다는 자랑스러움이 컸던거죠.)
선배님 저도 파월되기 전에 5군단 포병사령부 예하대대(철원)에 있었는데
뻬치카 장작 많이 했습니다.
선배님 글 읽으면서 옛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나건주 전우님! 군대얘기는 쓰지 말아야 겠습니다."다음"에서 견제가 있는듯 합니다.
지금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지 않듯 군대 역사를 쓰는게 안되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