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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고난 받는 그리스도, 고난 받는 제자
말씀 / 마가복음 8:27~9:1
요절 /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나라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은 태극무공훈장입니다. 미군은 Metal of Honor, 명예훈장입니다. 영국군은 빅토리아 십자무공훈장이라 합니다. 프랑스는 레지옹도뇌르 입니다. 우리가 소망하여야 할 최고의 상은 주님 오시는 날 예수님으로부터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것입니다. “잘하였다 충성된 종아!” 우리는 이 상을 받으려고 지금 이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 상 받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각자가 주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상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가는 길은 요단 동편을 맡은 분봉왕 헤롯 빌립이 황제를 위하여 만든 도시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메시아의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길과 제자들이 기대하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기를 원하는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어 하는 길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격차를 없애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을 12제자들이 영접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유대인종교 지도자들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행하시는 것을 귀신의 왕의 힘을 빌어 하는 것이라고 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가족들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정신이 정상 아닌 탓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말씀을 전하시자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얕잡아 보고 배척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갈등하고 배척하는 일에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해주시는 과정에서 돼지 2천 마리가 죽은 것을 아까워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땅에서 떠나 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과 갈등하십니다. 예수님의 가시고자 하는 길 때문이며, 제자들이 가야 할 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표면상 사람들의 견해, 사람들의 인식과 관점을 물어보시는 것이지만 사실은 제자들의 어떻게 대답할 지 먼저 생각해볼 수 있기 위한 사전 질문 성격이 큽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품었었던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 대답들은 모두 본질을 올바로 본 대답이 아닙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생각한 것이며, 자기의 지식과 인식의 세계를 기준으로 세운 다음 부분을 전체로 확대해서 본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본 질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과 곁에 있으면서 예수님을 많이 배우고 따라온 제자들이 그동안 배운 바 예수님은 누구인지 물어보십니다.
베드로가 자신 있게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 시니이다” 그리스도란 헬라어로써 베드로가 사용하는 언어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의 본래의 뜻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자’ 의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라 한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이십니다. 베드로는 구원자에 대해서 불완전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기 전이기 때문에 메시아 이심을 공개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자 이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가야 할 길을 가르치십니다. 지금까지 베드로를 포함하는 모든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길이 로마황제의 개선식 같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민족과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이나 황제가 시민들의 환호와 대오를 이루고 행진하는 병사들의 ‘임페라토로’ 우렁찬 외침 속에 개선마차 에쿠우스를 타고 성문으로 들어와 포룸 로마눔에 당도하는 위대한 승리자의 길이기를 원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모든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반드시 이런 영광과 승리의 메시아로 자기들에게 오실 것이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나 깨나 메시아, 메시아 승리와 영광의 메시아를 꿈꾸었고 그 승리와 영광의 메시아를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이런 기대를 품어 온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 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써 가시는 길은 고난의 길, 죽음의 길입니다. 그런 다음 부활하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주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과 세상 만민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죄 문제이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문제는 죽음이며 그로 인하여 인생은 모두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메시아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 받으십니다. 가족들에게 비난 받으시고 자기 백성들에게 거절당하시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종교지도자들에게 훼방 당하십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받아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이 길은 사람으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왜 고난 받으시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는가? 형벌 중에서도 가장 중한 형벌인 십자가형을 받는가? 어찌하여 왕의 길이 이렇게 천하고 부끄럽고 괴롭고 힘든 길이어야 하는가? 납득할 수 없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영접하였고 이 메시야의 길을 제자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은 곧바로 거부하고 반발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고 따로 다른 곳으로 가 예수님께 그러지 마시도록 예수님의 길을 반대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런 입장은 베드로 뿐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받으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왜 우리를 정치적으로 구해주지 않는가? 왜 우리를 경제문제와 로마 속국문제로부터 현실성 있는 해방을 해주지 않으시는가? 이 이유로 예수님을 버려 이방인들에게 넘기고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한 것입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하십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하시어서 베드로가 메시아의 길을 막는다고 보십니다. 제자의 길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순종하는 길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막아서고 반대하는 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고 버림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메시아의 길을 반대하고 막아 선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베드로의 마음에 사람의 일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관심은 땅의 일, 사람의 일에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관심은 사람이 힘쓰고 애써서 해야 하는 현실문제 해결, 로마로부터의 독립, 유대인들을 위한 왕국 건설, 그 왕국에서 자기도 영광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므로 고난, 버림받음, 죽음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으신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 모두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가야 할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과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길도 아니며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길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길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결심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이 자세를 가지고 실천하여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 받든지 예수님께서 죽으시든지 영광을 얻으시든지 나와 관계없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판단’ ‘자기의 소원’ ‘자기의 영광’ ‘자기의 유익’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란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의식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의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십자가 처형을 언도 받은 죄수가 자기가 못 박힐 가로 막대기를 지고 처형장까지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로마시대 ‘십자가형’은 아무에게나 내려지지 않습니다. 딱 두 죄인, 탈출한 노예와 로마황제에게 반역한 자에게만 내려졌습니다. ‘십자가형’은 중죄인에게 내려지는 사형제도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처형이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미 사형 선고를 받았고 사형 집행이 임박한 사형수라는 인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사느라 이미 생명을 잃을 상황이 임박한 줄로 아는 것이며, 박해와 비난과 핍박을 받되 수치스럽고 모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지만 죽은 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UBF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는 예배에 모여서 귀를 즐겁게 하고 마는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에 모여서 설교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돌아가는 모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에 몰입한 것만을 큰 성공으로 여기지 않으며 감동과 눈물의 예배를 드린 후, 그대로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잊은 채 원래의 인격, 본래의 성품으로 일상생활의 연속을 이어가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삶에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채워나가는 것이며 이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몇달 전 OO목자님에게 본인의 말하는 스타일, 사람 앞에서 행동하는 패턴이 문제가 있다고 신랄하게 지적하는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런 지적을 받고 얼마나 충격 받았겠습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얼마나 서럽고 마음이 슬펐겠습니까? 아버지도 그런 말 그런 지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머니로부터도 그런 지적은 안 받아보았을 것입니다. 김OO 목자님으로부터도 그런 세세한 것들을 콕콕 집어가면서 훈계 받아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 OO목자님이 그런 말을 듣고도 오히려 내적으로 투쟁을 열심히 시작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두들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원을 부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원을 따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향하여 스스로 나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하여 스스로 나아가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자기 목숨은 이생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이 목숨을 살리려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잃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받는 부활과 그 나라에서 받는 영광입니다. 이런 것을 받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 자기의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 땅에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립니다. 그렇게 하여서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20대 청년기 가장 큰 특징은 장래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될까? 나는 어디로 갈까?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고자 많은 궁리를 하던 친구들과 후배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내가 궁리하고 내가 계획하는 것들은 하나도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살아오면서 반복적으로 경험하였습니다. 자기가 궁리하고 계획하여 그 계획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게 되고 무너지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비로소 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님이심을 깨닫고 영접하였습니다. 나에게 참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주의 나라에서 상급과 영광을 주시며 책임져 주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주의 나라에 저를 위하여 큰 집과 큰 영광을 준비해 놓으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것을 받을 기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 기대로 인하여 이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또 저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 좋아했던 사람들에게서 버림받는 것은 즐거울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하신 말씀이 있으므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중에 경험하는 버림받음은 큰 은혜가 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교제를 나누며 그 나라의 상급과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것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 부모를 위한 것도 아니요 내 자식을 위한 것도 아니며 어떤 조직과 모임을 위함도 아닙니다. 오직 자기의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이 영원한 생명은 받드시 얻어야 합니다.
37, 3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주와 복음을 위하여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날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 하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주의 권세를 가지고 오십니다. 그날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이루라 하신 심판을 실행하고자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을 따라 옵니다. 이 무서운 심판의 날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약속하신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며 예수님을 따라 수고하고 충성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이 세대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길 대상이 아닙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다가 주의 구원과 주의 면류관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영원한 부끄러움이요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날은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충성한 제자들에게는 생명의 날, 기쁨의 날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끝입니다.
9장 1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후 얻는 영광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을 것이라 약속해주십니다. 예수님 약속대로 변화산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날 본 영광의 모습은 후로 열 두 사도들이 아낌없이 이 땅에서의 삶을 주께 드릴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주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삶을 드릴 뿐 아니라 순교의 피를 흘리는 일에서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이생의 목숨이 끝나는 죽음의 강을 건너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참 생명을 보고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젊음의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시간도 금방 지나갑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얻으시고 주의 주, 왕의 왕의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젊음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가장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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