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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및 자료 스크랩 진정한 바울 연구를 위한 시론(試論)
두천사 추천 0 조회 31 13.05.30 22: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진정한 바울 연구를 위한 시론(試論)

백종호


1. 문제제기

과연 지금까지의 바울연구는 정당한가? 오늘날 바울신학과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은 얼마나 일치할까? 그 대답은 부정적이다.
몰트만(J. Moltmann)이 지적한 것처럼, 지금까지의 신학은 백인들, 그것도 중산층의 남성들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다. 응당 그들을 제외한 여성, 흑인, 아시아인을 비롯한 제3세계에서 발아하고 자라난 성경 해석과 신학은 그들 신학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고 무시당해 왔다. 하지만 신학은 결코 ‘서구 중산층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더욱이 그들의 해석만이 ‘표준’일 수 없다. 다만, 그들의 해석과 신학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 신학의 ‘한 면’만을 그릴 수 있을 뿐이다.1)
이러한 흐름은 바울신학에서도 감지된다. 지금까지의 바울신학도 ‘그들만의 안목’으로만 구축되었기에 그들의 바울 연구만이 ‘주류’요 ‘절대적 표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울은 ‘그리스도교를 체계화하여 신학화한 지적으로 탁월한 조직신학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바울 해석은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이상(理想)이 투영된 바울의 영상(影像)’일 뿐이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들이 그리는 바울의 영상은 그의 이성적인 면만을 본 것일 뿐, 진정한 바울을 그렸다고 보기 어렵다.
스튜어트(James S. Steward)는 이러한 편향된 바울연구의 경향을 ‘바울주의(Paulinism)’로 명명한 바 있다.2) 따라서 ‘진정한 바울(real Paul)’ 혹은 ‘역사적 바울(historical Paul)’과 거리가 먼, 왜곡되고 편향된 바울주의는 수정되어야 한다. 바울주의에 기초한 바울신학이 수정되고 재해석될 때, 그리스도교 전체가 개혁되고 재편될 것이다. 이는 바울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서구신학 일변도의 바울연구에서 아시아인의 눈으로 본 바울, 좀 더 구체적으로 영적 세계에 민감한 한국인이 본 바울에 대한 연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진정한 바울의 모습은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 쫓는 이적을 행했던 ‘이적 행사자’였고 그 누구보다 방언기도를 많이 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주로부터 계시된 환상을 보며 성령에 이끌렸던 ‘신령한 사람’이었다. 더 나아가 그의 서신을 통해 볼 수 있듯이 그가 개척한 교회를 아비의 심정으로 섬겼던 훌륭한 ‘목회자’였다.3)
이를 논증하기 위해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개괄해 봄으로서 바울과 그의 신학에 관한 하나의 영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본문을 중심으로 한 밀도 있는 주석 작업은 수행하지 않고, 다만 진정한 바울의 전체적인 영상만을 그려 볼 것이다.


2. 사도행전과 서신에서의 바울의 영상

2.1.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의 모습

바울신학의 기초 자료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서구신학자들은 바울신학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사도행전에서의 바울보다는 서신에서의 바울을 더 ‘진정한 바울’로 보아 왔다. 심지어는 예수와 바울4)을,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과 바울 서신에서의 바울5)을, 누가와 바울6)을 고의적으로 갈라놓음으로 왜곡된 바울이해 혹은 바울신학을 낳게 했다.
그러나 캐드베리(H. J. Cadbury)의 말처럼 사도행전은 “예수와 바울을,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예수의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7)을 하고 있고, 또한 보르겐(P. Borgen)이 지적한 것처럼, “바울신학은 오히려 누가신학의 전제가 된다.”8) 그러므로 역사가로서의 누가 자료의 진정성 또한 인정되어야만 한다.9) 이러한 신학적 전제가 있을 때 비로소 왜곡된 바울주의를 넘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바울’ 혹은 ‘역사적 바울’을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사도행전에 묘사된 ‘바울은 이적 행위자,’10) ‘카리스마적 기적-행사자’11)였다.
바울은 박수 엘루마의 눈을 멀게 했고(행 13:6~12), 루스드라에서는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를 낫게 했으며(행 14:8-10), 빌립보에서는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행 16:16-18). 또한 바울은 드로아에서 죽은 유두고를 살렸고(행 20:9, 10), 밀레도에서는 그가 독사에게 물렸으나 전혀 몸이 상하지 않았으며(행 28:3-6),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귀신도 나갔다(행 19:12). 이렇게 바울은 시종일관 이적을 행하며 복음을 전한 이적 행사자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이적과 표적은 시종일관 선교의 과정에 동반하고 있으며, 특히 이방 선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마디로, 이적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선교를 원하신다고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방선교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12)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 서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메시지가 그의 공생애 기간동안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임을 주지시키고(행 1:3),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 스승의 메시지를 그대로 이어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사람임을 맨 마지막 구절에서 묘사하고 있다(행 28:31). 즉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전반부와 후반부에 삽입하는 문학 기법(inclusio)을 사용하여 사도들과 제자들, 특히 바울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지고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자 한 것이다.
누가는 예수와 바울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밝힘으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임을 보여 줌13)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인 교회가 땅 끝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잘 기록하고 있다.14)
그렇다면 사도행전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며 성장해 갔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현장으로써,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가 치유되며,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이적을 통해서 교회가 부흥해가며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일에 주된 사역자로서 바울이 그 중심적 위치에 서 있다.

2.2. 서신에서 나타난 바울의 모습

2.2.1. 이적 행사자 바울
세계적인 바울신학자인 김세윤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성령의 능력으로 위임받은 존재로 인식했다고 지적한다.15)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자신이 ‘사도의 표징들’을 행했으며, 이는 바로 ‘표적과 기사와 능력’이라고 설명한다(고후 12:12). 또한 바울은 로마서를 쓰던 때까지 행했던 이방인 선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롬 15:18, 19)이라고 말한다.
또한 고린도전서 2장 4절, 갈라디아서 3장 5절,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에서 바울은 그의 선교활동 가운데 시종일관 성령의 능력으로 표적들과 기사들과 능력들을 행했음을 강조한다. 이 본문들에서 그는 그가 복음을 전파한 것이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에는 성령을 통해 나타난 표적이라는 ‘능력’이 수반되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웬함(D. Wenham)은 “바울은 사도들에게 기적들을 행할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가 기적〔이적〕을 행한 일에 관하여 말한다”16)고 주장한다. 또한 예르벨은 “바울 자신이 그가 기적〔이적〕들을 행사하고 모든 카리스마적 은사를 소유했다”고 해석한다(고후 11:16; 12:1, 11). 결국 바울은 그의 대적자들보다 더 많은 은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그의 사도직의 표시17)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적 행사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은 대다수 신학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으며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오해되었기에, 바울신학에서 소외될 수 밖에 없었다.

2.2.2. 신령한 사람 바울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행 9장),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로마로 가는 동안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로부터 계시를 받았다(행 27:23, 24). 고린도후서 12장 1절에서 바울은 부득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 비록 개역성경에서는 ‘주의 환상과 계시’로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오프타시아스 카이 아포칼룹페이스 퀴리우’, 즉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복수로 나타난다. 즉,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환상들과 계시들’을 보았고 받았던 것이다.
비록 바울서신에서 그의 환상 체험이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환상들과 계시들’이라는 구절을 통해 그가 빈번하게 이러한 체험을 했을 것이라 추측하는 것은 정당하다(고후 12:1-10, 고전 9:1; 15:8-9, 행 9:12; 18:9; 22:17-21; 23:11; 16:9-10; 27:23). 그러므로 링컨(Lincoln)은 바울을 ‘환상가’(visionary)라고 부른다.18) 바로 그 환상은 ‘주로부터’ 말미암은 환상들과 계시들이었다. 이는 바울 스스로가 환상과 계시를 보려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물이다.19) 이와 같은 바울의 모습 또한 ‘합리적 신앙’을 넘어서 ‘합리주의적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다수의 서구신학자들에게는 낯선 것이었기에 바울신학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다.

2.2.3. 기도의 사람 바울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기도를 많이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모든 사람들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진술한다. 비록 방언의 정의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본문의 문맥에서는 ‘영의 기도’(고전 14:14)로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보다 방언기도를 더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깊은 기도 생활은 결국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는 성령의 대도’(代禱)를 경험하게 한다(롬 8:26, 27). 여기에서 바울은 기도의 원인자(原因子)로 성령을 제시한다. “성령께서 주관적으로 탄식하시되,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통해서, 우리 속에서, 우리의 탄식이자 성령의 탄식이요, 성령의 탄식이자 우리의 탄식을 하게 하신다.”20)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서두인사, 마감 인사, 송축과 감사 문구를 통해서 ‘말로서의 기도’가 아니라 ‘글로서의 기도’를 남긴다. 그리고 ‘글로서의 바울의 기도’는 예배의 현장에서 ‘말로서의 기도’로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1) 이렇게 바울이 서신에서 ‘글로서의 기도’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이유는 그가 직접 함께 할 수 없기에 문서화된 기도라도 함께하고자 하는 심령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Gordon D. Fee)는 바울의 기도의 삶에 대해서 적절하게 주목한다.

바울의 ‘영성’이 지니는 이런 측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를 신학자로 이해하기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기도가 없는 삶은 사실상 무신론자의 삶이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또 성령에 의해 사는 자로서 특별히 기도를,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도할지 모를 때조차, 다른 이들을 위해 감사하고 간구하게 만드는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이해했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 바울에게 무엇을 의미했건 간에 그것은 희락과 감사가 동반된, 기도에 바쳐진 삶이었다.22)

사실,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 보지 않은 서구신학자들이 ‘이적 행사자’로서의 바울의 모습을 그려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환상들과 계시들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로서 ‘신령한 사람 바울’을, 그리고 성령 체험도 없고 방언 은사를 경험하지도 못한 그들이 ‘기도(방언)의 사람 바울’을 알기에는 사실 불가능할지 모른다. 결국 이러한 바울의 영적이며 신령한 모습은 지금까지 서구신학자들에 의해서 침묵되거나 논외 되었던 것이다.


3. 서구신학의 태생적 한계와 바울신학의 새로운 방향

3.1. 조직 신학자에서 목회자로 이동

최근 들어 바울신학의 접근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해 바울의 생애와 사상이 들어 있는 그의 서신들은 조직적이며 체계화된 신학 논문이라기보다는 각각의 교회가 처한 당면 과제에 대한 그의 목회 차원적 문서로 보는 경향이 바로 그것이다. 심지어 그의 서신 가운데 가장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신학적인 서신으로 알려진 로마서마저도 바울 자신의 신학적 체계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목적으로 쓴 신학 논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과 로마 교회가 안고 있었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필요성에 따라 쓴 편지로 보는 견해로 그 무게가 실리고 있다.23)
그렇다고 해서 바울신학에 일관된 주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나름대로의 일관된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서 복음을 적용하는 ‘상황화된 복음’을 선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24) 즉, 로마서를 포함한 그의 서신들은 ‘특정한 교회가 안고 있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답변이기에 오늘날의 학술적인 논문과는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서신에서 축사(逐邪), 신유, 능력 행함, 방언 등과 같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바울신학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간주된 것은 방법론적 오류다. 마치 이는 요한복음에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없기에 ‘요한신학에는 교회론과 하나님의 나라 신학’이 부재하다고 속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러한 주제들이 너무도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기에 언급을 덜 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 있다.
이와 같이 최근의 바울신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은 이성적인 조직신학자로 이해되기 보다는, 복음을 해석하고 증거하며 제자를 양육한 목회자로 이해한다.25) 즉, 관념적이고 지적인 바울에서 실천적이고 영성적인 바울의 모습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3.2. 구원론적 관심에서 성령론적 관심으로 이동

피G. D. Fee)는 서구신학자들의 성령에 대한 몰이해 혹은 절름발이 이해를 지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을 인정하고 실제적으로 성령의 위격과 현재적 사역을 부인하는 이러한 삼위일체 이해를 갖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위론자들’(binitarians)이라 칭한다. 이러한 경향을 띄는 사람들은 “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는 의심한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유령 혹은 활기찬 영향력에 지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무엇이며 다름 아닌 바로 그 하나님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고 서구 그리스도인들과 신학자들을 향해서 일침을 가한다.26)
또한 세계적인 바울신학자인 던(James D. G. Dunn) 역시 바울신학의 중심이 칭의론 보다는 성령론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의 논지는 지금까지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이해되었던 ‘칭의론’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면, 바울서신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은 골고루 나타나며, 더욱이 성령 체험이 복음 전도자, 신학자,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사역적 토대가 되는 원칙들 중 하나‘로 나타나기에 성령론을 칭의론보다 더 포괄적인 주제로 보는 것이다.27)
피와 던이 서구신학자들이 안고 있는 ‘성령론의 부재’를 비판했다면, 김기동은 바울의 성령론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그는 현대 신학이 바울의 성령론의 핵심을 ‘성령의 열매’에 둠으로 자칫 인격의 변화, 생활의 변화, 사상의 변화, 태도의 변화 등 인본주의적 성령론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현대신학이 성령의 본질적 사역을 보혜사로 인식하는 요한의 성령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28) 그는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에 대한 균형 있는 연구를 요청한다.29)
실제로 한국 교회와 신학이 바울신학에 비해서 요한신학을 소홀히 취급한 것은 사실이다.30) 이 외에도 최근 신약학에서 부상하고 있는 복음서 신학, 즉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과 같은 복음서 신학은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이제는 바울신학 일변도의 형태에서 탈피하여 예수의 말씀(logion)이 담지되어 있는 복음서 신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3.3. 이성의 신학에서 영성의 신학으로 이동

마샬(I. Howard. Marshall)은 대다수 서구신학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을 비판한다. 그는 서구신학자들의 역사 이해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31) 첫째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결코 발생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전혀 사실무근한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다.32) 둘째는,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받아들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33) 셋째,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실제 발생했던 사건으로 보는 견해다.
이 세 가지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는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며 동시에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사건임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행 2:32; 3:15; 4:10; 10:40; 13:30)는 초기 교회의 선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historical fact)과 이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셨다는 ‘신학적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이다. 단,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34)고 주장한다.
특히 복음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이적에 대한 서구신학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은 그들의 세계관에 기초한다. ‘이 세상은 마치 정밀한 시계처럼 일정한 원리와 법칙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Deism)의 영향이 서구신학자들의 사고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하나님은 저 너머에 계시며 인간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무정(無情)한 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신학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계가 드러났고, 그 대안으로 이제 제 3세계 신학이 대두되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영이신 하나님이, 영적 존재인 인간에게 선포하신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폐일언하고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존재인 천사와 인간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지나치게 합리주의적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서구신학자보다 오히려 영적 세계에 민감한 제3세계의 신학자들에게 더 열려있는지도 모른다.

3.4. 서구신학에서 제3세계 신학으로 이동

이문장은 기본적으로 서구신학의 방법론에 대한 반동으로써 ‘아시아 신학’ 혹은 ‘한국신학’을 모색한다. 또한 이러한 서구신학의 한계를 서구 성경해석학 분야와 선교학 분야에서 일찍이 제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신학의 적실성 및 한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남미 해방신학의 등장과 함께 제기되었으며, 특히 제3세계 상황에 적실성이 없다는 것이 두 가지 측면에서 주장되었다. 첫째, 서구신학은 서구의 질문에 대한 서구적 답변이기 때문에, 다른 상황에서 올라오는 다른 질문에 답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서구신학은 현장과 분리된 상아탑에 갇힌 신학이라 현장성이 없고, 실천성이 결여된 신학이라는 것이다.35) 더욱이 그들의 자연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고 단언한다.

성경이 잘못 쓰여진 것이 아니라 서구 현대인이 성경을 잘못 읽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합니다. 현대인이 성경의 현실과 성경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만든 서구 문화, 서구 세계관의 잘못이지 성경의 세계관이 원시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서양에서 태어나 그 문화권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은 성경의 현실을 보는 눈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종의 영적 혹은 종교적 장애가 발생한 것입니다.36)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진영 모두에게서 서구신학에 대한 한계는 제기되고 있다. 특히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서구신학이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신학으로 축소되었고, 결국 성경의 세계관을 담아낼 수 없다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비록 서구신학의 한계에 대한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진영의 견해는 다르지만, 분명하게 서구신학이 한계를 안고 있음에는 동의한다.
서구신학과 아시아 신학(한국 신학)의 차이는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사건, 즉 이적에 관한 이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서구신학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셨다’는 사건을 자연과학적 세계관에 어긋나기에 진정성이 없는 본문으로 치부하거나(자유주의 신학), 비신화화(불트만)한다. 하지만 아시아 신학자들은 “만일 예수께서 물 위를 걷지 못한 분이라면 우린 그런 능력 없는 분은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비록 동일한 텍스트를 보지만,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 즉, 그 사람이 소유한 세계관이 다르기에 텍스트에 관한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 제시된 세계관은 서구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자연과학적 세계관보다는, 오히려 초자연적인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세계관과 더 일치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문장은 이러한 논의로부터 서구신학이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고, 그 대안으로 ‘아시아 신학’ 혹은 ‘한국 신학’을 모색하고자 한다.37) 이러한 경향 즉, 서구신학의 한계를 인식하여 기독교의 탈 서구화(De-westernization) 혹은 기독교의 ‘아시아화’(Asianization)를 모색하는 신학적 흐름들이 최근 신학계에 논의되고 있다.38)
이러한 관점에서 동일하게 바울신학에 대한 이해는 재조명되어야 하며, 사도행전에 언급된 사도 바울의 이적 본문 역시 재평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는 비단 바울의 칭의론과 성령론, 그리고 초자연적인 사건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서구인들이 안고 있는 해석학적 전제들 즉, ‘반드시 진리는 합리적이어야 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스콜라주의적 신학 전제를 내려놓지 않고서는 신약성경이 제시한 온전한 바울신학을 갖기 어렵다.
이와 궤를 같이하여 모더니즘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신학적 관심의 이동에 사상적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러한 신학적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 영향력을 부인할 수도 없다.


4. 포스트모더니즘과 그리스도교 신학

4.1. 모더니즘의 대안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20세기 초반까지 사상을 지배하던 시대적 사조는 모더니즘(modernism)이었다. 비록 모더니즘을 한 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약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모더니즘은 계몽주의에 뿌리를 둔 사상으로 인간의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보편타당한 진리 혹은 절대적 진리는 존재한다.’ 그러기에 모더니즘 시대에는 영성보다는 이성에, 자유보다는 억압에, 다양성보다는 획일성에, 상대주의보다는 절대주의에 기울어져 있었다.39)
이러한 모더니즘의 흐름은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고, 신약학(New Testament Studies)에도 그 여파가 감지된다. 모더니즘 시대의 신학에서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이 여타 신학 분야의 판단자로 군림하고 판단한다. 나머지 기독교 신학 분야들은 조직신학을 위한 근거자료에 불과하다. 또한 신약학에서도 바울신학 외에 복음서 신학, 그리고 개별적인 신약성경 저자들의 신학(베드로, 야고보 등등)은 무시당하거나 주변적 신학으로 취급된다.
모더니즘 시대에서의 신학은 어떤 특정한 해석과 신학이 기준점이 되어 획일성과 전체성이 배태되어 있기에 다른 해석 혹은 다른 주장은 무시당하거나 심지어 이단정죄를 당하고 만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신학적 경향성을 소위 ‘교조주의’(Dogmatism)이라고 한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성경해석의 자유, 신학의 자유, 체험의 자유는 박탈당하고 특정한 교리를 위한 획일화된 해석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직된 현실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학과 신앙의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는 데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게 된다.

4.2. 바울신학과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바울신학에 국한하여 설명하자면, 바울신학에 대한 입장 역시 바울의 영성보다는 이성적 측면을, 학문의 자유보다는 억압을, 다양한 해석보다는 획일적인 해석을, 상대적 해석보다는 절대주의적 해석이 이루어져 왔다.40)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모더니즘과 그 영향을 받은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은 어디까지나 서구인들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에서 자라난 ‘자민족 중심주의’라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영성보다는 이성에 갇혀 있는 서구인에 의한 신학이 마치 보편타당하고 표준적인 신학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신유와 축사, 그리고 이적 기사가 등장하는 복음서보다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바울서신이 신약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가장 영적인 복음서로 알려진 요한복음은 ‘신비주의적인 문서’로 취급될 수밖에 없었고, 성령의 은사와 현상적 측면을 강조하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신약학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두되면서 그리스도교 신학에 미친 긍정적인 측면으로서 다양성, 영성, 상대주의, 포괄주의를 표방함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바울신학’은 이제 신약신학(New Testament Theology)의 한 분야일 뿐, 전부가 아님이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부정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비록 포스트모니즘의 영향으로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같은 진리를 가르친다’는 왜곡된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변종(變種)이 생겨났지만, 이것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총화(總和)는 아니다. 또한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고, 이 둘을 동일한 사상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이 두 개념은 범주(category) 자체가 다르다. 종교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반영된 일종의 ‘신학적 범주’에 속한 흐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있기도 하고,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즘 신학이 있기도 하다.41)

4.3. 바울신학에서 복음서신학으로의 이행

1950년 이후,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의 영향으로 복음서 신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고, 그 가운데 누가의 저작(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한 누가신학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비록 최근에 신약학의 ‘폭풍의 중심’으로 누가신학이 자리매김하고 있으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이적에 대해서는 연구대상에서 논외 된다. 포웰(Mark Allen Powel)의 진술은 이러한 신학적 경향성과 한계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저작[누가복음] 자체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 저자는 상당히 대담한 방식으로 굉장한 기적들의 사건과 천사 및 마귀[귀신]들의 놀라울 만한 사건들을 보도하는 설화(narratives)들이 오늘날에도 역사적인 사실로 읽혀질 수 있는가?42)

이런 상황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일어났던 오순절운동과 은사주의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 등과 같은 일련의 성령운동은 서구신학자들에게 일련의 신선한 영적 충격을 주었고, 영적 세계에 대한 지평을 확장시켰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신약성경 저자 가운데 가장 성령의 위치와 기능과 현상적 측면을 강조한 누가는 신약학의 ‘폭풍의 중심지’(storm center)43)가 되어 되었고, 케제만(E. Kasemann)의 진술대로 누가는 신약성경 신학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44) 이러한 흐름은 누가의 저작을 비롯한 복음서 신학에 전반적인 관심으로 진행되었다. 더 이상 바울신학과 그와 관련된 용어만을 절대화하지 않고 상대화함으로 획일성에서 다양성으로, 치우침에서 균형으로 그 방향이 선회한 것이다.
첫째, 바울서신에 정초한 제도적 교회론 혹은 몸 교회론에서 공동체적이며 민주적 직제로 대표되는 요한복음의 교회론이 부각되고 있다.45) 둘째, 성령의 열매와 구원론 중심의 바울신학의 성령론에서 은사 중심적이며 현상적인 면을 강조하는 누가신학의 성령론이 부상하고 있다.46) 셋째, 바울서신에 기초한 ‘이신칭의’47)라는 주제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의 나라 신학48)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약학이 새롭게 복음서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바울신학이 신약학의 중심, 아니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백번 양보하여, 바울의 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center)이 될지는 모르지만 전부(all)는 될 수 없다. 이제는 바울을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고 정점에 올려놓지 말고, 마태와 바울을, 누가와 바울을, 요한과 바울을, 베드로와 바울을 동일선상에서 놓고 객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사실 신약성경의 분량만 보더라도 요한저작과 누가저작은 바울저작의 분량보다 결코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 신학이 바울의 신학만을 최고의 정점에 올려놓고, 누가와 요한은 도외시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짐작컨대, 이러한 현상에는 바로 서구신학자들의 신학적 경향성이 그대로 배태(胚胎)되어 있다. 즉,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세계를 많이 다루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다루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반대로 초자연적인 사건과 영적인 현상보다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바울의 글이 더 친숙했기에, 응당 요한과 누가의 신학은 무관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균형 있게 바울신학을 접근해야 한다. 더 이상 서구신학자들에 의해서 그려지고 제안된 바울만을 절대화 하지 말고, 영적 세계에 민감한 우리의 눈으로 바울을 다시 그려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관점에서 바울신학을 다시 써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 신학의 관점으로 서구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계 교회와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바울과 그의 신학’을 재구성해야 한다.


5. 결 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며, 그 나라가 임한 현재적 증거로서의 축사, 신유, 이적을 행했다. 이러한 신앙 체험은 그가 예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로서 동일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 쫓고, 병자를 고치며 이적을 행했던 자로 자인(自認)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예수께서 보내신 자, 곧 사도다. 그러므로 로마서 15장 18절에서 자신이 수행한 일은 실상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수행하신 것이라고 여긴다.49)
이러한 바울의 능력 사역은 특별히 베넷츠(Dennis Bennett and Rita Bennett)가 지적한 대로, “성령 안에서 바울의 병 고치는 능력은 그의 노년에서도 중단되지 않았다. 그의 사역은 사역 초기보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행 27, 28장)에 좀더 강력하게 신유의 능력과 이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50)
이제 바울신학에 대한 편향되고 왜곡된 전통은 수정되어야 한다. 영적인 안목으로 바울주의를 넘어서 ‘진정한 바울과 그의 신학’을 모색해야 한다. 그럴 때에 ‘합리주의적 기독교’에서 진정 성경이 지향하고 있는 ‘능력 그리스도교’로의 전환이 가능해 질 것이다.


주)

1) Jurgen Moltmann, 『신학의 방법과 형식』, 김균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1), pp. 27-32. 여기에서 몰트만은 “기독교에서 남자들에 의하여 결정된, 이 천년이나 된 전통적 신학의 지배”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모든 신자들 공동의 신학자직 혹은 보편적 신학자직’을 주장한다. 이종성 역시 그레코-로만화, 신학의 백인종의 시녀화, 신학의 휴머니즘의 타협, 타종교에 대한 몰이해와 같은 서구 신학의 과실을 지적한다. 이종성, 『통전적 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2004), 20-24.
2) James S. Steward, A Man in Christ: The Vital Elements of St. Paul’s Religion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Publishers, 1935), 1-33
3) 하지만 로마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는 아니었다.
4) 박수암, 『신약성서신학』(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1999), 185. 박수암은 주장하기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와는 달리, 그리고 예수를 선포했던 원시교회와는 같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일생동안 선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예수와 바울의 메시지를 구분하려는 신학적 경향을 잘 반영해 준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것처럼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그의 신학의 중심주제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김세윤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교에서 흔히 사용되던 표현이 아니었고, 바울이 예수가 애용하던 표현을 8회나 사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Kim SeYoon, “Jesus, Saying of,” Dictionary of the Paul and His Letters (Leicester: Inter-Varsity Downers Grove, 1993), 480, 484.
5) Stanley E. Porter, Paul in Acts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ing, 1999), 187-206.
6) 일반적으로 신약학 학자들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바울을 애써 구별하려고 한다. 이들은 바울의 생애와 관련된 정보, 신학적 내용과 관련하여 문제점을 제시한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유상현, “사도행전의 저자와 저술 배경,” 『사도행전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4-27.
7) C. J. Cadbury, The Making of Luke-Acts (London: MacMillan, 1927), 2.
8) P. Borgen, “From Luke to Paul,” CBQ 31(1969), 168-82.
9) I. Howard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Downers Glove, The Paternoster Press, 1988), 53-76.
10) 유상현, 『사도행전 연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6). 17.
11) Jacob Jervell, 『사도행전 신학』, 윤철원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0), 31.
12) D. Ernst Haenchen, 『사도행전Ⅰ』, 국제성서주석, 이선희·박경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196.
13) 박응천, 『세계를 향한 복음』(서울: 한국성서학연구소, 1997). 41. “누가가 부활하신 예수의 선포 주제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공관복음의 통일된 전승에 의하면 지상에서의 예수의 선포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케뤼그마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Bultmann[불트만]은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누가는 이러한 선포의 불연속성을 신학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를 이미 시도한 바 있다. 즉 누가는 한편으로 초대[초기]교회의 케뤼그마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과 관련하여 부활 이후 예수의 선포가 바로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었음을 지적함으로 해서(눅 24:27, 44) 초대[초기]교회 케뤼그마와 예수 선포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부활 이후의 선포가 공생애 시절의 선포와 단절된 것이 아니고,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임”을 말함으로 해서(행 1:3) 차이 속에서의 연결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4) Stanley D. Toussaint, 『사도행전』, 허미순 역 (서울: 도서출판두란노, 1994), 10.
15) 김세윤, 『바울신학과 새 관점』(서울: 도서출판 두란노, 2002), 202-203.
16) David Wenham, Paul,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95), 351.
17) Jacob Jervell, op. cit., 33-34.
18) A. T. Lincoln, “‘Paul the Visionary’: The Setting and Significance of the Rapture to Paradise in ⅡCorinthians ?. 1-10,” NTS 25(1979), 204-220.
19) R. P. Martin, 2 Corinthians, WBC 40(1986), 396.
20) 차영배, “성령의 인격적 대도와 탄식,” 『성령론』(서울: 경향문화사, 1994), p. 273.
21) 차정식, “바울 서신의 축원 문구와 기도 신학,” 『신약논단』통권 제9권 (2002·여름), 443-74.
22) Gordon D. Fee, Paul, the Spirit and the People of God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96), 147.
23) 최갑종, “바울과 그의 신학의 중심,” 『사도 바울』(천안: 천안대학교출판부, 1999), 355-56; , “로마서의 중심주제: 이신칭의,” 『신약신학저널』3(2000), 303-22. 장동수, “로마서의 목적,” 『신약신학저널』7(2002), 395-410.
24) J. C. Beker, “Paul’s Theology: Consistent or Inconsistent?” NTS 34(1988), 364-377; J. C. Beker, 『사도바울』, 장상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8), 43-63.
25) 최갑종, 『바울연구Ⅰ』(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336.
26) G. D. Fee, op. cit, 37-38.
27) James D. G. Dunn, 『바울신학』, 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567-600.
28) 김기동, 『요한복음강해 1』(서울: 도서출판베뢰아, 1991), 30-31.
29) 김기동, 『요한복음 이해』(서울: 도서출판베뢰아, 2000), 39-53.
30) 김득중, 『누가의 신학』(서울: 컨콜디아사, 1997), 11. 불트만의 저서『요한복음주석』(Das Evangelium des Johannes, 1941)와 다드(C. H. Dodd)의 저서 『요한복음연구』(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 1958)는 요한이야말로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심오한 사상가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특히 불트만의 『신약성서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1965)이란 저서는 제1부가 바울신학, 제2부가 요한신학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단적으로 바울신학과 요한신학이 신약 신학의 중요한 두 기둥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31) I. Howard Ma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Downers Glove: The Paternoster Press, 1988), 21-52.
32) 주로 이 입장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대변한다. 대표적으로 스트라우스(D. F. Strauss)는 예수의 기적을 부인하며, 신약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지어낸 전설로 단정하고 복음서 내에 나타난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신화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33) 이러한 견해는 신정통주의(Neo-Orthodox)의 신학적 입장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신정통주의의 신학의 대표적인 신학자 바르트(K. Barth)는 기본적으로 역사라는 개념을 두 가지로 이해한다. 하나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 ‘히스토리에’(Historie) 또 하나는 실제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실존론적 의미만 있는 ’게쉬히테‘(Geschichte)이다.
34) I. Howard Mashall, op. cit., 52.
35) 이문장, “아시아신학의 성격(1)-서구신학의 한계의 극복,” 『Hermeneia Today』통권 제19호(2002·여름), 54.
36) 이문장, 『한국인을 위한 성경 연구』(서울: 이레서원, 2003), 69.
37) 이문장, “아시아 신학의 현주소,” 『Hermeneia Today』 통권 제18호 (2002·봄), 84-89; 이문장, “복음과 한국인의 만남,” 『목회와 신학』 통권 제157호 (2002·7), 204-11; 이문장, “성경해석에 있어 ‘한국적 심성’의 의미,” 『목회와 신학』 통권 제158호 (2002·8), 207-13.
38) 여기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목회와 신학』(2002·1), 통권 제151호. 이문장, “기독교 이미지의 탈서구화,” 48-57.; Lamin Sanneh, “비서구 지역에서의 복음과 문화의 문제,“ 58-69.; Andrew F. Walls, ”새롭게 제안하는 기독교 신학의 미래,“ 70-82.; John Samuel Mbiti, ”세계 기독교와 신학적 지평의 확장,“ 82-91.; 화융, ”서구신학의 한계와 아시아적 정황신학의 필요성,“ 92-98; 유해무, ”탈서구화와 한국신학의 자립을 향하여,“ 99-106.
39) Alister G. McGrath, 『복음주의의와 기독교적 지성』, 김선일 역 (서울: IVP, 2001), 179-182.
40) Ibid., 183-196. 여기서 맥그래스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미국에서 모더니즘이 복음주의 진영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으며 특별히 ‘상식철학’을 토대한 형성된 ‘구프린스턴 신학’과 ‘신복음주의’의 왜곡된 신학적 경향성을 비판한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가 소홀히 했던 성경적 영성의 관계적이고 정서적이며 상상적인 측면을 회복할 것을 촉구한다.
41) 남기철, 『현대신학해제』(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429.
42) Mark Allan Powell, What are they Saying about Luke? (New York: Paulist, 1991), 6.
43) W. C. van Unnik, “Luke-Acts, A Storm Center in Contemporary Scholarship,” Studies in Luke-Acts, 15-32; I. Howard Marshall, Luke, Historian and Theologian (Downers Glove, The Paternoster Press, 1988), 13.
44) E. K?semann, Jesus Means Freedom (SCM Press, 1969), 121
45) 김동수, 『요한복음의 교회론』(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저자는 석사와 박사학위(M. Div., Th. M., Ph. D.)를 다 요한복음과 관계된 주제로 학위를 취득한 학자다. 그는 본서의 요한복음의 교회론을 바울의 교회론에 종속하여 보지 말고, 요한복음의 독자적인 용어와 표상으로 교회론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더 나아가 그는 요한복음의 교회론은 동시대의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 중심보다는 사람중심, 성령 중심보다 기구 중심적인 것에 대해 일종의 선지자적 외침을 발한 것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요한복음의 교회론이 “일종의 교회 갱신적 외침”(p. 157)으로 해석한다.
46) 이한수, 『신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는가』(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신약의 성령론』(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4). 최문홍, 『누가의 성령론』(군포: 한세대학교 출판부, 2002). 이들의 저서에서는 이제 더 이상 바울의 성령론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령론을 다 담을 수 없고, 단지 한 측면만을 말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이제 바울의 성령론과 누가의 성령론을 대등하고 독립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47) 김재성, “바울의 칭의론: 무엇이 문제인가?,” 『바울 새로 보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00), 191-215. 이 글에서 김재성은 칭의론을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보는 것은 서구신학자들의 특성이 투영된 것으로 본다. 즉, “서구인들은 언제나 개인적·내면적 양심에서 솟아나는 죄책에 사로잡혀 번민한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적·정신적 전통에 기인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의 김재성의 글을 보라.
48) Walter A. Elwell &J. D. Weaver edit., “조지 엘돈 래드,” 『20세기 복음주의 성경 신학자들』, 장세훈 역 (서울: 이레서원, 2001), 371-96. 1960년대 풀러 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신약학 교수였던 래드(G. E. Radd)의 명저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Jesus and the Kingdom, 1964)는 하나님의 나라 신학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 신학은 소위 ‘성령운동’(오순절, 은사주의, 제3의 바람 등)으로 알려진 ‘능력신학’에 신학적 기초를 제공하게 되었다.
49) 김세윤, “이사야 42장과 바울의 소명,” 『바울신학과 새 관점』(서울: 도서출판두란노, 2002), 202-203.
50) Dennis Bennett and Rita Bennett, The Holy Sprit and You (Palinfield, NJ: Logos, n.d., p. 131; Gary W. Derickson, “The Cessation of Healing Miracles on Paul’s Ministry,” BSac 155 (1998), 314.

 

                           출처 :베뢰아박성배목사                                      글쓴이 : 주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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