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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현 고문(전 요코하마 총영사)께서 보내신 자료 입니다.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보내 오셨습니다.
일본 요코하마시(橫浜市)의 지유샤(自由社)판 역사교과서 채택
고문
이미 언론에 보도된 바와 같이 지난 4월 19일 일본 문무과학성이 새로 검정 합격을 내린 지유샤(自由社)판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일본에서는 첫 사례로 요코하마시(橫浜市) 교육위원회가 8월 5일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요코하마시 의 18개 교육구 중 8개구가 동시에 지유샤판 교과서 채택을 경정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문과성이 합격 판정을 내린 이후, 한때 에히메현(愛媛県)에서 지유샤판 교과서 채택의 우직임을 보였으나,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로 주춤하고 있는 사이, 이번에 요코하마시가 먼저 나선 것이다.
요코하마시가 이번 지유샤판 중학교 역사교과서 채택을 결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거센 항의를 면치 못했으며, 이로 인해 시장이 사임하는 등 소동이 야기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예상되는 한국측의 대응에 비상한 관심이 모여지고 있다.
일본 문과성이 지난 4월 합격 판정을 내린 지유샤판 교과서 내용에는 과거 문제가 된 후쇼샤(扶桑社)판 내용과 마찬가지로 한일과거사 문제를 두고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거나 ‘대동아전쟁을 구미침략으로부터 아시아각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한 부분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그 동안 한일간 역사 인식의 차를 줄이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 헛되게 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4월 일본 문과성의 지유샤판 교과서의 검정 합격이 내려지자, 그 다음날 한국 외교통상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사실을 왜곡한 기술부분에 대한 유감과 양국의 우호친선과 21세기를 향한 한일협력 파트너십 관계를 해칠 내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바 있다. 그럼에도 일본의 일부 우경화된 지식인들이 구시대의 유물인 ‘황국사상’을 찬양하는 왜곡된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다시 빠져 들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돌이켜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이후 한일간에는 과거사를 둘러싸고 수많은 마찰과 갈등을 겪으면서도 과거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공동노력을 기우려 왔다. 1965~현재까지 천황 만찬사, 총리담화 등 과거 일제의 식민지 통치와 전쟁 중 조선인의 강제동원 특히 징용, 징병, 군 위안부로 인한 피해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공식 사죄 와 보상 문제가 언급되었으며, 특히
1995년 무라야마(村山) 전총리 담화: ‘일본은 과거 침략과 식민지지배를 통렬히 반성, 진심으로 사죄한다’ 라고 한 일본정부의 기본입장 정립이나, 1998년 ‘한일 파트너십 선언’을 통해 일본 측이 과거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고 한국측이 이를 받아드림에 따라 미흡하나마 역사인식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바 있었으나, 이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또다시 한일 정부간에 일본 역사교과서 기술과 역사인식, 특히 ‘독도 영유권’문제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의 기술을 둘러싸고 극도의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한편 역사교과서 기술을 둘러싼 문제를 풀기 위한 한일간의 대화가 시작된 시기는 1970년대 이후 2000년까지라 할 수 있다. 한국역사교육연구회가 주최하여 1970년대 중반이래 4회에 걸쳐 일본학자 등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주제는 ‘민족주의적 사관을 역사교육에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그러나 1982년 일본 문과성이 역사교과서 검정으로 간섭하게 되자, 정치문제로 비화하고 그 파장이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에까지 미쳐 주요외교사안으로 부상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 사태를 무마하기 위한 소위 ‘근린제국조항(近隣諸國條項)’이라는 고육지책을 내세웠고, 이 조항은 오늘날까지 적용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1982년 일본학자로 구성된 ‘비교역사교육회(比較歷史敎育會)’가 수 차례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역사교과서 자체를 검토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동아시아 각국이 자국의 역사와 세계사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삼았다. 이 연구회의 심포지엄에는 한국 이외에도 중국 대만 베트남 북한 등도 참가하여 역사대화가 한일 양국간의 문제라기 보다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2001년부터 오늘날까지 한일간에는 과거사문제의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1995년 무라야마(村山) 전총리 담화와 1998년 10월 발표된 ‘한일 파트너십 선언’에도 불구하고, 2001년 중학교 ‘새 역사교과서’가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 하는 등 2005년까지 양국은 역사인식 문제가 심각한 갈등으로 악화되었으며, 심지어 예정했던 양국 정상회의가 이로 인해 취소되는 사태까지 야기되었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하여 2006년 고이즈미(小泉) 전총리의 야스쿠니진자(靖國神社) 참배와 독도 영유권 주장 등 우익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의한 언동과 ‘망언(妄言)이 잇따랐다. 이로 인하여 양국정부가 오랫동안 역사인식 의 충돌을 조정 관리해오던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일본 보수우익 세력이 거침없이 난발한 망언들이 역사교과서에 그대로 기술되는 등 안타까운 상황을 연출하고 말았다. 예를 들면 도쿄도(東京都)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는 ‘조선식민지 통치 덕분으로 도로, 철도 등 건설과 조선의 현대화에 기여했다’고 하면서 여러 차례 난발한 망언이라든지, 또한 2008년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전 항공자위대 막료장(前 航空自衛隊幕僚長)이 ‘일본은 침략국이었는가(日本は侵略国家であったのか)’라는 제하의 논문을 통해 ‘일본이 침략국이라고 한 것은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것이다’ 라고 주장한 내용 등이 교과서 내용과 같은 맥락이라는 뜻이다.
그 동안 한일양측 정부의 위촉으로 양국 역사 연구가와 교수들이, 향후 양국국민의 민족주의적 자국중심의 역사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시도로서 10년간 협의 끝에, 한국측의 ‘역사교과서연구회’와 일본측의 역사교육연구회가 공동 편집한 <한일역사공동교재-한일교류의 역사>(453쪽, 2007년 3월 간행)를 일본어와 한국어로 발간하여 이를 양국 각급학교 부교재용으로 사용토록 하는 등 각계각층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역사인식의 차를 좁히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은 우여곡절 속에서 일본정부는 2001년 소위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대표: 후지오카 노부카츠: 藤岡信勝)의 편집으로 발간한 후소샤(扶桑社)’판 ‘새로운 역사교과서’와 역시 같은 편집 및 출판사의 2005년의 ‘개정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일본정부가 중학교 역사교과서로 인정하였고, 나아가 2009년 4월에는 같은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편집으로 이와 유사한 내용의 지유샤(自由社)판 중학교 교과서를 일본 문부과학성이 합격판정을 내렸다. 2006년도 기준으로 일본 중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 채택순위로 본다면, 일본전국의 8개 출판사의 역사교과서 가운데, 비록 후소샤’판의 채택비율이 최하위로 불과 0.4%에 불과하며, 지유샤판은 새로 발간될 예정일 뿐이지만, 일본정부가 후소샤’판과 유사한 내용의 지유샤판을 검정합격으로 결정한 것은 분명 한일간 역사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다. (주: 2006년도 일본출판사별 역사교과서 채택비율: 東京書籍 51.2%, 大阪書籍 15.4%, 帝國書院 14.2%, 敎育出版 11.8%, 日本書籍 3.1%, 淸水書院 2.4%, 日本 文敎出版 1,4%, 扶桑社 0.4%의 순)
한국 측은 지유샤판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 합격이 결정되자 곧 일본 정부의 처사를 항의하는 내용의 외교 통상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일본측은 이외에도 ‘내정 간섭’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즉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대표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편집한 역사교과서에는 ‘독도 영유권’문제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인식과 크게 차이를 들어낸 점이 문제이다. (1)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여 예를 들면 ‘일본의 우수성’과 ‘천황에게 헌신’하는 정신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2) 이에 반해 한국사의 주체성 부정 및 비하, 과거 조선침략의 정당화 내지 합리화, 침략전쟁의 미화 등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한국과 일본학계에서 부정되는 임나일본부설을 여전히 주장한다든가, 한반도 위협론을 강조한다든가, 전쟁 중 동원된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없다는 점 등이다. 특히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에 위협이 되며, 역사적으로 조선독립을 보전하지 못해 대륙세력이 일본을 위협했으니 조선을 병합해야 된다는 소위 ‘한반도 위협론’은 일본의 한국침략과 병합의 합리화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내용과 주장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이미 1850년대에 ‘외정론(外征論)에서 주장한 현대판이다. 이러한 내용은 한국으로서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기술임에도 이런 내용이 들어 있는 역사교과서를 세 번이나 일본정부의 검정을 통과 했다는 사실은 문부과학성과 우익지식인이 이미 60년 전에 용도 폐기되어 역사의 부정적 유물로 인식되어온 ‘황국사관’을 청소년들에게 공유하도록 교육시킨다는 견지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 밖에도 이번 지유샤판 역사교과서에는 이전 후쇼샤판에서 볼 수 없었던 ‘전함 야마토’와 쇼와(昭和)천황의 발언을 크게 다룬 코너가 새로이 추가되었는데, 이는 전함도감에나 실려야 할 야마토함의 재원과 최후 모습을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게재한 것, 그리고 아직까지 전쟁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일본이 과거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쇼와 천황을 2쪽 분량이나 소개한 역사교과서를 문부과학성이 그대로 검정 통과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주: 이상,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은 1945년 종전 이후 과거의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한 현대국가를 건설하여, 그 덕분으로 반세기 동안에 경제적 번영과 국민의 복지 달성을 이룩하였으며, 이로써 선진국대열에 어깨를 나란히 하여 국제사회에 등장하였고, 드디어 세계에서 자유자본주의의 모범이라 할 만큼 훌륭한 나라가 되었다. 종전 이후 60년간 민주주의의 기반 위에서 번영 발전하고 있는 일본이 새삼스럽게 과거의 <황국사상>에 의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조선의 현대화에 공헌’하였다고 합리화하거나, ‘대동아전쟁을 구미의 침략을 막기 위한 것’이였다고 정당화하려는 역사관은 분명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일본이 ‘스스로 올바른 역사인식을 부인하는 ‘자가당착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오늘날 다시 일본 정부와 일부 우익지식인이 우경화 한 것은 21세기의 인류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세계평화의 추구’라는 시대적 조류의 역행이며 보편적 가치관에 대한 위배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일본이 이미 60년 이전, 종전과 더불어 폐기한 <황국사상>을, 글로벌 시대를 지향하고 있는 일본의 장래와 운명을 맡아야 할 청소년인 중학생을 대상으로 일선교육현장에서 왜곡된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직접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에서는 좌시할 수 없는 중대사안이라 할 것이다.
동서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1990년대부터 세계각국에 유행하고 있는 <힘이 곧 정의>이라는 약육강식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정부와 우익지식인이 한일과거사의 인식, 특히 조선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미화 내지는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또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현실이다. 이와 같은 우경화 경향은 21세기를 향한 한일 파트너십 관계에 있어서 또한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하여 진력해온 이웃나라로서는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이래 한일 양측은 정부레벨, 관계학계, NGO 등 시민단체의 대화를 통해 양국간의 역사인식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다각적인 노력을 기우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황국사관>에 깊숙이 젖어버린 일본의 현실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루 속히 미래지향적 <한일간의 우호협력 파트너십 관계>의 재 구축을 위해 올바른 역사관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국가간의 역사인식의 개선과 상호이해의 중진은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도층과 지식인이 의식적으로 이를 위한 접근을 견인해야 한다. 올바른 역사인식의 공유는 한일양국에게 주어진 또 다른 하나의 시대적 사명이다.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한일양국의 정부는 물론, 정치가, 학계, 언론 그리고 시민단체 등 각계각층에서 함께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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