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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성격상 말머리를 추가했습니다;;)
아래 글은 제가 음악잡지 "스트링 앤 보우"에 실은 글(2011년 8월호)을 옮긴 것입니다.
따로 제목을 달지는 않았는데, 편집부에서 "말러의 삶, 음악 그리고 죽음"이라고 달아주셨더군요.
(물론 제목에 불만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말러의 삶에 대해 써달라는 주문이었는데,
그대로 늘어놓자니 너무 식상해서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꾸며봤습니다.
실제 말러의 말투가 어땠을지는... 저로서야 알 수 없지만요 ㅋ
다만, 지면의 한계가 있어 일부 대목이 삭제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좀 안타깝기도 해서
여기에 원문 그대로 올립니다. (삭제된 부분은 별도 표기)
날조에 가까운 상상력을 동원한 글이라 올리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발표된 글이라 비판은 읽으시는 분께서 해주시리라 믿고 올립니다.
출생과 유년 시절
필자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이 자리를 빌어 만나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한국의 모든 말러 애호가를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말러 예, 저 역시 반갑고 기쁩니다. 비록 '내 시대는 올 것이다'라고 말하긴 했었지만, 솔직히 생전에는 제 음악이 지금과 같은 인기를 누릴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백 년 전에 그랬다면 더 좋았겠지만(웃음)…, 어쨌건 정말로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필자 선생님이 태어난 지 올해로 151년째지요?
말러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죽은 지는 딱 100년째고요. 전 1860년 7월 7일에 태어나 1911년 5월 18일에 죽었으니까요.
필자 태어난 곳은 보헤미아의 칼리슈테였고요?
말러 아, 그건 지금의 체코식 지명이고, 당시에는 독일식으로 칼리슈트라고 불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그곳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거든요. 무척 작은 마을이었죠. 우리 집에는 창문에 유리조차 없었고,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더군요. 하지만 제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온 집안이 이글라우(지금은 이흘라바라고 부릅니다만)로 이사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건 없습니다.
필자 그럼, 이글라우에 대해선 어느 정도 기억하시나요?
말러 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죠. 제 실질적인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당시로서는, 더구나 시골 치고는 그래도 꽤 번화한 곳이었어요. 제국 내 주요 군사 주둔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곳에서 선술집을 차려 군인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죠.
필자 잠시만요, 우선 가족사항에 대해 몇 가지 말씀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말러 그러죠. 제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원래 마부였습니다. 지식욕이 강해 항상 책을 읽고 다녀서 '학자 마부'란 별명을 얻었다고 하는데, 덕분에 저 역시 어려서부터 책을 제법 읽을 수 있었죠…. 그건 좋은 얘기지만, 아버지는 완고하고 다혈질인 분이었던 반면에 어머니 마리는 조용하고 병약한 분이었고,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 자주 싸우셨어요. 그게 어린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짐작하시겠지요?
필자 그 중 한 번은 부모님의 다툼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니까 길거리 악단이 유쾌한 민요 가락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하던데….
말러 예, 정확히 말하자면 '아 사랑스런 아우구스틴'(Ach du lieber Augustin)이었죠. 아마 들어보시면 금방 '아, 그거…?'라고 하게 될 겁니다. 하여튼 이때의 이미지는 절 평생토록 쫓아다녔습니다. 먼 훗날의 얘기지만, 프로이트와 상담할 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죠. 우리는 이때의 체험이 제 음악이 아이러니로 가득하게 된 한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요.
필자 그리고 형제자매도 많았지요? 당시에는 많이들 낳았으니까요.
말러 예…. 많이 낳았고, 많이 죽었죠. 저를 포함해 아들이 열하나, 딸이 셋이었는데 제가 사실상 장남이었어요. 제 위로 형이 있었지만 제가 나기도 전에 죽었거든요. 동생들 중에도 일찍 죽은 아이가 많았는데, 제 바로 아래 동생으로 열네 살 때 죽었던 에른스트가 가장 제 맘을 아프게 했지요.
[붉은 부분은 등재시에 삭제된 부분입니다. 물론 편집부의 고충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글라우를 언급한 대목이 없어져서 말러가 칼리슈트에서 계속 자란 것처럼 돼버렸고, 또 말러의 작품이 아이러니로 가득하게 된 근원을 설명할 수 없게 되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필자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말러 글쎄요, 어려서부터 음악이란 것에는 익숙해 있었으니까요. 아침마다 근처 부대에서 기상나팔 소리가 들렸고, 군악대 연주도 자주 들었어요. 선술집에 들이닥치는 손님들은 저마다 노래를 불러댔고, 자기 악기를 가져와서 연주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물론 푼돈을 바라면서 선술집에서 붙박이로 연주를 했던, 반쯤 '프로'인 팀도 있었죠.
필자 그래서, 그런 종류의 체험들이 선생님 작품 속에 렌틀러나 행진곡 같은 요소로 반영되었던 거군요?
말러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사실일 겁니다. 세월이 갈수록 그런 요소가 제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요. 마지막까지도요.
학업과 편력 시대
필자 자, 그럼 이제 음악 수업에 대해 말해주시죠.
말러 제가 네 살 때, 외할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다락방에 갔는데, 고물 피아노가 있더군요. 소리는 제대로 안 났지만 어찌나 신기하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뚱땅거리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제가 음악가가 되리라고 확신하셨죠. 이후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해 열 살 때는 마을 극장에서 '데뷔 공연'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은 것은 열다섯 살 때 빈 음악원에서였지요.
필자 당시에 브루크너가 거기서 가르치고 있었죠?
말러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군요(웃음). 그의 수업(화성학이었는데)을 정식으로 들은 적은 없습니다. 당시 돈이 없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제게 맥주도 사주고 하셨지만, 제가 그분께 끌렸던 것은 그 대담하고 참신한 음악 어법 때문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그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는데, 저는 그 중 한 사람이라고 감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필자 지휘자가 되고 나서 브루크너의 작품을 될 수 있는 한 자주 지휘했다는 사실로도 그 점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되겠죠. 하지만 선생님 임의로 개작한 버전으로 지휘했던 걸로 아는데요? 오리지널 버전이 아니라….
말러 이것 보세요, 당시엔 다들 그랬어요! 그게 왜곡이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그의 음악은 계속 묻혀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 오리지널 버전을 끝까지 참고 들어줄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필자 아 예, 알겠습니다. 진정하시고요…. 이야기를 되돌려보죠. 하여튼 선생님이 브루크너의 음악을 높이 평가한 것은 당시 선생님이 바그너에 한창 경도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잖습니까?
[이 부분은 인터뷰에 약간의 긴장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사실 빼버려도 상관없는 대목이죠. 하지만 정말로 제가 인터뷰를 진행했다면 했을 질문이기도 합니다. 말러 반응이 정말로 이랬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말러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요. 저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당시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랬어요. 그 점을 못마땅해 한 보수적인 교수님들 눈치를 보던 학생들까지 합치면, 대부분이라 해도 크게 잘못된 건 아닐 겁니다.
필자 한스 로트나 후고 볼프 같은 친구들과 사귀게 된 것도 그 시절이었죠?
말러 예, 참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저와 함께 음악의 길을 걸어간 사람 가운데 정신질환으로 생을 마친 사람들이 유독 많았어요. 저도 정신적인 위기를 몇 번 겪었지만….
필자 졸업 후에 곧바로 지휘계로 뛰어들었나요?
말러 아뇨, 졸업은 1878년 7월에 했지만 지휘 일은 1880년부터 했어요. 그 사이엔 피아노 레슨을 주로 했었죠.
필자 첫 지휘 자리는 어땠나요?
말러 정말이지 끔찍했어요! 바트 할이라는 온천 휴양지의 소극장이었는데, 거기서 연주하는 거라곤 삼류 오페레타나 춤곡, 그 밖의 그런저런 소품들이 다였습니다. 듣다 편안히 잠들기 딱 좋은 곡들이었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운데, 악보 정리와 좌석 청소, 게다가 극장장의 딸을 유모차에 태워 산책시키는 것까지도 제 몫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르바이트였다지만…,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죠. 석 달 만에 끝나 다행이었습니다.
[역시 반드시 필요한 대목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이기도 하죠. 당시 지휘자의 처우가 어땠는가에 대해 알려주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필자 '탄식의 노래'란 작품으로 '베토벤 상'에 응모한 것도 그 해였지요?
말러 예. 진정한 저의 첫 작품이라 할 만한 곡이었죠. 일종의 칸타타입니다만, 브람스나 한슬리크 같은 심사위원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작품이었을 겁니다. 제가 낙선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건 지금 돌이켜봤을 때 얘기고, 당시에는 엄청나게 낙담했었죠. 만에 하나 일이 잘 풀렸더라면, 지휘에 시간을 뺏기는 일 없이 전문 작곡가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필자 하지만 그랬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구스타프 말러는 나오지 않았겠지요.
말러 (어깨를 으쓱하며)그럴지도 모르죠, 누가 알겠습니까. 하여튼 그 뒤로도 전 지휘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라이바흐, 올뮈츠, 카셀, 프라하,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이렇게 죽 이어졌지요.
[여담인데, 글을 쓸 때 가운데점과 쉼표의 용법을 헷갈리는 분들이 많더군요. 특히 우리나라 잡지에서는 편의상 가운데점으로 표기해야 할 것을 쉼표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반대로 했어요. 즉 잡지에는 라이바흐~부다페스트까지가 계속 가운데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도시는 맥락에서 봤을 때 하나로 묶인다기보다는 개별적으로 병렬되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쉼표로 표기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상은 잡소리^^;;]
필자 점점 큰 도시로 옮겨갔군요. 선생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말러 하지만 그 노력이란 게 이만저만했어야 말이죠. 단원들은 어디서나 대개 실력이 형편없었고, 타성에 젖어 있었어요. 제가 요구하는 수준까지 그들을 끌어올린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한창 열이 올라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비웃는 눈으로 킥킥거며 수군대질 않나…. 나중엔 제 지위와 명성으로 말을 듣게끔 강제할 수 있었지만 처음엔 그럴 수조차 없었어요. 기댈 수 있는 데가 아무 데도 없었기 때문에 오직 실력으로만 뚫고 나가야 했습니다.
필자 브람스의 인정을 받은 건 부다페스트에서였지요?
말러 맞습니다. 1888~91년에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일했지요. 당시 부다페스트는 빈과 더불어 제국의 수도였고 제국 제2의 도시였으니, 처음과 비교하면 정말 대단한 출세였지요. 모든 오페라를 헝가리어로 불렀다는 게 좀 괴로운 일이었지만…. 브람스가 이 극장에 온 것은 제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공연할 때였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내게로 달려와 상기된 표정으로 꽉 끌어안더군요. "내 생애에 이렇게 훌륭한 '돈 조반니' 공연은 처음"이라면서요. 1890년 말의 일이었죠.
필자 그럼, 이전의 '베토벤 상' 낙선 때 생긴 앙금은 청산된 건가요?
말러 (쓴웃음)어쩌겠어요, 브람스는 당시의 제가 자기가 낙선시킨 바로 그 녀석이란 걸 알지도 못했는데요. 어쨌든 그때부터 그와 교분을 쌓게 되었죠.
필자 그런 거물과 친분을 쌓다니,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겠군요.
말러 사실입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어요. 훗날 빈 오페라 극장에 갈 때 도움을 받았죠.
필자 어쨌든 이 무렵부터는 선생님 경력은 무척 순조로웠겠군요.
말러 예, 경력 면에서만 보자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썩 좋지는 않았어요. 1889년에는 아버지와 여동생, 어머니가 연달아 세상을 떠났거든요. 이때부터 제가 온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수입의 태반이 가족 부양에 들어가긴 했지만…. 어쨌든 꾸려나가기가 그리 쉽진 않았어요.
함부르크, 그리고 초기 작품들
필자 그럼, 1891년에 함부르크 극장으로 옮긴 건 더 나은 수입을 바란 것이었나요?
말러 그건 아닙니다. 그해에 부다페스트 극장 총감독이 교체되었는데, 제게 엄청난 재량권을 부여했던 전임자와는 달리 저와 사사건건 충돌했어요. 일찌감치 손을 쓴 덕에 다행히도 다른 자리를 금방 구할 수 있었지요. 마지막 공연으로 '로엔그린'을 지휘했었는데, "말러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극장이 떠나갈 듯했어요. 지금 돌이켜봐도 참 영광스러운 추억입니다. 전송 차 나온 분들께 "가장 행복한 추억을 지니며 떠납니다"라고 말했던 건 인사치레만은 아니었어요.
필자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 제2의 도시였던 부다페스트에서 함부르크로 옮긴 걸 좋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말러 몇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함부르크 역시 '제국 제2의 도시'였다는 걸 알아야 하죠. 이 경우엔 비스마르크가 세운 독일 제국입니다만…. 상업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수준에서도 이 도시는 베를린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어요. 극장의 수준 역시 대단히 높아서, 당대 일류의 성악진을 보유하고 있었지요. 더구나 '헝가리 어 오페라'에서 마침내 완전히 해방된 기분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필자 그렇다면, 새 자리에 완전히 만족하신 모양이군요.
말러 (쓴웃음)아, 그건 아니고요. 날씨는 구질구질하고 물가는 비싼데다 오페라를 매일 지휘해야 했으니까요. 더구나 실은, 보수도 썩 좋다곤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대중과 언론의 반응은 좋았고, 한스 폰 뷜로의 지지를 받게 된 것도 큰 수확 중의 하나였죠.
필자 드디어 그 이름이 나오는군요!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했다가 스승이나 다름없었던 바그너에게 아내를 뺏긴 불운의 지휘자잖아요?
말러 다들 그렇게 알고 있더군요. '베를린 필의 초대 상임지휘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로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았을 텐데(웃음)…. 하여튼, 그와의 인연은 사실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어요. 예전 카셀의 소극장에서 일하던 시절에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뭘 시켜도 좋으니 당신 밑에서 배우면서 일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완전히 무시한 것까진 그렇다 쳐도, 그 내용을 극장 측에 흘리는 바람에 제 입장이 한동안 무척 난처했었지요.
필자 그런 분이 당신 편으로 돌아섰단 말씀이죠?
말러 적어도 지휘자로선 말이죠. 그것도 아주 유별난, 극단적인 방식으로요…. 예를 들어 제 공연이 끝난 뒤 청중이 거의 다 빠져나갈 때까지 좌석 맨 앞자리에서 크게 박수를 친다든가, 여러 가지 있었죠. 하지만 작곡가로선 구제불능이란 판정을 내리더군요.
필자 교향곡 2번을 작곡하던 때 말씀이군요. 하지만 결국 뷜로는 죽음으로 빚을 청산한 거잖습니까? 그의 장례식에서 선생님이 2번의 피날레를 쓸 영감을 얻었으니까요.
말러 그렇죠. 1894년의 일입니다. 이즈음에 많은 일들을 겪었어요. 뷜로가 죽은 지 거의 정확히 1년 만에 동생 오토가 권총으로 자살했지요. 저를 본받아 작곡가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게으르고 나약했던 성격만 고쳤더라면 아마 크게 되었을 겁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 충격을 이겨냈던 건 당시 한창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필자 네? 알마를 이 시절에 만나셨나요?
말러 (크게 당황해 붉어진 얼굴로)아니, 아니, 그녀가 아니에요. 안나 폰 밀덴부르크라고…, 소프라노였어요.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계속 함께 일했고, 그러다 보니 좋아진 겁니다. 하여튼 그 얘긴 이쯤 해두죠.
필자 그럼 이때까지 작곡한 작품들 얘길 해주시죠. '탄식의 노래' 이후의….
말러 중요한 것들만 말씀드리자면, 네 곡으로 이루어진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가사는 제가 직접 썼습니다)가 있었고 1888년에 완성한 교향곡 1번과 1894년에 완성한 2번, 1896년에 완성한 3번이 있습니다. 1번은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에서 주요 악상을 끌어다 쓴 것인데, 원래는 5악장의 교향시로 할 생각이었지만 나중에 한 악장을 빼버렸죠. '블루미네'라는 악장인데, 요새는 종종 녹음되는 모양이더군요. 발표했을 때 반응들이 아주 가관이었죠. 한슬리크는 "둘 중 하나가 미쳤음이 틀림없지만, 내 쪽은 아니다"라고 하질 않나…. 하긴 여러 가지로 거북한 곡이었으리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패러디에 익숙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요소가 없는 교향곡 2번이나 3번도 '과대망상적'이라느니, '기교만 있고 내용은 없다'느니 하는 비판이 이어졌지요.
필자 하지만 2번 같은 곡은 초연에서 청중 반응이 무척 좋았던 걸로 아는데요? 그리고 3번도 전곡 초연 때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말이죠.
말러 사실입니다. 그걸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죠. 어찌된 게 제 음악에 대해선 비평가들이 대중보다 더 감이 느린 것 같더군요(웃음)…. 그런데 제 작품에 대한 해설은 다른 분께서 따로 해주실 예정이죠?
필자 예. 그럼, 작품 얘기는 이쯤 해두기로 하겠습니다.
[나중에 생각난 건데, 그런 '다른 분'은 없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적당히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냥 실려 버렸죠. 그리고 2번과 3번에 패러디적인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1번에 비하면 두드러지지 않아 이렇게 처리했습니다.]
다 실으면 너무 길어져서(사실은 제가 다듬기 귀찮아서 ㅎ) 오늘은 여기까지 올리겠습니다. 다음번에는 '알마와 황금시대의 영욕', '1907년의 파국에서 사망까지' 이 두 챕터에 해당하는 분량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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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게 읽었어요! 스트링앤보우 잠깐 살펴볼 때도 읽었었는데 편집된 대목들이 있었네요. 글이 인터뷰 형식이라 자세한 내용들도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동아리 공연 프로그램 노트를 쓰고있는 참인데 이런 형식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드네요ㅎㅎ
아 잡지에서도 읽으셨군요! 아무도 관심 없으신 줄 알고 한참 후에나 올릴까 말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ㅋ 이런 형식이 흥미를 유발하는 데는 도움이 되는데, 지면이 제한돼 있거나 전달할 정보가 많을 경우에는 그다지 적당치 않은 것 같아요. 후반부는 저녁 때 올리도록 합죠 ㅋ
너무 재밌어서 프린트해서 보고있어요..^^
너무 재밌게 잘 쓰셔서 이해가 쏙쏙 되는 것 같습니다.
재밌네요
도리안님! 기회가 되면 극작가 함 시도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