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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emnity of the Nativity of the Lord (Christmas)
Reading 1: Is 52:7-10
How beautiful upon the mountains are the feet of him who brings glad tidings, announcing peace, bearing good news, announcing salvation, and saying to Zion, “Your God is King!” Hark! Your sentinels raise a cry, together they shout for joy, for they see directly, before their eyes, the LORD restoring Zion. Break out together in song, O ruins of Jerusalem! For the LORD comforts his people, he redeems Jerusalem. The LORD has bared his holy arm in the sight of all the nations; all the ends of the earth will behold the salvation of our God.
예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2013. 12. 25.)
제1독서: 이사야서 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Reading 2: Heb 1:1-6
Brothers and sisters: In times past, God spoke in partial and various ways to our ancestors through the prophets; in these last days, he has spoken to us through the Son, whom he made heir of all things and through whom he created the universe, who is the refulgence of his glory, the very imprint of his being, and who sustains all things by his mighty word. When he had accomplished purification from sins, he took his seat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on high, as far superior to the angels as the name he has inherited is more excellent than theirs. For to which of the angels did God ever say: You are my son; this day I have begotten you? Or again: I will be a father to him, and he shall be a son to me? And again, when he leads the firstborn into the world, he says: Let all the angels of God worship him.
제2독서: 히브리서 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Gospel: Jn 1:1-18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H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All things came to be through him, and without him nothing came to be. What came to be through him was life, and this life was the light of the human race; the light shines in the darkness, and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it. A man named John was sent from God. He came for testimony, to testify to the light, so that all might believe through him. He was not the light, but came to testify to the light. The true light, which enlightens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He was in the world, and the world came to be through him, but the world did not know him. He came to what was his own, but his own people did not accept him. But to those who did accept him he gave power to become children of God, to those who believe in his name, who were born not by natural generation nor by human choice nor by a man’s decision but of God. And the Word became flesh and made his dwelling among us, and we saw his glory, the glory as of the Father’s only Son, full of grace and truth. John testified to him and cried out, saying, “This was he of whom I said, ‘The one who is coming after me ranks ahead of me because he existed before me.’” From his fullness we have all received, grace in place of grace, because while the law was given through Moses, grace and truth came through Jesus Christ. No one has ever seen God. The only Son, God, who is at the Father’s side, has revealed him.
복음: 요한복음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Biblical Reflection for Solemnity of the Nativity of the Lord (Christmas) by Fr. Thomas Rosica (Wednesday, December 25, 2013)
In Jesus, the Medium is Indeed the Message
The message of Christmas takes our breath away every year and continues to stagger the imagination: the Second Person of the Blessed Trinity, the only begotten Son of the Father, the eternal Word, our Creator wills to clothe himself in our nature, and to become man, our brother, one of us! God Himself lies in the manger, completely human, completely divine. It is an awesome reality!
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의 예수성탄대축일 성경묵상 (2013. 12. 25.)
예수님 안에 미디어가 메시지다
크리스마스의 메시지는 매년 우리를 감동시키고 지속적으로 상상을 자극한다. 복된 3위의 두 번째 위격이시며 성부의 오직 한 분 아드님이시며, 우리의 형제, 우리 중의 한 분, 하느님 본인께서 완전한 인간, 완전한 신으로 구유에 누워 계신다. 정말 놀라운 현실이다.
Divine Communication with Us
The second reading from the letter to the Hebrews for Christmas Mass during the Day [1:1-6] opens with a reflection on the climax of God’s revelation to the human race in his Son. The divine communication was initiated and maintained during Old Testament times in fragmentary and varied ways through the prophets. But now in these last days [v 2] the final age, God’s revelation of his saving purpose is achieved through a son, i.e., one who is Son, whose role is redeemer and mediator of creation. He was made heir of all things through his death and exaltation to glory, yet he existed before he appeared as man; through him God created the universe. The once-humiliated and crucified Jesus has been declared God’s Son, and this name shows his superiority to the angels.
하느님의 우리와의 소통
성탄대축일 낮 미사의 제2독서 히브리 1,1-6은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심의 절정을 묵상하며 시작한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소통은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지만 예언자들을 통해서 간헐적이고 여러 다른 방법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지금 이 마지막 때에 (2절) 하느님의 구원목적이 아드님을 통해서 드러났다. 아드님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창조의 중재자 역할을 한 분이시다. 죽음과 영광의 부활을 통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지만 그분은 사람으로 나타나시기 전에 이미 존재하셨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되시고 이 이름은 천사보다 뛰어나시다는 것을 나타낸다.
Divine camping in our midst
John’s Prologue [1:1-18] states the main themes of the fourth gospel: life, light, truth, the world, testimony, and the preexistence of Jesus Christ, the incarnate Logos, who reveals God the Father. In origin, the Prologue was probably an early Christian hymn. Its closest parallel is in other Christological hymns, Col 1:15-20 and Philippians 2:6-11. It’s core is poetic in structure, with short phrases linked by “staircase parallelism,” in which the last word of one phrase becomes the first word of the next.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텐트를 치시고 야영하신다
요한복음 서언(1,1-18)은 4번 째 복음의 주제들인 생명, 빛, 진리, 세상, 증거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미리 존재하심, 성부를 드러내시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 이 서언의 기원은 아마 초기 크리스천의 찬미가였을 것이다. 이와 아주 근접한 내용이 콜로세 1,15-20과 필리비 2,6-11의 다른 찬미가에 있다. 핵심은 시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짧은 구절들이 계단식 대치법으로 연결되어 한 절의 끝 단어가 다음 구절의 첫 단어가 된다.
“In the beginning” evokes the first words of the Old Testament (Genesis 1:1). The Word (Greek logos) combines God’s dynamic, creative word (Genesis), personified pre-existent Wisdom as the instrument of God’s creative activity (Proverbs), and the ultimate intelligibility of reality (Hellenistic philosophy).
“한처음에”는 구약의 (창세기 1,1) 서두를 떠올린다. 말씀 (그리스어로 로고스)은 하느님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말씀(창세기), 하느님 창조의 도구로서의 의인화된 선재 지혜, 그리고 실존의 절대적인 지성을 모두 포함 한다(헤레니즘 철학).
The prologue climaxes with the announcement: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v 14] [in Greek literally: pitched his tent among us]. It’s a form of divine camping in our midst! This presence came about though the free love of God: “In this way the love of God was made manifest among us, that God sent his only Son into the world that we might live through him” [I John 4:9]. The Word is not simply a message that we can put into words. In Jesus, the message and the messenger are united. The medium is indeed the message!
서언은 다음의 선언으로 절정을 이룬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그리스어 원문은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에 텐트를 치셨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에서 일종의 야영을 하시는 것이다. 이 현존은 하느님의 자유로우신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 1서 4,9]. 말씀은 우리가 우리말로 옮길 수 있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다. 예수님 안에 메시지와 메신저가 결합된다. 미디움이 진정 메시지이다!
번역자 주: 맥루한(M. McLuhan)이 1960년대에 했던 이 말 즉 “미디어가 메시지다”는
"TV라는 매체 형식 자체가, TV로 방영되는 컨텐츠의 성격, TV 시대의 인간관계를 규정한다."를 뜻한다. 미디움은 미디아의 단수
An unprecedented and humanly inconceivable novelty
In his Apostolic Exhortation Verbum Domini, that followed the 2008 Synod on the Word of God in the Life and Mission of the Church, Pope Benedict XVI writes in #11:
We are speaking of an unprecedented and humanly inconceivable novelty: “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 (Jn 1:14a). These words are no figure of speech; they point to a lived experience! Saint John, an eyewitness, tells us so: “We have beheld his glory, glory as of the only Son from the Father, full of grace and truth” [1:14b]. The apostolic faith testifies that the eternal Word became one of us. The divine Word is truly expressed in human words.
전례 없는 인간적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참신함
2008년의 교회의 삶과 사명에서의 하느님 말씀에 관한 시노드 직후에 발표된 그의 사도적 권고 베르붐 도미니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 11항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유래 없는 인간적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참신함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4). 이것은 비유가 아닙니다. 체험을 가리킵니다. 눈으로 목격한 증인인 성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14ㄴ]. 사도적 신앙은 영원한 말씀이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진정 인간의 말로 표현됩니다.
God does not love at a distance
The Christmas message announces a new divine presence among us. Each day of our lives we seek the personal presence of those whom we care for and who care about us. We cannot imagine leaving friendship and love at a distance. Photographs, memories, letters, e-mails, text messages and phone calls are not enough. We want to enjoy the personal presence of those who fill our minds and let us live in their hearts. We live in God’s heart, and Christmas visibly brought among us the Son of God who cares infinitely for each of us. God did not want to live that love at a distance.
하느님께서는 멀리서 사랑하지 않으신다
성탄 메시지는 우리 가운데 하느님께서 새로이 현존하심을 선언한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우리가 염려하고 우리를 염려하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현존을 추구한다. 우정과 사랑을 멀리 놔두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진, 기억, 편지, 이메일, 문자메시지, 전화로는 불충분하다. 우리의 머리를 채우고 우리가 그들의 마음 안에 사는 그런 사람들의 개인적인 현존을 우리는 즐기고 싶어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 안에 살며, 성탄은 우리 각자를 무한정 염려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가시적으로 모셔왔다. 하느님께서는 멀리서 그런 사랑을 하시고 싶지 않으셨다.
The highpoint of Jesus’ self-communication
Every Eucharist proclaims,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not perish but may have eternal life” [Jn 3:16]. Because the life of Christ is oriented towards others, the Church must share this life with the world. The Life of Christ is his gift to the Church that is meant to be the Church’s gift to the world. In the Eucharist we don’t only receive the life of Christ. Beholding this most precious gift, we are moved as well to worship and adore the Triune God.
예수님의 자체 소통의 정점
모든 성체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요한 3,16]. 그리스도의 삶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어서 교회는 이 삶을 세상과 나누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삶이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며 그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선물이 되라는 것이다. 성체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만 받는 것이 아니다. 이 가장 귀한 선물을 보면서 우리도 감동을 받아 삼위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흠숭한다.
God’s Communication Platform and Ours
The Word did not become an e-mail, an SMS or text message, or some kind of divine oracle uttered from some distant heaven long ago. Through Mary, the Word became flesh and pitched his tent among us. The Word became close to real people in real time. Through the wonder and mystery of the Incarnation, the Word did not become a philosophy, a theory, or a concept to be discussed, debated, exegeted or pondered. But the Word became a person to be followed, enjoyed and loved! Our redemption is found in the Child of Bethlehem.
하느님의 통신프랫폼과 우리의 통신프랫폼
말씀은 이메일, SMS 또는 문자메시지, 또는 오래 전에 어떤 먼 하늘에서 온 어떤 종류의 신탁이 되지 않았다. 마리아를 통해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에 자신의 텐트를 설치하셨다. 말씀은 실시간에 실제의 사람들에게 가깝게 되셨다. 육화의 놀라움과 신비를 통해서 말씀이 철학, 이론, 또는 토론하고, 논쟁하고, 해석 또는 사유해야하는 개념이 되지 않으셨다. 말씀은 따르고, 즐기고, 사랑해야 할 사람이 되셨다. 우리의 구원은 베들레헴의 아기 안에서 발견된다.
God’s communication platform is the human person and Christmas inaugurates a completely new kind of real friendship with God. Friendship in virtual spaces is quite different from real time friendship. True friendship depends on mutual revelations, and can only flourish within the boundaries of privacy and modesty. The distance and abstraction of our online friendships and online relationships can lead to a kind of systemic desensitization as a culture if we are not wise, prudent and attentive to these new realities. Along with the increase in online networking, there are increasing levels of reported loneliness. Certain questions arise from the phenomenon of Social Networking. What is it doing for us? What is it doing to us? What is it doing to our sense of social boundaries? To our sense of individuality? To our friendships? We expose everything, but are we feeling anything?
하느님의 통신플랫폼은 인간 개인이며 성탄은 하느님과의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진정한 우정을 시작하게 한다. 가상공간에서의 우정은 실시간의 우정과 사뭇 다르다. 진정한 우정은 상호노출(속을 드러냄)에 의존하고 사적비밀과 겸손의 한계 안에서만 꽃피울 수 있다. 우리의 온라인 우정과 온라인 관계의 거리와 관념은 우리가 이 새로운 실체에 대해 현명하게, 신중하게,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문화로서 일종의 체계적인 탈감각을 초래하게 된다. 증대되는 온라인 네트워킹과 함께 외로움의 정도가 증가한다. 사회 네트워킹의 현상에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한다. 그것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나?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 우리의 사회적 경계에 대한 감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개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우정에는? 우리는 모든 것을 노출시키지만 어떤 느낌을 갖는가?
The great challenge in the era of Facebook and Twitter consists in presenting the profound message of Jesus and the teaching of the Church without being sidetracked by technology’s superficial aspects. An almost exclusive use of text and emails means that as a society we’re losing some of the ability to build interpersonal communication that’s necessary for living together and building a community. In using the media to evangelize and teach the masses, we must never lose sight of the need to reach and teach the individual as though he or she were the only person being addressed.
페이스북과 트위터 시대의 큰 도전은 어떻게 예수님의 심오한 메시지와 교회의 가르침을 기술의 피상적인 관점 때문에 곁길로 새지 않고 전달할 수 있는가이다. 거의 독점적으로 문자와 이메일을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함께 살고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개인 간의 소통의 어떤 능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복음화와 메시지의 가르침에 미디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인 것처럼 개인에게 다가가서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The enigma of the human condition
At Christmas, let us recall the words of Benedict XVI in his Apostolic Exhortation Verbum Domini #6:
…Yet we would not yet sufficiently grasp the message of the Prologue of Saint John if we stopped at the fact that God enters into loving communion with us. In reality, the Word of God, through whom “all things were made” (Jn 1:3) and who “became flesh” (Jn 1:14), is the same Word who is “in the beginning” (Jn 1:1). If we realize that this is an allusion to the beginning of the book of Genesis (cf. Gen 1:1), we find ourselves faced with a beginning which is absolute and which speaks to us of the inner life of God.
인간상황의 수수께끼
성탄에 그의 사도적 권고 베르붐 도미니 6항의 베네딕토 16세의 말씀을 들어보자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서 우리와 사랑의 공동체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에 멈춘다면 우리는 아직 성 요한의 서언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요한 1,3) “사람이 되신” (요한 1,14)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에” (요한 1,1)의 말씀과 같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이 창세기 시작의 암시라는 것을 안다면 절대적이고 하느님의 내적 삶에 대해 말해주는 시작과 대면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The Johannine Prologue makes us realize that the Logos is truly eternal, and from eternity is himself God. God was never without his Logos. The Word exists before creation. Consequently at the heart of the divine life there is communion, there is absolute gift. “God is love” (1 Jn 4:16), as the same Apostle tells us elsewhere, thus pointing to “the Christian image of God and the resulting image of mankind and its destiny”. God makes himself known to us as a mystery of infinite love in which the Father eternally utters his Word in the Holy Spirit. Consequently the Word, who from the beginning is with God and is God, reveals God himself in the dialogue of love between the divine persons, and invites us to share in that love. Created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the God who is love, we can thus understand ourselves only in accepting the Word and in docility to the work of the Holy Spirit. In the light of the revelation made by God’s Word, the enigma of the human condition is definitively clarified.
요한복음의 서언을 듣고 말씀이 진정 영원하고,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 없이 계실 때가 없었습니다. 말씀은 창조 전에 존재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삶의 가운데에 친교가 있고 절대적인 선물이 있습니다. 같은 성인이 다른 곳에서 말씀하듯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1 요한 4,16)는 “하느님의 크리스천 이미지와 인간의 결과적인 이미지와 운명을 가리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자신을 무한한 사랑의 신비로, 그 안에서 성부께서 성령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영원히 말씀하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알리십니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시고 하느님이신 말씀은 성 삼위 간의 사랑의 대화에서 하느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를 그 사랑을 나누도록 초대하십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나서 우리는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역사에 순응함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드러내신 빛 안에서 인간 상황의 수수께끼는 절대적으로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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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 Thomas Rosica is a priest of the Congregation of St. Basil. In February, 2009, Pope Benedict XVI appointed Fr. Rosica a Consultor to the Pontifical Council for Social Communications.
토마스 로시카 신부님은 바실리오 수도회의 사제이며 2009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교황청 사회 홍보 평의회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