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께서는 더 이상 관료조직의 톱니바퀴가 아니십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할 정무적 판단을 보여주십시오. 저 또한 각하와 함께 목숨을 걸겠습니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려던 찰나, 나는 내 앞에 서있는 상대방의 표정이 일순간 미묘하지만 확실하게 바뀌는 것을 느꼈다.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이 양반의 얼굴이 이렇게 결의에 가득찬 모습을 나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다.
“서 과장... 아니, 서 행정관 말이 맞아. 언제까지고 도망치다 보면 결국 후회하면서 죽게 된다고, 누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었네. 자, 가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자, 그러니까 현재 대한민국 국군을 통수하는 자가 나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리고는 문을 힘껏 제쳤다. 국방색 점퍼 차림의 중년 남성들이 청와대 응접실 쇼파에 몸을 푹 기대고 앉아 이쪽을 노려보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애써 모른체했다.
“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합수부의 정 총장 조사 건은 승인해줄 수 없어요. 만약 조사가 필요하다면 전 장군의 보고서를 대통령인 내가 직접 읽어보고 군 통수권자로서 명령을 내릴 겁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시대와 장소를 고려한다면 말이지. 아니, 사실 그렇게 따져도 아주 평범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조선 사람이 영어에 더해 불란서 말을 할 줄 아는 게 그렇게 유별난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외무부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미국인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말할 때마다 표정이 아리송하게 바뀌더라. 처음에는 이 새끼가 인종차별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미스터 서, 외람된 말씀이지만 영어는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육이오 때 프랑스군 막사에서 잡일을 좀 했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그 미국인 양복쟁이 맥케이 씨는 그제서야 납득했다며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사실 발음이 이상했던 건 지금 생각해보니 맞았던 것 같다. 프레지던트(president)를 ’프헤지덩‘이라고 발음한다거나, ’the’의 소위 ‘번데기 발음’이 자꾸 ‘Z’ 발음으로 헛나온다거나 했으니까. 왠 동양인이 그런 발음을 구사한다면 나라도 놀랐을 것이다.
아무튼 버터 과하게 바른 영어와 프랑스어 실력은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피난 중에 가족과 생이별한 고아 소년 치고는 과분할 정도로 출세한 셈이니까. 재수없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머리도 꽤 좋은 놈이었던 것 같다. 프랑스군 막사의 가스통(Gaston) 상사가 인정한 인재 아니었던가?
열두 살 때의 머리 좋은 나는 또래보다 준비성이 꼼꼼한 편이었다. 남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쁠 때 나는 내게 찾아온 행운을 그냥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정치니 냉전이니 하는 건 하나도 모르던 때였지만, 전쟁을 몇십 년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언젠가 이 코쟁이들은 집으로 돌아갈테고, 그럼 나는 또 혼자 남게 될 터였다. 굴다리 밑에서 구걸하다가 왕초한테 돈이나 뜯기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유엔군이 대부분 짐을 싸서 돌아갈 무렵 프랑스군 대대장 르벨 중령은 친한 신부님을 통해 성당에 나를 맡기고 귀국했다. 그 외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병사와 하사관들이 “이 녀석 똘똘한 놈이다”, “잡역부 따위가 아니라 공부를 시켜야 할 녀석이다” 등 금칠을 해준 덕분에 나는 클레르몽 신부님의 소개로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학업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급한 불은 껐지만 솔직히 내 형편에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는 거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무슨 일을 하며 먹고 살까 걱정하던 나에게 대사님은 “영어에 프랑스어까지 할 줄 알면 꼬레 외무부에서 당장에라도 특채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물론 말단 심부름꾼에게 하는 얘기였으니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그때의 나에게는 매우 귀중한 조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외무), 그러니까 지금의 외무고시는 서울대니 연고대니 하는 학벌 쟁쟁한 녀석들이나 감히 꿈이라도 꿀 수 있는 문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서 몇 년씩이나 선진국 생활을 즐기려면 그만큼의 ‘자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칙에는 예외가 존재하고, 관례에는 뒷구멍이 존재하는 법. 법에도 없고 시행령에도 없는 “외국어능통자 전형”이라는 구멍이 있었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돈 쳐발라서 외국으로 자식을 유학보낸 모 권력자의 자제를 억지로 붙여주려는 꼼수였겠지만, 내가 직접 인사비리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개구멍을 나눠쓰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보았다. 여하간 그렇게 나는 미증유의 존재, 피난민 고아 고졸자 출신의 3급 을종(지금으로 치면 5급) 외무직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줄도 빽도 없는 고졸 외교관이 갈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간단한 연수과정을 마치고 내가 배속받은 곳은 공무원이나 사업 목적 출장자들에게 단수여권을 발급해주는 부서였다. 고시 출신자로서 여권과 계장을 했다던 사람은 내가 처음이었고, 아마 2020년 기준으로 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과장님이 거기서 근무하셨다고요?”
나중에 누가 이렇게 물었을 때도 나는 “여기서 뺑이치는 것보다야 거기서 도장이나 찍어주는 게 훨씬 편했지” 하고 너스레를 떨곤 했다. 아무튼 어리디 어린 스물세살 막내 여권과 서수완 계장은 조직의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이대로는 험지 – 물론 그때 기준으로는 한국도 다른 나라 외교관들 입장에서는 험지에 해당했지만 – 뺑뺑이나 실컷 돌다가 커리어 쫑낼 게 뻔했기에, 나는 무언가 수를 써보기로 했다.
아마 연수 동기 중에 실제로 회의 자리에 배속한 녀석도 있었을테지만, 내가 여권에 도장 찍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대통령을 만나 베트남 파병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고 있었다. 군 문제를 아직 해결하지 못했던 나는 차라리 월남으로 떠나기로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채 고시에 합격한 인원은 조건 없이 장교로 군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일종의 학군단 같은 개념으로, 3년 조금 넘게 군생활을 하다 오면 호봉도 오르고 조직에서도 “각 잡혔다”며 대우해주니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그 말로만 듣던 ‘군대 체질’일 수도 있지 않은가? 정 더럽고 아니꼬우면 그냥 말뚝 박으면 될 일이었다. 군바리가 대통령도 해먹고 장관도 해먹고 국회의원도 해먹는 나라에서는 그게 우월전략이었으니까.
비슷한 기수의 직원들 중에서도 그렇게 병역을 해결하는 이가 꽤 있었지만, 월남 파병에 자원하겠다는 미친놈은 나 하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 술지게미에 사카린 뿌려 먹을 때 혼자 쌀밥에 고깃국 뜨던 – 요즘 말로 금수저 – 샌님들이 파병은 무슨 파병인가? 솔직히 내 배속 담당관도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결국 나는 제9보병사단(백마부대)의 신임 소위로 월남 땅을 밟았다. 영어도 적당히 할 줄 알고 (잡종이라지만) 3급 을종 공무원 출신의 쏘가리이니 적절히 사령부에나 짱박을 줄 알았던 나의 기대는 2차 배속기간 중에 산산히 부서졌다. 하필이면 부대에서, 아니 파월 한국군 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던 점이 패착이었다.
“이 새끼, 적당히 살이나 태우고 오면 그럭저럭 베트콩같아 보이겠네. 뺑이 쳐라.”
이렇게 말하는 박 모 대위의 뺨을 올려붙이고 영창에나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곧바로 부대마크 없는 수상한 군복을 입은 미국인 장교가 내 손을 덥썩 움켜잡고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건네면서 나는 꼼짝없이 그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 특수작전단, 그러니까 MACV-SOG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아마 밀리터리 매니아거나 냉전사에 각별히 관심이 많은 이들은 알 것이다. SOG라 함은, 월남전 기간동안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는 차마 할 수 없는” 각종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작전들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조직이었다. 낮에는 남베트남군 장교에게서 속성 월남어 강좌를 듣고, 밤에는 적의 무전을 감청하거나 부대의 당직을 서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한 1년동안은 나에게 외부 작전과 관련된 지시라고는 일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중대장의 호출을 받아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고, 그는 한 무더기의 서류뭉치를 턱 건네주더니 내일까지 달달 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합리했지만 군바리가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그 문서라 함은, 내가 위장 투입될 라오스-북베트남 국경지대에 대한 정보와 그 무시무시하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관한 총체적 정보였다. 베버, 루소, 칸트도 잘 모르던 나는 졸지에 마오주의가 어떻고 스탈린이 왜 국제공산당을 해체했는지에 대한 정보를 마구 머릿속에 쑤셔넣었던 것이다.
물론 다행히도 내가 갑자기 ‘빨간 물’이 들어서 공산당을 찬양, 고무하게 되지는 않았다. AK 소총 한 자루를 들고 삿갓 비슷한 고깔모자와 허름한 곤색 셔츠를 걸친 채 작전지역으로 투입된 나는 꼬부랑 프랑스어를 잘도 주워섬기면서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배운 현지 투쟁주체” 연기를 벌였고, 일종의 ‘정치장교’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호치민 루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지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 이유야 어찌 되었든 - 남을 속이면 벌을 받는 것일까? 적성에 그리 맞지도 않던 스파이 짓도 결국 위기를 맞게 되었다.
첫댓글 오... 이 세계는 조금 다른 결말을 맞았군요. 스토리가 기대됩니다.
더도 덜도 말고 원역사 전개입니다. ㅋㅋㅋ
아마 서두에 나온 파트부터 슬쩍슬쩍 역사가 바뀌지 않을지…
@E.E.샤츠슈나이더 아 ㅋㅋㅋ 거기가 시작이었군요 ㅋㅋㅋ 아예 오리지널이라... 보는 맛이 더 있겠네요 ㅋㅋ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여기서 5명은 뭐하고 살려나.
이 세계관에서 박철환하고 이홍립은 뭐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