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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6
창세기 41:1-16
바로의 꿈과 요셉의 해석(1)
요셉이 감옥에 갇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섬겼다는 것은(창 40:4) 단순히 종으로 시중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아들로서 말씀으로 섬겼다는 의미이다. 꿈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는 자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창 40:15)였다. 히브리는 강, 곧 “구덩이”(히, ‘보르’)이라는 죽음을 건너왔다는 뜻으로 죽음을 거쳐 부활로 나온 자만이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모든 꿈의 해석은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성취되는 말씀이다.
그렇게 말씀으로 섬기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직 언약의 아들을 통해서만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요셉을 통해 언약을 성취하실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바로의 꿈 역시 마찬가지이다. 꿈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해석할 자격이 있는 자가 말씀을 열어 보여줄 때 그 말씀은 성취가 되는 것이다.
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할 자가 없더라 4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아니하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5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7 그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계 5:1-7)
“만 이 년 후에”(1절a)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 ‘그리고 이 년의 끝에’라는 말이다. 요셉이 17세에 애굽으로 팔려와(창 37:2) 삼십 세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였는데(창 41:46)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인 것이다(시 105:19).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까지 요셉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의미이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어버렸지만 꿈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잊지 않고 계셨다. 그리고 온 세상을 언약 안에 있는 요셉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고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1b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 2 보니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 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3 그 뒤에 또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가 나일 강 가에서 올라와 그 소와 함께 나일 강 가에 서 있더니 4 그 흉하고 파리한 소가 그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은지라 바로가 곧 깨었다가 5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니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6 그 후에 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7 그 가는 일곱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킨지라 바로가 깬즉 꿈이라”(1b-7절). 바로의 꿈의 내용과 요셉의 해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일 강”은 이집트의 젖줄로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일 강은 아랫 물에 불과하다. 궁창 아래의 물을 생명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에 매인 종교성을 의미한다. 곧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기에 요셉을 통해 말씀의 섬김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2절)에서 “아름답고”의 ‘야페’는 ‘맑다, 깨끗하다, 아름다운, 좋은’이라는 뜻이고 “살진”의 ‘우베리오트(원형 : 바리) 바사르’는 ‘육이 튼튼한, 육체가 뚱뚱한’이라는 뜻이다.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5절)에서 “무성하고”의 ‘바리’는 ‘살진, 뚱뚱한, 튼튼한’이라는 뜻이고, “충실한”의 ‘토브’는 ‘좋은, 선한, 즐거운, 번영’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는 율법의 문자에 매여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그 모습을 비유하고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은 육신의 열매이며 종교성의 열매라는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이 복음을 겉만 보고 선한 것으로 여기고 이 땅에서 형통하고 번창하는 수단이 되는 종교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교회들은 인생의 아름답고 살진 모습만 보여주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예수 믿고 지극 정성을 바치면 이 땅에서 형통과 번영의 복을 받게 된다는 축복론, 고지론, 왕의 재정 등등의 거짓말이 그것이다.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 16:17-18)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그 뒤에”라고 하는 말의 ‘아하르’는 ‘뒤에, 후에, 다음에’라는 뜻이고, “다른”의 ‘아헤르’는 ‘다른, 또 다른, 다음의’이라는 뜻인데 앞의 일곱 암소에 대한 말씀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서 연결된 하나의 일이라는 뜻이다. 암소들은 모두 하나의 강, 곧 아랫 물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4절)에서 “흉하고”의 ‘라’는 ‘나쁜, 악한, 악, 사나운, 불행, 재난’이라는 뜻이고, “파리한”의 ‘다크’는 ‘으스러진, 작은, 가느다란, 여윈, 낮은’이라는 뜻이다.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6절)에서 “가늘고”의 ‘다크’는 ‘으스러진, 작은, 가느다란, 여윈, 낮은’이라는 뜻이고, “마른”의 ‘샤다프’는 ‘시들게하다, 마르게 하다’라는 뜻이다.
결국 “흉하고 파리한 다른 일곱 암소”는 복음에 대한 비유이고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은 율법 아래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한다. 그런데 아름답고 살진 소가 흉하고 파리한 소에게 먹힌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문자로 지키고 행위를 정당화하는 종교성은 이 땅에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먹혀 장악되어야 한다. “동풍에 마른”이라는 표현으로 곧 이방인과 같은 모습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고 이방인과 같은 모습을 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의 육적이고 종교적인 생각들이 삼킴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그의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8절).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라고 하였는데 바로의 번민은 두 꿈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살진 암소 일곱과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만 등장하였다면 번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로 길몽이라고 판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사건으로 흉몽이라고 생각되는 꿈을 꾸게 되었기 때문에 번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복음 안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담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흉몽과 같은 죽음은 빼고 부활만 이야기하며 추구하고 싶어 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부활도 성경에서 말씀하는 부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9절)라는 술 맡은 관원장의 고백이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린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는 말인지 혹은 바로에 대한 자신의 범죄를 회상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칼’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고 일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 바로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을 해석할 자를 생각나게 하심으로 요셉을 부르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일시적으로 진리를 경험하였더라도 인간은 복음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다.
10 바로께서 종들에게 노하사 나와 떡 굽는 관원장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셨을 때에 11 나와 그가 하룻밤에 꿈을 꾼즉 각기 뜻이 있는 꿈이라 12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13 그 해석한 대로 되어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10-13절). “히브리 청년”이란 앞에서 이미 나누었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전달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언약의 아들 요셉이 그러하듯이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하늘의 진리를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다.
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1-36)
“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15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한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16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4-16절).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라는 표현을 통해 요셉이 정결한 상태로 드러낸다는 것인데 이는 율법의 모든 것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
8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9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레 14:8-9)
우리 성경에 “편안한 대답”(16절)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샬롬’이다. 곧 요셉이 바로(세상)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해석은 평화, 안식에 대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고 평화인데 그것이 곧 안식이다(202503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