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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불 글씨를 즐겨 썼다는 동농 김가진은
봉정사 편액 글씨 외에도 경북 지역 곳곳에 글씨를 남기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백당 종택(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여러 개의 편액 글씨를 남겼다. 종택 사랑채에 걸린 ‘보백당(寶白堂)’
편액(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글씨가 동농의 글씨인데, 봉정사 편액 글씨체 그대로다. 보백당은 김계행(1431~1521)
의 아호이자 당호(堂號)다. 보백은 청백을 보물로 삼는다는 의미다. 김계행은 ‘보백(寶白)’의 의미를 해설한 다음 글귀를
남겼다.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네(吾家無寶物)/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네(寶物惟淸白).’
그는 또 87세에 자신의 거처 보백당에서 임종하면서, 자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대대로 청백한
삶을 살고 돈독
한 우애와 독실한 효심을 유지하도록 하라. 세상의 헛된 명예를 얻으려 하지 마라.”
보백당은 동농과 같은 안동김씨 가문이다. 보백당 종택에 걸린 ‘용계당(龍溪堂)’과 ‘묵은재(默隱齋)’
편액도 동농 글씨다.
이 두 편액은 원본 글씨를 가지고 근래 새로 제작한 것이다.
그는 안동의 북애(北厓) 김후 종택(풍산읍 현애리)에도 ‘매죽헌(梅竹軒)’이라는 편액 글씨를 남겼다. 동농은 또한 문경
김용사 일주문의 ‘운달산김용사(雲達山金龍寺)’ ‘홍하문(紅霞門)’ 두 편액 글씨도 남겼다. 붉은 노을을 뜻하는 ‘홍하’는
‘붉은 노을이 푸른 바다를 뚫는다(紅霞穿碧海)’에서 유래한 말로 불국토의 세계를 의미하며, 홍하문은 불국토인 부처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문이다.
김봉규기자
☞ 東農 김가진= 동농은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 가문에
태어났으나 서자였기에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적서차별이 철폐된 후인 1886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문과에 응시해 급제할 수 있었다.
그후 1887년부터 4년간 일본공사로 있으며 반청자주외교를 펼쳤고, 1894년에는 갑오경장의 주역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농상공부 대신, 중추원 참의, 충청남도
관찰사 등을 거쳤다.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동농은 1907년
11월 남궁억, 장지연, 오세창 등과 대한협회를 만들고, 이듬해
7월에는 2대 회장에 취임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실의에 빠져
칩거하던 동농은 1919년 3·1운동 발발 직후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를 맡아 활약하다 그해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게 된다. 대신을 지낸 그의 망명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에 추대되었다. 동농은 이후 만주지역 무장투쟁을 계획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77세의 나이로 상하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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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 ‘영남루’/
밀양의 영남루(보물 147호)는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영남루는
신라 때 창건된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건립되었다. 지금 누각은 1844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시원하고 자연스러운 '영남루'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1725~1799)이 64세에
썼다. 송하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한 원교 이광사(1705~1777)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서체에 능했다. 특히 획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초서 예서를 잘 썼다. 그는 벼슬을
못하다가 1766년 글씨로 벼슬길에 올라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당시 관청의 금석과 편액 글씨를 도맡아
썼다고 한다.
진주 '촉석루', 수원 화성행궁의 '신풍루' ·'봉수당' ·'낙담헌', 영주 풍기의 '금선정', 공주 마곡사의 심'검당',
김천 직지사의 '황악산 직지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시원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글씨들이다.
강원 삼척 죽서루 ‘제일계정’/
경북 안동 ‘추월한수정’과 ‘탁청정’/
경북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
경남 진주 ‘촉석루’/
전남 담양 ‘식영정’, ‘제월당’
2. 서원과 강당에 걸린
현판
- 선비의 정신을 담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
경북 예천 삼강강당 ‘백세청풍’/
경북 함안 군북면 군북리 ‘채미정’, 금산 부리면 불이리 ‘청풍서원’, 함양 정여창 고택,
경북 안동 ‘도산서원’/
경북 경주 안강 ‘옥산서원’/
경북 경주 ‘용산서원’/
경남 산청 덕천서원 ‘경의당’/
전남 장성 필암서원 ‘확연루’/
확연루’ 편액 글씨는 송시열이 썼다. 작명도 그가 했다
양송체(兩宋體)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 두 사람의 글씨체를 말한다. 이들은 율곡학파의 적통을
이었으므로 율곡을 사숙한 석봉 한호의 글씨체를 썼지만, 석봉체의 골격을 가지면서도 웅건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해 별도의 품격을 가진 서체를 만들었다.
석봉은 성리학자라기보다 서예가라고 할 수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글씨가 조선의 국서체가 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ㅡ대학자 두 사람이 새로운 글씨체를 만들자 사람들
은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우암에게 글을 받고, 동춘당에게 글씨를 받아 비석 등을 세우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
동춘당의 글씨가 송설체와 석봉체를 바탕으로 안진경체의 비후미를 더해 유려하고 활기차다면, 우암은
안진경체를 더 깊게 받아들여 웅건장중미가 더욱 돋보였다. 이때의 안진경체 수용은 조선 후기의 안진경체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경북 안동 송암구택 ‘관물당’, ‘한서재’
3. 사찰에 걸린 현판
- 절집에서 듣는 이야기
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공민왕 글씨
전북 완주 화암사 ‘극락전’/
경북 영천 은해사 ‘불광’/
▲ 추사 김정희필 <불광> 현판. 176×174cm
경남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경북 의성 고운사 ‘연수전’/
해사 김성근은 1862년 과거에 급제한 후 전라도 관찰사 공조 형조 이조 예조 판서 등을 거쳐 1894년
개화파 정권 이후 물러났다가 1898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다시 등요되었다. 1910년 일제가 자작을 수여
했다. 해사 김성근은 미남궁체(미불체)를 즐겨썼다. 그의 글씨는 매우 유려하고 웅건했으며, 특히 큰
글씨에 능햇다. 연수전 옆 건물에 걸린 '고운대암(孤雲大菴)' 편액도 그의 글씨다.
해남 대흥사의 '백설당', '응진당', '명부전', '두류산 대흥사'..
울진 불영사의 '극락전',
부산 범어사 일주문의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고양시 '흥국사',
대구 동화사 '영산전'
안동 노송정 종택 대문에 걸린 '성립문', 안동 하회마을 북촌댁의 '수신와' 등이 그의 대표적인 편액 글씨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대웅전' 편액은 의창군 글씨, 각황전 편액은 성재 이진휴가 썼다.
의창군이 쓴 대웅전 편액 글씨는 하동 쌍계사 완주 송광사 등 다른 사찰에서도 많이 번각해 사용했다.
경남 하동 쌍계사 ‘육조정상탑’/
전남 구례 천은사 ‘지리산천은사’/
경북 칠곡 송림사 ‘대웅전’/
칠곡 송림사 '데웅전' 편액은 오래 전부터 숙종의 친필로 전해져 내려온다. 불국사의 대웅전이나 속리산
법주사의 대웅보전 글씨체도 같은 바, 직접 쓴 것인지, 베껴쓴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공주 마곡사의 영산전은 세조가 썼고, 순천 선암사의 '대복전'은 수조의 친필이고, 합천 해인사의
'사방무일사' '길상' 글씨는 헌종이, 그리고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편액 글씨는 정조가 썼다. 팔공산
파계사의 '천황각' 편액도 정조 글씨다. 농암 종택에는 선조가 하사한 '적선'이라는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어 걸어놓고 있다.
전남 순천 송광사 ‘세월각’, ‘척주당’/
경기 남양주 봉선사 ‘큰법당’/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4. 더 알아보는 현판 이야기
경북 영덕 난고종택 ‘만취헌’/
物盛則必衰(물성즉필쇠) : 만물은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고,
有隆還有替(유융환유체) : 융성함이 있으면 다시 쇠퇴함이 있나니,
速成不堅牢(속성불견뢰) : 빨리 이룬 것은 견고하지 못하고,
亟走多顚?(극주다전지) : 빨리 달리면 넘어질 때가 많은 것이다.
灼灼園中花(작작원중화) : 활짝 핀 정원의 꽃은,
早發還先萎(조발환선위) : 일찍 피면 도로 먼저 시든다.
遲遲澗畔松(지지간반송) :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鬱鬱含晩翠(울울함만취) : 울창하게 늦게까지도 푸름을 머금는다.
賦命有疾徐(부명유질서) : 타고난 운명은 빠르고 더딤이 정해져 있으니
靑雲難力致(청운난력치) : 입신출세를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寄語謝諸郞(기어사제랑) : 제군들에게 일러 말하노니
躁進徒爲耳(조진도위이) : 조급히 나아감은 부질없는 짓을 뿐이니라.
- 소학
대구 달성 ‘삼가헌’/
창암 이삼만의 대표적인 편액 글씨로 ─
구례 천은사 ‘보제루’ ‘회승당’ ,, 해남 대흥사 ‘가허루’ ,, 승주 선암사 ‘임지관월’ ,,
구례 화엄사 ‘삼전’ ,, 곡성 태안사 ‘배알문’ , , 밀양 표충사 ‘법해당’ ,, 강화 전등사
‘원통각’ ,, 공주 동학사 ‘동학사’ ,, 금산 보석사 ‘대웅전’ ,, 순천 송광사 ‘육감정’ .
서울 ‘숭례문’/
경북 안동 농암종택 ‘애일당’/
경북 울진 ‘대풍헌’/
중국 자금성 ‘건극수유’
조선의 선비들 인문학을 말하다행복한미래2013.04.19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일주문
능가산 내소사 천왕문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봉명루
경기 양평 용문산 용문사 일주문 ↕
양평 용문산 용문사 관음전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일주문
전북 김제 모악산 금산사
전북 고창 도솔산 선운사
대구 팔공산 파계사 일주문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요사채
전북 정음 내장산 내장사 범종각
청도 운강고택 백류원
강화도 낙가산 보문사 일주문 ↕
경남 남해 망운산 화방사 일주문
대구 팔공산 파계사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전남 해남 두륜산 일지암
전남 해남 두륜산 일지암
전남 두륜산 대흥사
경북 문경 운달산 김룡사
영광 불갑산 불갑사
보성 송재 서재필 기념관의 외삼문 『開化門』 광개토대왕비문의 개字의 서체라고함.
광개토 대왕 비문 ####廣開土境好太王####* 광개토경호태왕
속초 설악산 신흥사 사천왕문 ↕
부여 만수산 무량사 ↕
부산 태종대 태종사
통영 미륵산 관음암 ↕
여주 봉미산 신륵사 ↕
양산 영축산 통도사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합천) ↕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 수 천겁 지나도 오히려 새롭고 .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 수 만년 지나도 언제나 당당하다
가야산 해인사 구광루측문(합천)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대적광전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법보전
가야산 해인사 대적광전 ↕ 대방광전
대적광전 금강계단
노악산 남장사 일주문(상주)
금강산 건봉사 불이문(고성)
상왕산 개심사(서산)
백양산 고불총림 백양사(장성)
재약산 표충사 대광전(밀양)
태화산 마곡사(공주)
부소산 고란사(부여)
조계산 조계총림 송광사(순천)
영축산 영축총림 통도사(양산) 국지대찰 불지종가
영축산 영축총림 통도사 ↕ 양산 示跡雙林問幾秋(시적쌍림문기추)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 지 몇 해인가 묻노니,
潽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후) 많은 군생들 예 올리기를 쉬지 않네
운제산 오어사(포항)
정족산 전등사(강화도)
삼신산 쌍계사(하동)
태백산 보덕사 (영월)
발본산 금몽암(영월) ↕ 금몽암 ▲
우화루 ▼
부산 금정산 범어사 조계문
선찰대본산 금정산 범어사 1912년인 78세에 쓰신 글 ↕
고성 연화산 옥천사 옥천각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71옹 해사
대구 팔공산 동화사
대구 무학산 학산재 1891년 海士 書
순천 조계산 선암사 삼성각
봉화 청암정 청암수석 1682년書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
전남 곡성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 ↕
곡성 동리산 태안사 ↕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 강선루
대구 팔공산 파계사 진동루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경남 양산 천성산 홍룡사
공주 태화산 마곡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
안동 천등산 봉정사
안동 천등산 봉정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순천 조계산 선암사 傳 김익겸書
영주 봉황산 부석사
부안 능가산 개암사 김석천 9세
부아 능가산 개암사 김례산 8세
익산 함라산 숭림사 일주문
정읍 내장산 내장사 정혜루 『천하명승내장산』
양산 영축산 통도사 해장보각
구미 태조산 도리사 산문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문경 운달산 김룡사
원주 치악산 구룡사
해남 두륜산 대흥사 화장법해
해남 두륜산 대흥사
순천 조게산 선암사
부산 금정산 원효암
양산 영축산 통도사 극락암
영천 팔공산 은해사
용문산 용문사
고창 선운사 백파대율사비
예산 화엄사 ↕
영천 팔공산 은해사
대구 남평문씨세거지 광거당
양산 영축산 극락암
대구 남평문씨세거지 수봉정사
[죽서루]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이 쓴 것이다.
[죽서루 현판]
죽서루에는 당대 쟁쟁한 많은 문인
학자들이 시를 남겼고
그시가 오늘날 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일부는 죽서루에 현판과 벽면에 걸려
있었다.
그 중의 몇 가지만 담아 왔습니다.
그 중 촛점이 맞지 않아 떨린 사진도 있지만, 올려봅니다.
[이규헌이 쓴 海仙遊戱之所(해선유희지소)]
[허목이 쓴 第一溪亭(제일계정)]
▲ 보광사는 영조의 효심이 절절히 배어있는 곳입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
운주사 일주문 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