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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박사와 한국상징
 
 
 
카페 게시글
태극기 스크랩 박영효 태극기 원형 공개(...최초 국기 논란...)
태극기박사 추천 0 조회 992 12.05.03 12: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태극기는 일본수신사 박영효가 일본가는 뱃길에 급조했다고 알려져 왔으나,
    1997년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게 됩니다.

    이때까지 알려진것 --
    태극기는 1882년 8월9일 박영효(朴泳孝)가 특명전권대사 겸 수신사로 일본에 갈 때, 배 위에서
    만들었고, 이를 8월14일 고베의 숙소 니시무라야에 게양한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2008년 2월 28일, 독립기념관은 박영효가 1882년 8월 9일에 그린
    최초의 태극기의 사본을 구했다고 발표하고 이를 공개합니다.



    http://media.daum.net.2008/02/28.

    위 태극기는 1882년 11월1일 당시 일본외무성 외무대보(차관) 요시다 기요나리가
    주일 영국공사인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문서에 첨부돼 있었던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영국에서 발견되었지요. 일본이 태극기를 처음 접한 것은 1882년 8월 9일의
    박영효에게서 이고, 그걸 베껴서 보관해 두었다가, 영국에 문서를 보낼때 첨부한
    거지요. 즉 이 태극기는 박영효가 그린 태극기 사본이라는 뜻입니다.

    근데, 조선일보가 이에 독립기념관을 씹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최초의 태극기? 독립기념관의 '헛발질'
    http://news.chosun.com.2008/02/29.



    내용을 보면, 이 태극기보다 4개월 전인 1882년 7월 미국 해군부의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이미 비슷한 태극기가 수록돼 있다고 합니다.
    즉 1882년 7월은, 박영효가 태극기를 그리기 1달전이란 겁니다!!

    1달전...!
    그럼 박영효가 태극기를 그리기 전부터 태극기가 있었다는 이야기 겠지요.
    그럼 미국은 이 태극기를 대체 어디서 보고 그려넣은 것일까요?
    그리고 미해군의 태극기는 왜 검곤감이괘가 좌우가 바뀌어서 그려져 있는 것일까요?

    먼저글에 링크한 조선일보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29.
    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1882년 7월 자료는 2개월 전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당시 성조기와
    함께 게양됐던 깃발로서 당연히 '국기'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 최초의 태극기? 독립기념관의 "헛발질". (조선일보.2008)

    이 태극기는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때 계양되었던 조선측 깃발을
    미국에서 모사한 것이라는 겁니다!!

    박영효가 일본수신사로 갔던것은 그해 9월!!!
    즉. 박영효가 그리기 전에 태극기가 이미 있었다는게 정설!!!

    그리고 1997년 10월9일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한 '뉴스피플' 제288호에
    실린 특종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내용이 있다.

    (원 문)「又此흘朝鮮には國旗と云べきものなきに今度支那より來りさる馬建忠が朝鮮の國旗は支那に從ひ三角形の靑地に龍を書くべし本國支那は黃色を用るども朝鮮は支那の東方に當る邦たるを以て東は靑色を貴ぶの意により靑地を用ふべしと指示したるに國王は大に之を憤み決して支那の國旗に倣ふべからぬとして四角形の玉色地に太極の圖(二つ巴繪)を靑赤にて書き旗の四隅に東西南北の易卦を附けたるを自今朝鮮の國旗と定むる旨沙汰せられたりとあり

    (번 역)「이때까지 조선에는 국기로 부를 만한 것이 없어 지난번에 탁지부를 방문한
    중국의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는 중국의 국기를 본받아 삼각형의 청색바탕에 용을
    그려야 하며, 본국인 중국은 황색을 사용하나 조선은 중국의 동방에 위치하는
    나라이므로 동쪽은 청색을 귀히 여긴다는 뜻에 따라 청색바탕을 이용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에 국왕은 분히 여겨 절대로 중국의 국기를 흉내내지 않겠다하여
    사각형의 옥색바탕에 태극원(두개의 소용돌이 문양)을 청색과 적색으로 그리고,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괘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령을 하교하였다고 한다.」- 시사신보(일본발행. 1882년 10월 2일 월요일.제179호)

    이 기사는, 일본에 온 박영효를 직접 인터뷰해서 쓴 기사이다.
    즉 박영효가 직접 말한 태극기의 유래 되시겠다.

    최초의 태극기 제작 배경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국내 문헌 중에 이 분야를 가장
    상세하게 언급한 「한국사」(진단학회. 1961)의 한 부분을 간추려서 인용해 보기로 한다.

    국 기 문제가 논의된 것은 병자수호조약(1876년) 체결 당시 강화도 회담에서부터 대두되었다.
    일본이 우리에게 문호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정박 하자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포격을 가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일본
    국기를 게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포격한데 대한 책임을 속시원하게 해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한국사. (진단학회.1961)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으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문호를 개방한 이후로 최초로
    수교하게 된 국가는 미국이었다. 즉. 조미수호조약을 앞두고 조선은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된다. 일본과의 회담에서 느낀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청나라의 ‘종주국 특사’로 파견된 마건충(馬建忠)은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며 조선측이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게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Robert Shufeldt) 제독은 이것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자신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생각, 조선 대표인 신헌(申櫶)·김홍집(金弘集)에게
    “국기를 제정해서 사용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조선의 ‘국기’가 조약 당시 성조기와 나란히
    게양됐다는 것이다.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1883년의 ‘고려국기’와 태극 모양이
    흡사하다는 점에서 태극기의 원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며 “괘의 좌·우가 바뀐 것은
    조약 당시 깃발 뒤편에서 그렸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즉, 태극기를 직접 도안하고 색깔까지 지정한 인물은 고종황제라는 것이다. 박영효는 고종의
    지시에 따라 일본으로 가면서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영효가 그리기 전 이 태극기는 고종황제에 의해 만들어져서
    조미수호조약때 사용되었던 것이다,


    <'박영효 태극기'..최초 국기 놓고 학계 논란>

     `박영효의 태극기'냐 `고려국기(高麗國旗)'냐.
    최초의 국기가 어떤 것이냐를 놓고 학계의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1883년 3월 조선의 국기로 채택된 태극기는 수신사 박영효가 1882년 9월25일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원본이 전해지지
    않아 태극기 제작 경위와 최초의 태극기 형태 등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27일 개최한 `최초의 국기 수집자료 보고회'
    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는 역사학자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제작
    국기의 원형 발견과 그 역사적 의의'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이른바 `박영효 태극기'가
    국기로서의 자격을 갖춘 최초의 태극기라고 주장했다.

    '박영효 태극기'는 박영효가 일본에 체류하던 중인 1882년 11월1일,
    당시 일본 외무성 외무대보가 주일 영국공사에게 보낸 문서에
    '한국의 국기가 될 기(a flag said to be The National Flag of Korea)'라는
    설명과 함께 그림으로 첨부돼 있다.

    한 교수는 ▲고종이 외교고문에게 하사했던 데니태극기(1890년) 등
       19세기말-20세기 초에 만들어진 태극기들과 모양이 유사한 점
    ▲일본 정부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영국에 보낸 공식 외교문서에 들어 있었다는 점
    ▲태극기 안에 가로 세로 규격이 정확하게 명기된 점
    ▲ 지금까지 태극기 원형과 가장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대청국속 고려국기'
       (大淸國屬 高麗國旗)와도 바탕색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제외하고
       똑 같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고 주장했다.

    그는 "박영효 태극기가 최초의 국기라는 점은 이처럼 명백한 만큼 최초 국기 논의를
    끝내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원형을 발견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자"고 주장했다.

    태극기 연구의 권위자인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이를 정면 반박했다.
    김 교수는 "태극기는 조.미 조약 결과 만들어진 것으로 당사국인 조선과 미국, 양국의
    교섭을 주관한 청나라가 협상의 주체였다. 일본은 객체일 뿐이다. 이에 따라 일본 측
    자료는 방증자료는 될지언정 사실을 입증할 주요 자료는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 "반면 1883년 3월에 만들어진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보낸
    외교문서에 포함돼 있었다. 조선 정부가 국기를 그려 청국에 보낸 것이다"라며
    "고려국기는 조선 정부의 문서에 명기화 돼 있지만 박영효 태극기는 일본 정부가
    영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게재돼 있다. 어느 것이 신뢰할 만한가"라고 반문했다.

    고려국기의 명칭과 `태극문양 속 동그라미'를 두고도 논란이 있었다.
    한 교수는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태극기 중 음양 속에 동그라미가 있는 것은
    고려국기 밖에 없다. 청국이 `대청국속 고려국기'라고 명칭뿐 아니라 모양마저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조선정부가 그려서
    보냈다고 외교문서 첫머리에 나오는데 그게 말이 되느냐"며 반박했다.





국기 원형인 박영효태극기 원형 공개

최초의 우리나라 국기로 지정된 박영효의 태극기가
원형이 재현돼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독립기념관 은 1882년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해
1883년 고종이 국기로 지정한 태극기의 복사본을 지난달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해 이를 재현했다고 밝혔습니다.

박영효의 태극기는 현재의 태극기처럼 흰색바탕에 4괘와 중앙에 태극을
그려 넣었으나 4괘의 색이 청색이고 태극의 굴곡이 강한 것이 다른 점입니다.

박영효의 태극기 원형이 발견됨에 따라 그동안 국기로 지정된
태극기의 원형을 두고 빚어왔던 논란이 해소될 것으로 보입니다.

☞ [사진보기] '박영효 태극기' 최초 국기 논란 가열

원문 : http://news.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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