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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변주곡 혹은 조치원역에서 별다방까지 공간의 스펙트럼
-성배순의 시세계
임 관 수
1.
연기군이 세종시가 되었다. 시골의 한 군이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행정수도가 되면서 지역의 명칭과 조직, 기능이 변화하고 급격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급격한 도시화는 개발의 폭풍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빠른 도시개발과 인구의 유입이 뒤따랐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개발은 어렸을 때 뛰놀던 들판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물고기를 잡던 작은 개울은 복개가 되어 흔적을 찾을 수 없거나 대대적인 개발로 과거의 모습을 잃음으로써 어렸을 때의 추억을 찾아볼 수 없는 고향상실의 현장이었다. 땅의 효용성이 증가하여 땅값이 오르고, 주민들은 단독주택에서 살기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주거환경이 편해지고 문명의 혜택을 받으면서 고향상실에 대한 인식은 잊혀져가고 있다.
제 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이 절망속에 빠진 독일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위해 국가적으로 대책을 세워보자고 했다. 그 때 국가 주도적이기 보다는 국민의 뜻을 바탕으로 대책을 세우고자 하여 국민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만 적어 내라고 했다. 이 때 고향이라는 단어가 선정되었다. 설문조사 전에 어머니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예측을 했었으나 고향이 어머니를 누르고 1등을 차지했다. 이처럼 고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가장 소중하다는 것은 어떠한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장선상에 성배순 시인의 “조치원 엘레지”가 존재한다. 시인의 눈에 조치원은 세종시 이전의 시간이 추억 속에 살아 있는 공간이다. 1연은 “기차가 떠나가네. / ---중략--- / 그대는 깜깜한 세상 속으로 사라지네.”로 시작된다. 젊은 날의 아름다운 사랑이 떠나가는 곳으로 조치원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랑이 떠나가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비극의 본질은 상실의 슬픔 즉 눈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것 즉, ‘우리 사랑은 참 소중했었다.’는 존재의 확인에 있다. 시인은 이 연에서 조치원 역에서 사랑이 떠나갔다는 슬픔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조치원 역은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고 이별이 있었던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추억의 공간은 저수지 한가운데 추억이 담겨 있다는 고복저수지에서는 이별의 입맞춤을 하고, 철길 옆 석탄공장을 지나며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보이고, ‘빗물이 흐르는 동시상영 왕성극장’에서는 눈물을 빗물처럼 흘린다. 이별의 점층법도 개발이 되어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거나 이미 사라져 버린 장소들로 대체함으로써 공간화 하고 있다.
그러나 조치원역의 모든 곳이 변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3연의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며 오르내리던 역전 육교 / 오늘은 혼자서 오르내리네.”에 나온 역전육교와 4연의 “네온사인 번쩍이는 조치원 역 광장에서 / 난 빙빙 돌며 북극성을 찾아보네” 에 나오는 조치원역 광장은 비교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서 빙빙 돌며 북극성을 찾는 것은 변화하지 않은 고향, 그렇기 때문에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고향에 대한 애착감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을 회상할 수 없는 곳은 이미 고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산업화와 더불어 아파트와 공장 등이 들어서서 어렸을 때의 추억을 회상할 수 없는 곳은 장소는 변함이 없더라도 더 이상 고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현대인은 누구나 일종의 고향상실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행정수도라는 국가적 시책에 따라 8만 오천여명의 인구가 5-6년 만에 30여만 명이 되는 사상 유래없이 빠른 변화를 겪고 있는 세종시의 시인 성배순이 이처럼 고향상실에 대한 슬픔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그리며 북극성처럼 찾아가는 곳은 바로 어렸을 때의 추억이 담긴 마음의 고향일 것이다. 이러한 고향에 대한 탐색은 시간적인 탐색으로 이어진다.
2
성배순 시인이 고향을 찾고자 한 탐색의 시간과 장소에 “개와 늑대의 시간”과 “박태기”가 존재한다.
프랑스어에서 유래가 된 ‘개와 늑대의 시간’은 서서히 땅거미가 질 때 언덕 위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오는 동물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아니면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혹은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섬뜩하게 느껴지는 낯설은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아를 분별할 수 없는 시간인 것이다. 인간은 세상을 살다보면 알 수 없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성배순 시인의 개와 늑대의 시간은 문명과 야성의 갈등 속에서 겪는 갈등을 담고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는 “프로메테우스 그 자가 왜 털없는 원숭이에게만 / 부싯돌 속에 불을 숨겨주었는 지 / 그것이 오랜 의문이라는 듯”으로 시작된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 하나는 불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불은 그리스 신화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하여 신들 몰래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개는 프로메테우스가 왜 인간에게만 불을 가져다주었는 지에 대한 원망을 통해 우회적으로 프로메테우스의 덕에 불을 사용하는 인간에 대해 동경을 하고 있다. 인간은 프로메테우스가 준 불을 이용하며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리고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졌다. 화자인 개가 불을 사용하는 인간에 대해 동경하는 것은 현대문명과 성숙에 대한 시인의 동경을 담고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담배를 피우는 행위로 나타난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느낄 때 불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담배를 피우는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이 성숙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계속 담배를 피우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가지면 이러한 담배가 몸을 해치는줄 알면서도 심리적인 갈증 때문에 담배를 끊지 못하고 결국 건강을 잃게 된다.
그러나 개에게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인간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사슴을 쫒던 그 때, 동굴 속에서 슬금슬금 기어나오던 / 달큰한 익힌 고기의 냄새를 맡지만 않았어도, / 쓰레기 더미에서 뼈다귀에 붙은 / 고기 조각을 핥지만 않았어도 / 사람들 우리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듯 ”에서는 익힌 고기 냄새와 노력하지 않고 얻는 뼈에 붙은 고기 조각에 대한 탐닉으로 나타난다.
“어둑어둑 저녁이 물드는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는 시점이 개의 시점으로 바뀌어 인간을 친구로 보아야 할지 말지 갈등을 일으키는 시간이다. 동시에 인간세상 즉 현대문명에 대해 순응을 해야할 지 아니면 야성 즉 문명화에 대한 비판을 해야할 지 갈등을 느끼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우리 속에 갇힌 유기견을 보는 순간에 결정이 된다. 근질거리는 송곳니로 쇠창살을 끊어야 하듯이 나도 현실을 벗어나야 한다. 이러한 자각의 순간에 “나도 갑자기 겨드랑이가 근질거린다” 겨드랑이가 근질거린다는 말은 이상의 ‘날개’에서 우리에게 친숙해진 부분이다. 겨드랑이가 가렵다는 것은 날개가 나오려는 순간임을 의미한다. 이제 결론은 이상처럼 예전에는 있던 이 날개를 돌아보며, “날자 날자꾸나”하면서 현실을 극복하고 탈출하는 것이다. 이제 동굴 속에서 나오는 익은 고기 냄새에 속아넘어가지 않고 들판의 사슴을 쫒듯이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버리고 고향을 찾는 여정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성배순시인은 세종시의 도시화와 이에 따른 여러 가지 편리함과 경제적 이익들을 찾을 수 있으나 이것들은 결국 인간의 비인간화라는 결과 즉 우리에 갇힌 유기견같은 입장으로 전락할 것을 확신하고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고향에 대한 동경으로 방향을 설정한다. 익힌 고기 냄새나 뼈에 붙은 고기 조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은 유기견의 우리와 같은 곳으로 이끌고 가게 되는 것이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우리에게 소중한 고향과 같인 인간적인 것들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다.
‘박태기’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갈등을 겪고 마음의 결정을 한 뒤에 세계관과 인생관을 다루고 있다.
박태기는 밥풀떼기 같이 생겼다고 해서 박태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것은 서민들의 보상심리가 담겨 있는 것 같다. 밥 구경을 하기 힘든데 그 꽃이라도 보면 밥을 본 듯 반갑다는 생각에 박태기 꽃이라고 이름 붙이고 원예용으로 심고 즐긴 듯하다. 그러나 이 꽃은 독이 있어서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서양에서는 박태기 꽃나무를 유다의 나무라고 부른다.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목을 매달았는데 그 나무가 박태기 나무였다. 그후 그 나무에서는 유다의 핏방울처럼 붉은 꽃들이 방울방울진 것처럼 피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박태기 꽃 나무는 작고 가는 가지를 가지고 있지만 서양에서는 사람이 목을 매달 정도로 큰 나무라고 한다.
성배순의 ‘박태기’에는 이 두 이미지가 어우러져서 나타난다.
우리 민족은 알타이 어족으로 우랄알타이 산맥 근처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일부는 동쪽으로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을 했다. 시기는 아마 기원 전 2000년쯤으로 추정된다. 그 중 동쪽으로 온 민족이 우리이고 서쪽으로 간 민족이 터키족이다. 따라서 이들은 옛날에 같은 말을 썼을 것이다. 터키에 있는 세례 요한의 무덤 앞에 있던 묘비에 요한의 묏자리(Metzary of Johan)라고 쓴 것이 인상깊었다. 이동할 때 높은 산 꼭대기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고 이 때 남자무당과 여자무당이 제사를 주재했다. 박, 혹은 복이 여자무당이고 달이 남자무당이었다. 이 복과 달이 제사를 지내던 높은 산을 박달재라고 불렀다. 이런 점에서 박수무당 이야기를 다룬 ‘박태기’는 고향을 찾으려는 성배순 시인이 시간여행을 통해 도달한 출발점이었다.
박수무당은 현대문명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삶을 사는 인물이다. 그가 “씰룩쌜룩 입술을 움직이며 날라리를 불 때는 / 온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말이여 / 바람도 갈 길을 못가고 주변 풀들을 흔든단 말이지 / 나뭇가지들도 못 견디고 여기저기서 팡팡 꽃을 터트린단 얘기는 / 두 말하면 잔소리지 뭐겠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포에지(詩心)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박수무당의 날라리 소리에 바람도 머물고, 나뭇가지도 꽃을 피우는 세상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인 세계이며, 더 나아가 우주와 인간이 하나인 신화 속의 시대이다.
이 시에서는 “죽어서야 비로소 피우는 환장할 그 진보랏빛 꽃”의 이미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고 죄책감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던 나무에서 피어나는 피처럼 붉은 꽃의 이미지가 삶의 절정인 죽음의 이미지로 승화된다. 박태기 꽃의 부수적인 이미지로 활용된 입에 밥풀떼기 묻힐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박수무당“, ”작두“, ”신명나는 춤판“, ”봄이 한창“ 등을 통해 삶의 절정 그 자체의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며 서로의 이미지를 상보적으로 강화시켜준다. 그러나 치열한 삶은 하나의 과정으로 완성을 이룩할 수는 없다. 박태기 신화의 세계에서 처럼 “죽어서야 비로소 피우는 환장할 그 진보랏빛 꽃”으로 피어나듯이 삶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성이 된다.
성배순 시인은 “박태기”에서 현대문명을 초월해서 마음의 고향을 탐색한 결과 나타난 인간과 우주가 합일의 상태인 신화적인 세계에 도달하였다.
3
그러나 자연과학의 발달로 신화의 세계관이 무너졌듯이 세계화 시대에 고향에만 머물러서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은 보다 많은 보수를 주는 곳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따라서 지역별, 나라간 임금의 격차도 점차 줄어들게 될 것이다. 최저임금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에게도 적용이 되고 있으며, 개성공단까지 적용해야 하므로 세계화가 임금의 평등화라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종시에는 세종시 출범 당시보다 세배 정도 인구가 늘었으며, 인구증가의 속도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바람의 노래”와 “도꼬마리”는 고향을 떠난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바람의 노래”는 “박태기”에서 다룬 신화의 세계에 대한 변주곡이다.
바람은 지나가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들이 한 장소에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확보하는 반면에 바람은 한 장소에 존재하면 존재성을 상실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람의 노래”는 ‘한 때 신의 명부에 올랐지 / 인간들이 내가 있는 방향에다 손을 모았지’로 시작한다. 바람이 신의 반열에 오른 것은 단군이 풍백, 운사, 우사와 함께 이 땅에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농경시대 비와 구름, 바람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적벽대전, 일본을 도와 몽고족을 물리친 신풍 등 “부풀려진 기록”이라는 역사도 있었다. 바람은 하나의 자연 현상으로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 수 없었을 때에 자연현상 모든 것은 신의 뜻으로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비와 구름, 바람, 천둥과 번개들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자연현상은 더 이상 신의 뜻이 아니었고, 바람은 신과는 관련이 없는 영역으로 세속화 되었다. 바람의 세속화는 “어제는 연인들 사이를 오가며 한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기도 하고”에서 잘 드러난다. 바람이 신성을 잃자 바람은 바람을 피우는 이 연인들 사이를 설명하는 말이나 단지 깃발을 흔드는 바람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바람은 흐르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는 고향이라는 이상향에 다양성이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바람의 결과 “도꼬마리”가 있다.
“아주 오래 전 북 아메리카 과타말라에서 왔지요 / 이래봬도 초롱꽃목 국화과랍니다 / ---중략--- 내가 부르는 노래를 마을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고 / 내가 입는 옷 문양과 다른 무늬 옷을 입고 있는 그곳에서 / 언제나 난 이방인이었답니다 / 바람은 눈 앞의 호수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며 / 내 뿌리를 흔들었지요 ”
어렸을 때 풀밭을 뛰어놀다보면 바짓가랭이 여기저기에 달라붙어 있는 풀 열매가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꼬마리라고 불렀다. 그동안 나는 이것이 외래종 식물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 시를 읽고서야 외래종이라는 사실을 알고 옛 선인이 시인은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는 말을 되새겨보았다.
문명의 발달은 교통의 발달을 가져오고 교통의 발달은 무역의 발달로 이어지며 동식물과 인간의 교류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다문화 국가도 많아지고 외래종 식물들도 많이 유입되었다.
사실 주변을 돌아보면 호랑이 담배 피울 때 이야기에 나오는 담배나 한국인의 심성이 매운 고추를 먹어서 호락호락하지가 않다는 매운 고추도 임진왜란 이후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식물들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사는 것도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세상이다. 이러한 사실은 대유법으로 지금까지 세종시에 이주한 20여만명의 주민들과 앞으로 유입될 30여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유입되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상실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상호교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날로 태평양을 건넜답니다 / 실은 엄마의 엄마의 이야기인데 외래종이라는 수군거림은 / 아띠뜰란의 커피 맛과 닮았네요 / 내게 살짝 눌어붙어서 지금도 떨어지지 않으니 말이예요”에서 시사해주는 것처럼 이주한 사람들도 여전히 마음의 고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이 지역에 살게 됐으니 이 지역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향에서처럼 문화와 전통을 유지하면서 고향사람들을 만나며, 도꼬마리가 커피향을 품고 있듯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는 세종시에 새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하나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며, 환영하면서 그들의 지역성들을 유지해주려는 배려를 담고 있다.
4
“고운뜰 공원에서”와 “안녕, 별다방 아가씨”는 현대문명의 부정적인 단편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고운뜰 공원에서”는 1연 앞부분에서 “가락마을 17단지 앞에서 / 푸른 신호등을 기다린다.”로 시작한다. 가락마을 17단지는 그동안에 1-16단지까지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숫자로 표기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것은 어느 지역의 개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인류발전의 역사발전의 방향을 개성과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의 역사로 본다면 가락마을 17단지는 인류발전의 역사에 반하는 현장임을 시사해준다. 그러나 1연 후반부에서는 “가로수 가지에 걸린 가오리연 / 꼬리 흔들수록 나뭇가지는 / 연꼬리 움켜잡는다”로 문명의 모습이 없이 자연과 연을 날리는 동심의 잔상을 담고 있다. 연이 전봇대에 걸리거나 아파트 베란다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에 걸린 것이 정겹다. 1연은 전반부의 개발에 대한 부정적 측면과 후반부의 긍정적인 측면이 대조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2연에서는 “개울물소리 크게 들리는 저녁 / 꽃 창포 사이로 돌 오리 한 마리 / 무거운 날개 필사적으로 펼치고 있다”에서 서정적인 개울물 소리와 기계문명의 흔적인 돌 오리가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2연 후반부에서는 “실란이 날개를 움츠리고 하얗게 지새는 밤 /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 인공폭포위에선 늙지 않는 가수 / K씨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는데 / 흠흠”으로 끝을 맺는다. 실란을 보며 내 그림자도 보면서 무드에 젖으려 하는데 인공폭포와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늙지 않는 가수가 나타나서 분위기를 망치고 있다. 돌로 만든 오리와 콘크리트로 만든 인공 폭포와 가수의 조각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죽어있다는 의미이다.
“고운뜰공원에서”는 대유법으로 세종시에서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정서적인 경관의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만든 인위적인 조경물들이 역설적으로 서정성을 상실하게 하고 있음을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의 “흠 흠”이 성배순 시인이 바라본 냉소적인 판단유보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고향상실을 느끼고 고향이란 무엇일까를 추구하던 시인이 현실로 돌아와 이곳에서 과연 고향의 정을 느끼고 살 수 있을까에 하는 것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손주가 인공폭포에 들어가서 넘어지거나 하는 등의 추억이 쌓이면 이 또한 고향이 될 수 있지 않을까를 기대해본다.
현대문명은 자연환경 그 자체 보다 인간의 비인간화를 가져온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안녕, 별다방 아가씨” 는 별나라에서 온 이방인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별다방 처자”이다. 유리창 안에서 밖에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처자는 微國에서 왔다. 微國은 아마도 웃음을 가볍게 웃어대는 것을 주로 하는 여성인 것 같다. 웃음을 파는 여성 정도를 微國에서 온 처자로 보는 것은 이 시에서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별다방 앞에 줄을 서는 우리들의 사내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라고 한다. 그중에 사랑은 문명사회의 비인간화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사랑 앞에서 돈과 명예 등 세속적인 모든 것들은 사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안녕. 별다방 아가씨”는 돈 때문에 웃음을 팔고, 자신의 가치를 보이고자 유리창 앞에서 양손을 높이 올리는 등 과시적인 행동을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별다방에서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별다방 아가씨는 “반짝 빛나는 파편에 피 흘리는 줄 모르고” “파다다닥 유리바다 친다” 결국은 비극적인 삶이 예약되어 있는 별다방 처자도 현대문명이 빚어낸 한 단상이다. 세종시도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이러한 어두운 측면도 나타날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이 웃음을 파는 행위로 나타난 인간의 비인간화의 상징인 “안녕, 별다방 아가씨”.에 나타난 별다방이라는 공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의 입맞춤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조치원 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던 진정한 인간관계의 현장인 “조치원 엘레지”의 배경인 조치원역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5
성배순 시인은 이 지역 시인으로 “세종호수공원”이라는 동화책을 쓰는 등 세종시에 살면서 세종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 전제로 성배순 시인의 시를 고향인 세종시에 대한 천착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보았다.
그 결과 사랑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조치원역과 고복저수지, 철길 옆 석탄 공장 등을 소재로 고향의 이미지를 담은 “조치원 엘레지”의 조치원역을 시인의 상징적인 고향으로 자리매김을 해보았다.
“박태기”는 고향을 찾아 시간여행을 하며 신화시대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제시한 작품이다. 인간과 박태기 꽃이 교감을 하면서 꽃을 피우고 바람도 갈 길을 못가는 물아일체이며 인간과 우주가 하나가 되는 원초적인 인간성이 살아있는 세계였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급격하게 이루어지는 세종시의 발전이 삶의 편리성과 풍요를 가져온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 인간의 비인간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개를 화자로 원초적인 갈등을 겪다가 현대화와 도시화 속의 인간을 우리 속의 유기견으로 공간화 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함으로써 인간성을 회복하는 고향에 애정을 가지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바람의 노래”에서는 현대인들이 고향을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움을 인식한다. 중앙 아메리카에서 한국에 들어와 토착화한 식물 “도꼬마리”를 통해 세종시에 이주하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이 지역 사회에 동화하기보다 자신의 고향 색을 지니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제시해주고 있다.
성배순 시인에게 과거는 인간성이 남아있는 곳이며, 개발이 이루어지고 현대화된 곳은 인간의 비인간화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박태기”로 신화시대에까지 시간여행을 하고, “도꼬마리”로 중앙아메리카까지 공간여행을 마친 후 돌아온 곳은 다시 현재, 여기인 “고은뜰 공원”이다. 이곳은 인간의 비인간화가 진행되는 도시 공간이다. 그리고 인위적인 조형물들로 채워진 비인간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비인간화 된 공간의 한쪽 끝에 별다방이 존재한다. 자신의 미소와 과시를 통해 남자들을 유혹하는 인간의 비인간화 현장에 아름다운 별을 이름으로 가져다 붙인 것은 냉소적이다. 아름다운 별의 이름을 붙였지만 비인간적이고 별스러운 장소에 불과하다는 중의법적 조롱을 담고 있다.
이번에 발표한 성배순의 시세계는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세종시에 살면서 고향의 향수를 담고 있는 장소로서의 상징성을 지닌 조치원역과 도시화에 따른 인간의 비인간화가 극에 달한 별다방이라는 상징 공간 사이에 박태기와 도꼬마리, 고운뜰 공원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사이에 극적인 긴장을 주는 개와 늑대의 시간과 도꼬마리를 한국에 불러온 “바람의 노래”의 바람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