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모든 교훈의 완성과 실상인 사랑
(찬송 216장)
2023-3-13, 월
맥락과 의미
13장은 성도들의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예배 가운데 성령님의 은사를 사용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말합니다.
12:1은 “신령한 것에 대하여”로 시작하고 14:1도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라고 합니다. 12-14장은 “신령한 것”, 곧 성령님이 주신 은사에 대해 가르칩니다. 12장과 14장은 예언(말씀)과 방언(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중간에 있는 13장도 예언, 방언, 지식 등을 가르칩니다.
12장은 은사들을 소개합니다. 13장은 그 은사들을 사랑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르칩니다. 14장은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1. 사랑이 없으면: 은사들을 시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1-3절)
2. 사랑이 있으면 어떻게?(4-7절)
3. 지식과 방언의 은사들은 그리스도 재림 후 사랑으로 완성됨(8-13절)
1. 사랑이 없으면: 은사들을 시행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님(1-3절)
12:31에서 말한 “더욱 큰 은사”는 14장에서 말하는 예언입니다. 12:31에서 말한 (은사로 섬기는) 제일 좋은 길, 사랑을 13장에서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사랑을 말합니다. 감정을 포함하지만 오히려 의지와 행동입니다. 또 이 사랑은 개인 사이의 사랑도 포함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1절, 당시 “방언”은 외국어로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언어가 다양한 온 세상의 민족을 위한 것임을 나타내는 표적이 방언입니다.
사도 시대 이후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계속 그런 방언을 구하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외국어로 방언하는 것보다 우리 말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을 기뻐합시다.
2절, 예언을 하고 신비한 것을 보고, 신령한 지식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전할 때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다른 성도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3절,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교회와 예배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를 경제적으로 돕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2. 사랑이 있으면 어떻게?(4-7절)
1) 사랑은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오래 참습니다(4절). 그리고 온유합니다(친절합니다).
예수님만이 온유한 분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8,29).
예수님을 믿고 나올 때, 예수님의 온유함과 친절함을 우리도 받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질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2) 사랑은 다음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습니다(4절).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에서 자신을 보고, 다른 성도의 유익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이 되면 가르치고 구제해도 다른 지체들에게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자입니다. 자기 자랑과 교만이 가득하고 무례한 자들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자기 중심성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5절,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무례히 행한다”는 ‘부분들이 균형이 맞지 않아 아름답지 못하고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성도들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를 사용할 때 그리고 삶 속에서 교회 공동체와 성도의 아름다움과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볼 때, 좋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아야 합니다. 자기가 손해 보더라도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도 지체의 유익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5-6절, 사랑은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기뻐하지 않는 것은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성도에게 불의한 일을 하여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3) 사랑은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6절 후반부에서 다시 말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개인적으로 진리를 기뻐할 뿐 아니라, 모든 성도가 진리 안에서 성장하도록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합니다(엡 4:15).
진리를 위해 살 때,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7절의 처음과 끝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합니다. 가운데에는 “모든 것을 믿고 바란다”가 있습니다. 즉 믿음과 소망입니다.
믿음과 소망은 인내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힘들어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소망하며 참을 수 있습니다.
4절에서도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인내하는 사랑을 세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도 성도를 향하여 오래 참고, 부모들도 인내하며 자녀를 가르치도록 기도합시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5절)는 10:33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와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7절)도 사도 자신이 사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 9:12과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사도는 고린도 성도들의 영적 부족함을 알기에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생활비 받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도 자신이 경제적 어려움을 참으며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이제 고린도 성도들도 은사를 사용할 때, 사도가 보여준 사랑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3. 지식과 방언의 은사들은 그리스도 재림 후 사랑으로 완성됨(8-13절)
1-7절의 결론으로 7절에서 사랑은 믿음과 소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8-13절의 결론으로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은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8-13절은 지금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도 어린아이와 같고 불완전하지만 그때(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온전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며 온전히, 전체적으로 알 것입니다. 그때에는 부분적으로 아는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즉 방언, 예언 등 “은혜의 수단”이 필요 없이 삼위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가 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되는 지식, 곧 우리가 아는 것은 지금은 부분적입니다. 다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12절). 2천년 전의 거울은 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에 희미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신 후에 주님을 직접 보면서 알게 될 것에 비해 지금의 지식은 아주 희미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지식은 아닙니다. 부족해서 더 온전한 것으로 완성될 것을 기다리지만, 그 신앙 지식과 믿음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때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절). 문자적으로는 ‘내가 알아봐 진 것 같이, 나도 알아볼 것이다’는 뜻입니다. 이미 주님은 나를 완전히 알고 계시지만, 나는 지금은 부분적으로 주님을 압니다. 그러나 그날 이후에는 주님이 나를 아는 그런 분명한 앎으로 나도 주님을 알 것입니다.
이 앎은 “사랑”입니다. 부부가 깊은 사랑을 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과 우리는 온전한 지식 가운데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사랑할 그때에는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후 1:14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날에는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될 것”입니다. 성도의 참된 앎과 사랑이 완성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서로를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주께서 온전하게 해주실 것을 기대하며, 그때를 기다리며 오래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해서 말씀의 원리대로 사랑합시다.
13장은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끝 부분에서는 주님을 아는 사랑으로 마무리됩니다. 성도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복종할 일
교회 안에서, 나아가 가정에서 서로 사랑합시다. 성도 간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사랑이 부족한 우리가 사랑으로 교회를 세우도록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 사랑과 성도 사랑을 이루기 위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러 은사, 특히 말씀과 기도, 예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배와 성경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배우고 성도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시다.
하나님이 주신 여러 은사를 사랑으로 실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성도의 잘못을 사랑으로 인내하며 교정해 줍시다. 당장 변하지 않더라도 화내지 맙시다. 오래 참고 가르쳐줍시다.
자녀를 향하여 오래 참고 가르치며 변화의 날을 기다립시다. 직장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초월적인 사랑으로 인내의 모범을 보입시다. 그래서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습니까? 내가 가진 은사로 교회와 성도들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가정과 교회와 직장에서 사랑으로 섬기게 해 주시길 기도합시다.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1절)
1-3절에서 “…할/있을지라도”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정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라는 뜻입니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몸을 불사르게 (하는 목적으로) 내줄지라도”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그런 목적으로 행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분신하듯이 성도가 자기 몸을 불사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이 표현이, “천사의 방언”을 실제로 사람이 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사람의 말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의 말로 찬양과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천사의 말로 사람에게 계시하거나 기도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말을 하면서 천사의 말을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 시대에 바알 선지자들이 주문을 외웠듯이 그렇게 하나님께 말하면서(왕상 18:29) “나는 천사의 방언을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 이방인처럼 중언 부언하지 말라”(마 6:7)고 하셨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말하면 심리적으로 마음이 시원해질 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지성과 마음으로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도록 하신 하나님께 사람의 말로 기도하고 찬송하는 일에 힘씁시다.
<참고> 5절,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한다”(아스케모스)는 ‘부분들이 균형이 맞지 않아 아름답지 못하고 모양새가 좋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일상과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의 아름답지 못함과 부족함을 채우라는 앞쪽의 교훈을 종합하는 말입니다.
7:36의 “합당하지 못한 줄”과 같은 단어입니다(7:35, “이치에 합당하게”와 대조). 약혼녀가 나이가 점점 많아지거나 해서 모양새가 좋지 못한 경우에는 남자는 파혼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혼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합니다. 부족하더라도 약혼자를 사랑하고 부족한 지체를 덮어주라는 것입니다.
12:23에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중에 연약함이 있는 지체, 죄가 있는 지체를 덮어주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14:40에서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예언과 방언) 은사를 사용할 때 “품위 있게”, 즉 ‘아름답게’ 하라고 합니다.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방언, 예언, 설교, 기도 등 은사를 사용할 때 성도를 영적으로 아름답게 세워가기 위한 목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결혼이나 교제할 때뿐 아니라 말씀을 사용할 때에도 사랑으로 서로를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참고> 7절, “모든 것을 참으며”(판타 스테게이)=9:12
“모든 것을 참으며”(판타 스테게이, 7절)는 사도 자신이 사례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한 9:12과 정확히 같은 표현입니다. 사도가 모범을 보인 그 인내의 사랑을 고린도 교인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