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드문 절터엔 가끔 답사객만이 삼층석탑의 외로움을 달래준다. 전남 강진군 성전면의 보물 제298호 삼층석탑 뒤로 월출산의 울퉁불퉁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한번 보자.
흔히 호랑이가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이라는데 이처럼 구체적인 모양을 유추해 내기보다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바라보면 아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게 기울여진 모양새다. 조금 딱딱하게 말한다면 지리적으로 서쪽이 동쪽보다 위도가 훨씬 낮다는 것이다. 이를 기후와 연관해서 달리 말하면 다른 곳보다 봄이 먼저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에둘러 어렵게 말하지 않더라도 '남도'라 말하는 전남 지역은 같은 남쪽인 부산과 경남보다 봄이 빠르다. 딱히 꽃이 먼저 피고 따스한 바람이 먼저 불어오지 않더라도 마음속에서 봄은 남도에 먼저 온다. 상록 활엽수로 사철 녹색의 잎을 달고 있으면서 겨울이 가기 전에 꽃을 틔우는 동백나무도 남도에서 더 화려한 꽃을 앞서 피운다. 제주도와 경남의 거제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에도 군락이 있지만, 전남의 강진과 해남, 완도, 여수에는 지천으로 동백나무가 넘쳐난다.
강진 백련사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백련 결사의 맑은 정신뿐만 아니라 절을 둘러싼 동백나무 숲이기도 하다. 백련사 동백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를 끼고 있어 문화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경상도처럼 무게 잡지 않는 친근함이 느껴진다. 같은 양반문화의 자취를 보더라도 엄숙하고 반듯함이 떠오르는 서원보다는 풍류와 여유가 넘치는 정자를 더 쉽게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남도는 아름다운 자연뿐 아니라 우리 역사와 문화의 자취도 가득하다. 우리나라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마는, 월출산 자락의 영암군과 그 남쪽 강진군 일대는 독특한 역사의 흔적과 걸출한 인물들의 자취가 듬뿍 묻어나는 곳이다. 삼국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름 없는 도공의 도기에서 탁월한 장인의 석탑과 조선 문인의 정원까지 한 굽이 돌면 옛 절이요, 저 모퉁이를 돌면 기념관과 유적이다.
그 가운데서도 영암 일대는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백제 왕인 박사의 탄생지로, 또 신라 말의 승려로 풍수설의 대가인 도선국사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이뿐만 아니다. 도선이 태어난 곳으로 기록된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약을 바른 도기를 생산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들어선 영암도기박물관에서는 지역에서 발굴된 도기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 도예작가들이 만든 생활도기와 작품들도 만나볼 수 있다.
잠깐 방향을 틀어 월출산 남쪽으로 가서 강진 땅으로 들어서면 금릉경포대 근처에 고려 시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월남사 터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월출산은 보름달이 뜬 날 영암읍에서 바라보는 모습만큼이나 빼어난 경관을 보여준다. 보름달이야 한 달에 한 번꼴이니 사실상 월남사지의 월출산 조망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월남사지에서 멀지 않은 언덕배기엔 태평양에서 운영하는 20만 평의 영암다원이 월출산을 배경으로 이국적인 풍광을 보여준다.
강진은 북으로는 월출산에 머리를 대고 남쪽으로는 남해에 발을 담그고 있다. 강진의 남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중턱에 신라 말 창건한 백련사가 자리 잡고 있다. 백련사는 고려 말 원묘국사가 백련 결사를 일으킨 곳으로, 또 보호림인 동백나무 숲으로 많은 이의 발걸음을 이끄는 곳이다. 명찰 백련사 마당에서 바라보는 동백나무의 눈부신 잎들과 싸늘한 가운데 따스함이 담겨 있는 바람은 잠시 시간을 잊게 한다.
가만있어도 봄은 집안으로 찾아오지만 남보다 한 발 먼저 봄을 느끼고 싶다면, 더불어 문화와 역사 속으로 한 발짝 들어가 보고 싶다면 한반도의 남서쪽 끝자락으로 떠나볼 일이다.
월출산은 너른 평야에 불현듯 솟아오른 화강암 산이다. 옛날부터 그 독특하고도 빼어난 산세로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린 월출산 자락은 서남해로 툭 튀어나온 지형적 특징으로 외부 문화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게다가 온화한 기후로 차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이 같은 조건으로 유적지와 고찰 등 볼거리 많은 전남에서도 영암과 강진은 그 '밀도'가 높은 곳이다. 달리 말하면 그리 멀리 움직이지 않아도 한곳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유적 답사 단체로 400회 이상의 답사를 다닌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과 동행해 봄기운 물씬한 월출산 자락의 영암군과 강진군을 다녀왔다.
◇ 영암 왕인과 도선 유적
- 왕인박사·도선국사 고찰 등 산재 - 국내 최초 유약도기 생산지의 '멋'
영암 도갑사 대웅전 앞에 보물 제1433호인 오층석탑이 방문객을 맞는다. 풍수의 대가인 도선이 창건한 절인 만큼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영암군에는 군서면 구림마을을 중심으로 왕인 박사와 도선국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산재한다. 여기에 고찰 도갑사도 가까이 있다. 이 가운데 군서면 동구림리 왕인 박사 유적지를 먼저 찾았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는 곳은 전시관인 영월관이다. 1층 전시실을 들어서니 5세기를 전후한 백제인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눈에 들어온다. 또 왕인 박사의 일본행과 관련해 영암 지역의 고대문화 교류사와 무역 활동도 잘 보여준다. 왕인 박사는 5세기 초 일본 오진천황의 초대를 받아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지니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사란 칭호는 경서(經書)에 통달한 이를 부르는 말이었다. 그는 경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오진천황의 신임을 받아 태자의 스승이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왕인 박사의 존재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역사적 기록은 조선 시대로 들어서야 남아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그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전시관 앞의 독특한 기념비는 2008년 한·중·일 3개국의 명사 1000명으로부터 한 글자씩을 받아 만든 천인천자문이다. 앞의 오른쪽부터 시작하는 천자문을 훑어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땅 지(地)자가 두 번째에 있다. 첫 글자인 하늘 천(天) 자는 현직에 있는 김일태 영암군수가 쓴 것으로 한때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영암도기박물관 1층 전시실의 옹관.
왕인 박사 유적지를 떠나 구림마을 중심지로 가면 폐쇄된 분교 자리에 지은 영암도기박물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박물관 1층엔 영암 일대에서 발굴된 각종 도기와 옹관이 전시돼 있다. 구림마을은 우리나라 최초로 유약을 바른 도기를 생산한 곳으로 구림도기요지는 사적 제338호로 지정돼 있다. 도기편 등을 둘러보고 2층으로 올라가니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2층 전시실엔 한국과 일본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어 고대와 현대의 예술이 서로 만나고 있다. 전시실을 둘러본 뒤에 1층 기념품 판매장에서는 지역 작가들이 만든 도기들을 그리 비싸지 않은 값에 살 수 있다. 박물관 마당 끝으로 가면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나는 배를 탔던 상대포 포구가 있다.
구림마을을 떠나 월출산 자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월출산 산행의 출발점이자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도갑사다. 도갑사는 오랜 역사만큼 다수의 국보와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절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지나는 해탈문은 국보 제50호로, 해탈문 안의 목조문수·보현동자상은 보물 제1134호, 미륵전의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89호, 대웅전 앞 오층석탑은 보물 제1433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적만 둘러봐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 강진 월남사지와 백운동원림
- 웅대한 월출산 암봉 능선에 안긴 월남사지·월남사·66만㎡ 차밭
월출산을 배경으로 드넓은 영암다원 차밭이 펼쳐져 있다. 영암과 강진은 제주와 보성과 더불어 아름다운 녹차밭 풍광을 맘껏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영암 구림마을에서 방향을 남동쪽으로 틀어 2번 국도와 13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금릉경포대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길가 나무 뒤에 월남사지가 숨어 있다. 월남사지는 월출산을 배경으로 해 산자락에서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 웅대한 암봉으로 이뤄진 월출산 능선이 적당한 거리에서 배경이 돼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 삼층석탑이 더욱 두드러진다. 석탑엔 석공과 그의 아내에 얽힌 사무치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가 귀를 기울이게 한다.
진각국사비와 삼층석탑 사이의 너른 터는 발굴 작업이 진행 중으로 넓은 면적이 파란 비닐로 덮여 있었다. 고려 시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월남사 터에 대한 발굴 작업으로 역사책을 다시 써야 할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12월 문화재청의 발표에 따르면 발굴조사 결과 월남사지는 애초 알려진 것처럼 고려 시대 창건한 절이 아니라 전남 최초로 백제 때 창건한 절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청자 조각과 같은 고려 시대 유물도 발굴됐지만 백제 기와들이 출토돼 창건 시기를 한참이나 앞당기게 됐다. 삼층석탑 뒤에 근래에 지은 월남사가 있지만 다른 절처럼 번잡스럽지 않아 여유롭게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 13수의 시로 아름다움을 노래한 백운동원림.
월남사지에서 도로를 벗어나 샛길로 올라가면 드넓은 녹차 밭이 월출산을 배경으로 해서 시야를 가득 채운다. 완만한 사면을 따라 조성된 차밭은 66만 ㎡(20만 평)나 되는 면적으로 아모레 퍼시픽이 운영하는 곳이다. 녹색의 차나무와 배경의 하얀 월출산 암봉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차밭 아래쪽엔 백운동원림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호젓한 숲길을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맑은 계류가 흐르고 그 한쪽에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물가의 너른 바위에는 '백운동(白雲洞)'이란 한자가 음각돼 있다. 17세기에 원림을 조성한 백운처사 이담로의 글씨로 전한다.
◇ 강진 백련사와 다산초당
- 바다 보며 자리잡은 백련사·해월루 - 동백숲 거닐었을 정약용 발자취
강진 백련사의 동백나무 보호림엔 수백 년 묵은 17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동백꽃이 만개하려면 아직 한두 주 더 기다려야 한다(위 사진).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한 다산초당.
백운동원림을 둘러본 뒤에는 발길을 남쪽으로 돌린다. 13번 국도와 2번 국도를 번갈아 타고 강진읍을 거쳐 만덕산 자락으로 향한다. 중턱 가까이 올라간 곳에 신라 말 창건한 백련사가 강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자리 잡고 있다. 백련사는 고려 후기 원묘국사가 백성을 위하고 수행을 강조한 백련 결사를 일으킨 절로 유명하다. 예전엔 만덕산 만덕사로 불렸지만 백련 결사 후 백련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백련사도 지역의 다른 고찰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높이 5m에 가까운 백련사 사적비가 서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 따로 조성된 부분이 합쳐진 사적비는 보물 제1396호로 지정돼 있다. 백련사 대웅보전은 아래쪽의 만경루(萬景樓) 마주 보고 있다.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 대웅보전과 만경루 현판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극찬한 명필이다. 제주도 귀양 길에 들른 추사가 '글씨 같지도 않은 글씨'라고 낮춰 봤다가 유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 보고는 '천하 최고의 글씨를 몰라봤다'고 한탄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대웅보전 앞에 서면 법당 뒤로부터 왼쪽으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초록의 숲이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이다. 백련사를 찾은 시간은 해가 뉘엿해진 늦은 오후. 동백나무 숲을 바라보자 광택 나는 잎이 역광으로 비치는 햇빛을 반사해 눈을 부시게 한다. 아직은 서늘한 봄바람에 잎이 흔들리면서 반짝임을 더한다. 순간 아무도 없는 절 마당에서 눈부신 동백나무 잎의 춤사위를 보노라면 잠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대웅전 왼쪽으로 가면 동백숲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1500여 그루 우거진 동백 사이로 잠시 들어가면 숲 속에 사리탑인 원구형 부도가 있다. 계속 길을 따라가면 동백숲을 벗어나고 잠시 오르막 끝에 바다를 바라보는 해월루가 기막힌 전망을 자랑한다. 다시 울창한 숲으로 난 흙길을 걸어 내려가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던 다산초당을 만난다. 휴일이라 관광객들로 호젓함은 느끼기 어려웠지만 다산의 자취를 좇기엔 부족함이 없다. 길을 따라 내려가 다산기념관을 들르면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 가는 길·묵을만 한 곳
요즘은 새로운 도로가 속속 생기면서 강진과 영암을 찾는 길도 한층 가까워졌다. 부산에서는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순천 분기점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를 잠시 타고 가 동순천IC에서 빠져나간다. 4㎞ 정도 시내 도로를 가다가 영암순천간고속도로를 탄 뒤 강진무위사IC에서 내리면 영암 구림마을과 월남리가 멀지 않다. 강진읍 방향으로는 13번 국도와 2번 국도가 연결돼 시원하게 뚫린 도로로 금방 갈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강진 가는 차가 하루 10여 차례 운행한다. 영암으로 바로 가는 차편은 없어 광주를 거쳐 가야 한다.
영암군에는 군서면의 월출산온천관광호텔과 삼호읍의 한옥호텔 영산재를 비롯해 영암읍에도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고 강진군에는 주로 강진읍에 숙박시설이 몰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