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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46. 새 예루살렘
(1) 이상(異像)을 보는 길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계21:9-10]
지난 시간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전체적인 광경을 보았다.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없는 전혀 새로운 한 세계에 대한 이상(異像)이었는데, 여기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이 구체적으로 보이고 이 성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워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목적과 갈망 그리고 인간의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말로 했지만 하나의 광경이다.
이러한 광경 속에서 구체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인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된 것인가? 9절부터는 새 예루살렘에 관한 구체적인 조망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 첫 번째는 이상(異像)을 보는 길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한다. 이런 것을 어떻게 보는가? 사도 요한은 이렇게 봤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런 이상(異像)을 어떻게 볼 수가 있는가하는 것이다.
1. 일곱 천사 중 하나에 의해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사도 요한을 이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었다. 여기서 일곱 천사 중 하나는 지금까지 여러 천사가 나왔는데 마지막 천사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천사라는 말은 일곱 인을 최종적으로 집행하는 천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가 7곱 인이다. 일곱 인 속에 일곱 나팔이 들어있고 일곱 나팔 속에 일곱 대접이 들어있다. 구성이 7막 7장 7절로 되어있는 하나의 희곡같이 만들어져있다. 지금 마지막 배우(집행자)가 나온 셈이다. 마지막 집행자가 나왔다는 말은 그동안의 모든 사건이 최종적으로 완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집행의 모든 목적이 새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농사를 지을 때 밭을 가는 경우도 있고 씨를 뿌리는 경우도 있고 물을 주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다. 결국 그 마지막은 추수를 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 일이 농사를 다 한 일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대접을 가진 천사가 나온 것은 마지막을 위해서 나온 사람이니까 일곱 인의 최종 완성은 바로 새 예루살렘이라는 것이다.
전 성경의 모든 계시의 목표인 종결점은 어디인가?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사람들이 지금 이 목표점이 어디인지를 잘 모르고 헷갈려서 많이 헤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놀라운 분이구나, 저분을 믿어야 되겠구나하여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보고 저분은 참 좋은 분이다 하고 믿는 것이다. 믿는 동안에 어려운 일도 해결하고 소원도 성취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목표를 모르고 배가 아프면 배 아프다고 하고 머리가 아프면 머리 아프다고 하고 우선 현실적으로 당면한 문제만 하나님께 가지고 가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새 예루살렘이다. 어린 양의 신부 곧 그 아내를 내가 보이겠다. 어린양의 신부인 그 아내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행해왔던 모든 일의 마지막 목표이다. 이 목표 안에서 하나님은 안식하실 것이고, 우리도 그 목표 안에서 비로소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새 예루살렘을 모르고 이것을 놓친다면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어도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고 그가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다 지키고 모든 것을 다 한다 하더라도 정통 아니라 정통 중의 정통을 다닌다 하더라도 목표를 모르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시험에 나오지 않을 문제만 계속 풀고 있는 학생과 똑같다.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시험장에 가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왜 그런가했더니 자기가 공부한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 시험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공부한 것이 나왔으면 될 텐데 자기가 공부한 것이 안 나왔다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공부한 것이 시험에 나온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내가 믿고 따르고 순종해야 시험장에 나가면 이것이 답인 것을 알게 되고 내가 평소에 늘 하던 것이라는 알 게 된다. 그런데 열심히 했는데 시험장에 가보니 전혀 모르는 것이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러 간 사람이 밭에서 농사하는 일만 열심히 연습해서 가면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겠는가?
목표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볼 때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사람은 천당으로 가버리고, 또 한 사람은 말세가 와서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와서 세상을 완전히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 열심이고 다 충성이고 다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 이것은 마지막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가 안내하는 마지막 코스이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은 분명히 마지막 코스를 알고 달려야 한다. 마지막 코스를 모르고 달리면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다. 테이프를 들고 있는 곳으로 가야 1등을 할 수 있지 엉뚱한 곳으로 달리면 아무리 잘 달려도 1등을 할 수가 없다. 옛날에 초등학교 운동회에 가서 1학년이 달리기를 하는 것을 보면 라인을 따라 달려야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라인을 무시하고 운동장 가운데를 가로질러 오는 아이도 있다. 좌우지간 그 아이는 어디로 가야되는지는 알고 오는 것이다. 하물며 평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평생을 기도를 하면서 무릎이 닳도록 남들이 시끄럽다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을 잠을 못 자게 하면서 무엇 때문에 했는지를 이유를 모르고 해버리면 어떤 결과가 오겠는가? 지금 도심지에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면 시끄럽다고 전부 반대한다. 새벽마다 시끄럽다. 나도 옛날에는 그것을 모르고 내가 처음 갔던 교회가 산동네 높은 곳에 있었다. 교회에 스피커를 대놓고 새벽 4시가 되면 차임벨(chime bell)을 울렸다. 이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거기서 하면 서대문일대가 다 들린다. 그러니 그 밑에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시끄러웠겠는가. 요즘 같으면 안 되겠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좋아서 받아주었다. 그 뒤로 사람들이 잠을 깨니까 안된다하여 서울시에서 한 구에 한 교회만 선정하여 차임벨을 울리도록 했다. 요즘에는 그것도 안할 것 같다. 시끄러우니까 교회만 지으려고 하면 반대한다. 그런데 마귀새끼가 그런다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마귀새끼라서가 아니라 시끄러워서 그러는 것이다. 그렇게 욕먹어가면서까지 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고 비통한 일인가!
최종적인 목표가 새 예루살렘이다. 인봉한 책의 비밀! 이 최종적인 목표가 역시 새 예루살렘이다. 어린양 그리스도의 배필! 그 배필을 얻는 세계, 그 세계가 최종적인 목표이다. 그러므로 일곱 인의 최종적인 완성이다. 이 일곱 인은 하나님의 비밀이고, 또 우주의 비밀이고, 또 인생의 비밀이다. 이 모든 비밀이 이 일곱 인을 통해서 열려졌는데, 이 열려진 것을 보느냐 못 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본 사람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하나님이 어디로 인도하는지를 알고 가는 사람이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냥 맹목적으로 가는 것이다.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것이다.
2.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보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겠다고 했다. “이리 오라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왜 신부라고도 하고 어린양의 아내라고도 하는가? 신부라는 말은 단순히 ‘그 여자(γυφημ, young woman)’라는 말이다. ‘그 여자’는 성경 안에 계시된 그 여자이고, 우리는 ‘그 여자’를 꼭 알아야 된다.
‘그 여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그 여자’였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산 혼이 되게 했다고 했을 때의 그 흙은 생기의 여자였다. 그 다음에 생명나무를 두어서 먹게 했다고 했는데 누구에게? 산 혼에게였다. 그 산 혼은 누구인가? 생명나무의 여자였다. 하와는 누구인가? 아담의 여자였다. 그래서 아담은 남자라 하고, 하와를 여자라고 했다. 아담은 이쉬(lsh)라 하고 하와는 이솨(lsha)라 한다. 여기서의 ‘그 여자’는 바로 이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 생기 앞에서 흙, 생명나무에 대해서 산혼, 아담에 대해서 하와가 바로 ‘그 여자’이다. 이 ‘그 여자’는 하나님과 짝을 이루어야 하는 ‘그 여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교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남성형인데, 교회는 여성형이다. 신부는 여자라는 뜻이다.
아내라는 말은 ‘그 부인’이라는 뜻이다. 결혼을 했다는 뜻이다. 어린양의 배필이 됐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 여자’라는 말은 어떤 자격을 의미한다. 남자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라야 자격이 있다. 일단 여자가 되어야 자격이 있다. 여자가 아닌 사람은 남자의 배필로서 자격이 없다. 요즘 호모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비정상적인 것이고, 정상적으로는 여자라야 자격이 있다. 그러면 여자라고 해서 다 아내인가? 그렇지 않다. 결혼을 해야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 여자,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겠다고 했다.
교회는 자격 상으로 여자이고, 그리스도와 결혼하는 의미에서 배필이고 아내이다. 우리는 다 여성형으로 여기 와있는 사람들이다. 남자이지만 우리는 남자가 아니고 여성형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여성형이다. 우리가 그에게 시집가기 위해 있는 사람들이다. 여자 곧 그 아내를 네게 보이겠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자이다. 그리고 장차는 그의 아내가 될 여자이다.
A. 그 신부, 그 아내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가?
그 신부, 그 아내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인가? 누가 ‘그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또 누가 ‘그 아내’가 되는 것인가?
1)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지정되고 선택됨 (7:1-8)
7장에 보면 하나님의 인 맞은 자들이라는 말이 나온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천사들이 와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쳤다.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말하고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144,000이 나왔다고 되어있다. 7장 1절부터 8절에 보면 이것은 선택되고 지정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왜 그 사람들에게 인을 쳤는지는 모른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왜 택했는지 모른다. 아브라함을 왜 택했는지 모른다. 왜 야곱을 택했는지 모른다. 택할 때까지는 우리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 다만 하나님이 지정을 했고 선택을 했다. 이런 사람들이 첫 번째 나온다.
2)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7:9-17)
두 번째로 7장 9절로부터 17절에 보면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나왔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왔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 속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고,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한다. 이 환란은 세상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구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어린양으로 인해서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내가 다시 난 사람들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고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더라는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셨다는 말은 그들의 가리개가 됐다는 말이고,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목자가 되어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다시는 목마름이 없더라고 말한다. 인 맞은 자는 누구이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누구인가? 인 맞은 사람들은 유태인들이고,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이방인들이라고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꼭 그런 문제가 아니고 지정되고 선택된 사람들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으로 구속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부 경험해 보면, 원래 하나님에 의해 우리가 모를 때 선택되고 지정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오게 되었고, 그래서 말씀을 듣게 되었고, 그래서 다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이것을 볼 때 유태인들 144,000이라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는 유태인들이 선택된 사람들이니까 선택된 사람들을 여기에 표시한 것뿐이지 사실은 우리 모든 사람들도 다 선택된 사람이다. 선택이 없었으면 우리는 올 수가 없다. 내 발로 내가 걸어서 교회에 왔는데 무슨 선택이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가면 갈수록 깊이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내 발로 온 것이 아니었고 이상한 일이다. 다음에 가보면 나 같은 사람은 다 교회에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같은 사람도 교회에 오지 않는다. 나 같은 환경에 있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가 있는데 교회는 안 온다. 말은 해보면 생각은 똑같은데 교회는 안 온다.
그분의 선택하심과 지정하심이 먼저 있고, 다음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알고 보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두 방면으로 표현된 이 사람이 요한계시록 전체 안에서 점점점점 여러 가지 형태와 여러 가지 환경을 겪어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아내, 신부는 누구인가? 바로 선택되고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어린양의 신부이고 아내가 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되어 결국 새 예루살렘까지 가게 되는 것인가?
3) 두 증인과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 (11: 12: )
11장에 가면 두 증인과 여자가 낳은 아들이 나오게 된다. 두 증인이 나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게 되고, 다시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가더라는 말이 나오고, 12장에 가면 여자가 낳은 남자 아이가 있는데 용이 먹으려고 했는데 하늘로 들려올라가더라는 말이 나온다. 이 두 사람들이 들려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4)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144,000인 (14:1-5)
그 다음에 다시 14장에 가면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144,000이 섰더라고 한다. 7장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나온 것이다. 이때는 좀 구체적으로 되었다. 왜 구체적으로 되었는가? 두 증인과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의 과정을 거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더라고 한다. 어린양이라고 이름 쓴 것이 있다는 말은 바로 어린양이라는 말이다. 소 이마에 어린양이라고 쓸리는 없다. 어린양 이마에 어린양이라고 쓰는 것이고, 소 이마에 소라고 쓸 것이다.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 쓴 것이 있더라는 그 말은 바로 어린양이라는 말이다.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더라. 이것은 144,000밖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더라. 누가 새 노래를 부르는가? 지정되고 구속받은 사람들이 두 증인과 사내아이를 거쳐서 그래서 새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땅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니까 사람들 속에서 구속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상태를 보니까 정절이 있는 자이고 여자로 인해 더럽힘을 입히지 않은 자들이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자이고,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이고,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한다. 입에는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묘사를 했다.
5) 다 익은 곡식 (14:14-16)
7장에서는 단순히 해 돋는 곳에서 한 천사가 와서 하나님을 인을 가지고 인을 쳤다고 되어 있는데, 14장에 오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가 드러나 있다.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나오게 된다. 이 사람들을 지나서 다 익은 곡식, 구름 위에 앉은 이가 이한 낫을 가지고 땅에서 익은 곡식을 거두었다는 말이 나온다. 인자에 의해서 추수된 곡식이다.
인자에 의해서 추수된 곡식이라는 말은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추수된 곡식이니까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양식이 된 사람을 의미한다. 그분이 거둔 양식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먹는 것이고 어쩌면 그분과 하나이다.
흰 구름 위에 앉으셨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을 쓰셨고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결국 우리는 인자에 의해 추수된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냥 갑자기 추수된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이신 그 인자에 의해서 추수된 사람들이다.
6)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의 이기는 자들
그리고 난 다음에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서 이기는 자들이 나온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15:1-4)이라고 한다. 지금 하나님께서 선택되고 구속받은 사람들이 이런 과정을 겪어간다고 생각해야 된다. 두 증인과 사내아이의 과정을 겪어서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진 사람들이 되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이 결국 다 익어서 익은 곡식이 된다. 이 익은 곡식이 된 사람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 섰더라. 심판 위에 서서 노래를 부른 사람들이니까 이미 심판이 다 지나갔다는 뜻이다. 불 속에 나무와 쇠를 넣어놓으면 나무는 타버리고 없고 쇠만 남게 된다.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 남은 사람들은 심판에서 심판될 것은 다 심판되고 없고, 심판되지 않을 것만 남은 사람들이다.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이다. 여기서 짐승은 세상 권력을 의미한다. 우상은 세상 권력을 따르는 종교에 해당된다. 이것을 이기고 나온 사람들이다. 세상은 바로 이 짐승과 우상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모세의 노래 곧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과 같다. 모세의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와서 불렀고, 여기는 지금 불 섞인 유리 바다를 건너서 부르는 것이다. 심판을 거쳐 왔다는 뜻이다. 사실 상은 홍해에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은 동시에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거기서 다 매장이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왔다는 말이다. 나무는 타고 쇠는 남았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의 이기는 자들이 나온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선택되고 구속된 자들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어린양의 신부로 변화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자가 필요하다. 계시록 7장에서 선택된 자가 나오기 전에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가 나왔는데 일곱 교회 안에는 누가 나오는가? 이기는 자들이 나온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바로 그 이기는 자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기는 자들이 되는가? 방금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선택되고 구속받은 후에 두 증인과 사내아이를 거쳐서 시온산에 그분과 함께 선 사람들이 되고, 그 다음에 그분에 의해 추수가 되며, 짐승과 우상의 수를 이기고 나오는 사람이 된다. 이기는 자들이 유리 바다 위에서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이 후에 16장부터 18장까지는 큰 음녀와 바벨론의 멸망이 나온다. 19장에 가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나온다. 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백마부대가 등장하는데 이 백마부대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을 잡는 것이다. 이것이 어린양 혼인잔치의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완성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이 잡혔기 때문이다. 불 못에 들어갔으니까 그 다음에 크고 흰 보좌의 심판이 있게 된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 이외에는 다 불 못에 들어가더라. 여기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 불 못에 들어가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왔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선택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서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바로 최종 완성을 향해서 새 예루살렘이 되기 위해서 가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배필로서 신부라고 말하고, 그분의 거처로서 장막이라고 말하고, 그분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백성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저희의 백성이 된다, 하나님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말들이 그래서 나온 말들이다.
B. 어디에서 보았는가?
1) 영 안에서 (έν τινευατμι) (21:10)
그러면 이렇게 변화되고 있는 이 이상(異像)을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속에서 같이 살면서 이런 이상(異像)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것을 보고 있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두 증인의 활동을 보고,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144,000과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 익어서 거두어진 곡식을 보는 것이고,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서 승리의 찬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보는 것이고, 바벨론의 멸망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나가보면 대구 시내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보게 된다. 뉴스를 들으면 다 똑같은 뉴스를 듣는 것이다. 똑같이 세상을 보는데 이 속에서 우리는 다른 것을 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이상(異像)이라고 한다. 이것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어디에서 보았는가? 우리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성경에 말씀을 보니까 “영 안에서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했는데 그것은 영(靈) 안에서 나를 이끌어갔다는 뜻이다. 이 이상(異像)은 하늘에 속한 이상(異像)이기 때문에 영(靈)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영(靈) 안에서는 이 이상(異像)을 보고, 혼(魂) 안에서는 현상(現像)을 본다. 우리가 보는 것은 현상(現像)이고, 영(靈) 안에서 본 것은 이상(異像)이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우리가 산 속에 가서 본다는 것이 아니고, 현상(現像)은 우리가 다 눈으로 보는 것이다. 현상(現像)은 다 눈으로 보는데 그 현상(現像)을 보는 속에서 우리는 혼(魂) 안에서 현상(現像)을 보지만 영(靈) 안에서는 이상(異像)을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에 갈 때 현상(現像)은 무엇이었는가? 현상(現像)은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거기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이상(異像)을 봤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가면서 현상(現像)만 보고 이상(異像)은 못 봤고, 바울은 현상(現像)도 보고 이상(異像)도 봤다는 말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백성들은 모두 현상(現像)만 보았다. 빽빽한 구름과 뇌성과 나팔소리와 번개를 보았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로 하여금 이런 광경을 보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너무 떨렸기 때문이다. 이는 현상(現像)을 보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상(異像)을 본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성막에 대한 이상(異像)을 가지고 내려온 것이다.
우리는 지금 눈이 있어 현상(現像)은 다 본다. 물론 현상(現像)을 보는 것도 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지식 있는 사람이 보는 것과 없는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른 것처럼 다르다. 지식이 있는 사람이 컴퓨터를 보는 것과 컴맹이 컴퓨터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지만 그것은 배우면 되는 것이다. 왜?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靈) 안에서 본 이상(異像)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공부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상(異像)이 필요하다. 그 사물 뒤에 있는 이상(異像)이 필요하다. 현상(現像) 뒤에 있는 이상(異像)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말한다. 그는 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다.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해서 허황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異像)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정보화 시대라고 말한다. 토플러가 3대 혁명을 말했다고 했는데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이다. 18세기 당시는 산업혁명 시대였다. 물자가 생산되고 기기가 생산되고 모든 것이 생산되게 되었다. 이것을 산업사회라고 말한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정보시대라고 한다. 이제는 물건만 많이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정보가 있어야 되는 시대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물건을 만들어놓고도 팔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좀 덜 좋은 물건을 만들어놓고 팔아먹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잘 파는 사람은 정보가 빨라서이다. 어디에 팔아야 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보가 없는 사람은 물건은 좋은 것을 만들어놓았지만 어디에 팔아야 할지를 모른다. 그래서 못 파는 것이다. 시장 정보에 어둡다는 말이다. 정보에 어두우면 지금은 뒤떨어진다고 한다.
정보화 시대가 되었는데 우리도 지금 절실하게 정보가 필요하다. 무슨 정보가 필요한가? 천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천국 정보가 필요한 시대이다. 이 천국 정보가 잘못되어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유태인들도 마찬가지로 천국 정보가 잘못되어 망한 사람들이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도 천국 정보가 잘못되어 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천국 정보는 지금까지 무엇을 제시해 왔는가? 우리가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마지막에 천당이라고 했다. 이것이 하나의 영계의 정보이다. 영(靈) 안에서 봤다는 정보이다. 천당을 정보로 제시했다. 그것을 정보로 알고 따라 갔다. 그런데 천당에 간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어디에 가 있는지를 확인할 길이 도저히 없다. 이 정보는 분명히 기독교가 오랫동안 가지고 왔던 정보이긴 한데 이 결과가 어찌되었는지를 확인해 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이것을 누구에게 부인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시인해서도 안 되고 시인하자니 끝도 없는 정보가 되어 그 사람이 잘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내가 천당에 대한 정보를 여러분에게 제공했는데 여러분이 그 정보를 받아 그것을 믿고 갔다고 하자. 천당에 갔으면 갔다고 연락을 해주던지 해야 하는데 아무 연락이 없다는 것이다. 나도 정보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답답하고 또 그 사람은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이것이 많이 애매하다. 이렇게 애매한 정보는 잘못된 정보는 정보가 없느니만 못하다. 어느 주식이 올라갈 것이라는 정보가 나왔다. 그래서 샀는데 떨어졌다면 잘못된 정보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다면 주식을 안했을 것인데 괜히 그 정보 때문에 돈을 투자했는데 망한 것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망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정보가 잘못되어서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못해 자기들이 용기를 내어 폭격만 하면 될 줄 알고 생각하여 망한 것이다. 정보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한다. 사업도 돈 벌이하는 것도 공부도 그렇다. 모든 것이 정보가 잘못되면 망한다.
망해도 천당에 간 사람들은 망했는지 안 망했는지가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하는 것이다. 앞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보이면 진짜로 가든지 아니면 안가든지 할 것인데 안보이니까 계속 한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끊어졌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계속 밀고 왔다. 뒤 사람들은 안보이니까 다리가 폭파가 됐는지 안됐는지 알 수가 없다. 빨리 가야 된다고 미는 것이다. 빨리 가려고 가다보니까 한강 다리가 끊어져 버려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왜? 정확한 정보가 안 오기 때문이다. 한강 다리에 빠져 죽은 사람을 봤다면 다 뒤로 돌아갔으면 되는 건데 앞이 안보이니까 다 앞으로 가다가 죽은 것이다.
천당에 대한 정보도 확실하면 앞으로 가면 되는데 가서 소식이 없다. 계속 가다보면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뒤에서는 계속 간다는 정보만 갖고 가는 것이다. 천국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천당이 아니고 새 예루살렘이다. 나는 천당이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겠다. 하도 많은 사람이 있다하니까 나 혼자 없다고 해도 안 된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분명히 봤다. 어떤 사람을 봤는가? 하나님이 선택되고 지정된 사람들을 봤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된 사람을 봤다. 그리고 여자가 낳은 사내아이를 봤고,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사람을 봤다. 익어서 추수된 곡식들을 봤고, 불 섞인 유리 바다 위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봤다.
새 예루살렘에 관해서는 우리가 확실히 본 것이다. 우리가 아직 끝까지 다 간 것은 아니지만 본 것이다. 그러니 이 정보가 확실한 것이다. 천당에 관한 정보는 내가 볼 때는 불확실한 정보이다. 미확인된 정보이다. 어떤 사람은 천당에 갔다 왔다는 사람이 있는데 갔다 왔다는 사람마다 다 말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이 천당에 갔다 오면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캄캄한 굴을 지나가니 빛이 환히 비취더라고 말한다. 동양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혓바닥이 늘어져있다든지 거짓말 하는 것이 있더라고 한다. 내 생각으로는 왜 그런가 하면 서양 사람들은 어려서 잘못하면 캄캄한 방이나 화장실에 가둔다고 한다. 1~2시간을 깜깜한 곳에서 벌을 서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럽겠는가. 서양 사람들은 그것이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 중 천당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캄캄한 터널을 지나고나니 빛이 비취더라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엄마가 문을 열어주었을 때 빛이 환히 비쳐졌을 것인데 그것이 남아있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것은 확실한 학설은 아니라 말할 수 없지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당에 대한 정보는 있다고 해도 불확실하다.
새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는 오늘 우리 안에서 다 보는 것이므로 확실하다. 비록 지금 그것이 싹이고 비록 지금 가지에 불과하고 비록 적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봤다. 이것은 본 것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가 없다. 나 혼자 꿈에 봤다던가 아니면 잠깐 죽었다가 와서 봤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날마다 숨 쉬면서 봤다. 어떤 현상(現像)을 통해서 봤지만 현상(現像) 뒤에 있는 이상(異像)을 본 것이다. 우리는 이 정보가 없으면 망하는 것이다.
호세아 4장 6절에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구나” 하는 말이 나온다. 이 지식이라는 말은 세상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의 정보가 없다는 말이다. 정보화 사회의 기능은 지식에 있다. 정보화 사회가 되려면 지식이 있어야 된다. 지식이 없이는 정보화 사회가 될 수 없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구나”. 이것은 정보가 없어 망한다는 뜻이다. 이사야 5장 13절에 보면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지하면 모르니까 속아서 사로잡히는 것이다. 아담도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선악과를 먹지 않았을 것인데 지식이 없어서 먹은 것이다. 뭔가 모르면 당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그런 점에서는 각성을 더 잘할 것이라 생각된다. 옛날에 하도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 차이가 많아서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이 있다. 배우면 벼슬을 하고 못 배우면 벼슬을 못한다는 생각이 차 있다. 우리나라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이유가 교육에 대해서 아주 조예가 있어서가 아니고 500년 동안 묵은 한 때문이다. 배운 사람은 사대부라 해서 갓 쓰고 다니고 못 배운 사람은 농사나 짓고 해왔던 것이니까 한이 맺혀서 어떻게 하면 배워서 출세를 하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에 과외열풍이나 교육열풍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이 교육열풍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그 지식보다 더 큰 지식이 필요하구나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 500년이 아니라 5000년 묵은 한이라도 없어질 것이다.
천국은 지금은 정보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정보를 주려고 왔다. 땅에 씨를 뿌리는 비유를 하신 것은 그 정보이다. 어떤 씨는 나고 어떤 씨는 안 나고 어떤 씨는 30배 60배 100배 되느냐고 물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정보를 주려고 왔다. 이 정보를 듣고 신기한 정보다, 특별한 정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던 것이다. 우리가 그 정보를 듣고 따라야만 그분에게 갈 수 있다.
우리는 이상(異像)이 필요하다. 현상(現像)을 보는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이상(異像)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영(靈) 안에서 나를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이 영(靈) 안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영(靈) 안에 있는 것인가, 산속에 가면 영(靈) 안에 있는 것인가, 신령해지면 영(靈) 안에 있는 것인가 한다. 사람들은 영(靈) 안에 라는 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영(靈) 안에는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내가 어느 공간 안에 있다는 것하고, 내가 영(靈) 안에 있다는 것하고는 아주 다른 문제다. 내가 영(靈) 안에 있었다는 말을 영어로는 ‘I was in sprite.(나는 영 안에 있었다)’로 번역을 했다. 그런데 이 ‘was’하는 말이 영어로 정확히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to become’이라는 뜻이다. 내가 물질적으로 지금 가창 교회에 왔다는 말과 다르게 내가 그 안에서 그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기노마이(ginomai)라는 단어가 ‘to become(됐다)’이라는 뜻이다.
물질적 공간 안에 있는 것하고, 영적인 영역 안에 있는 것하고 다른 문제이다. 물질적 영역 안에 있다면 그냥 간단하게 in(안에)하면 된다. 영적인 영역 안에는 단지 in(안에)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우리가 언어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영(靈) 안에 라고하지 말자체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in이라는 단어를 희랍어로 엔(en)이라는 단어를 1장에 보면 ‘was on the island(내가 밧모 섬에 있었다)’ 할 때도 이 단어이고, 영(靈) 안에 있었다 할 때도 같은 단어이다. 그런데 밧모 섬에 있었다 할 때는 ‘was on the island’로 번역했고, 지금 여기서는 ‘in sprite’로 번역했다. ‘on the island’ 했을 때는 시공간을 얘기한 것이고, ‘in sprite’ 할 때는 시공간을 말한 것이 아니다. 영(靈) 안에 있는 것이므로 시공간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靈)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이 문제가 기독교 안에서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일 때만 영(靈) 안에 있다. 영(靈) 안에 있으려면 내가 하나님과 하나여야만 영(靈) 안에 있지 하나님과 하나가 아니면 영(靈) 안에 있을 수 없다. 돌은 아무리 물속에 있어도 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돌이 물속에 있는 것은 어떤 물질이 물질 속에 들어있는 것이 되지만 우리가 영(靈) 안에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인 것이 곧 하나님 영(靈) 안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인가? “죽음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삶에서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여기 ‘되었다면’ 할 때도 같은 단어를 썼다. 죽음에서 연합한 자가 되었다면 삶에서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분과 연합한 그것이 바로 영(靈) 안에 있는 것이다. 영(靈) 안에 있는 것이 투시하고 보고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하나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이 영(靈)이시니까 그분 안에 있으려면 내가 영(靈)이어야만 같이 있어지지 영(靈)이 아니고서는 같이 있을 수가 없다.
요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한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저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이 산에서도 말고 저 산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靈)과 실제로 예배 하느니라 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이다. 영(靈)이신 하나님 안에 있으려면 영(靈)이어야 되고, 영(靈)이려면 하나님과 하나여야 된다. 기도를 해서 영(靈) 안에 있으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생겼다. 기도로 영(靈) 안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술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기술인데 기술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분과 우리가 하나가 아니면 기술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지금 “그 영”이라고 했다. 22장 17절에 보니 그 영(靈)과 신부가 말씀하기를 할 때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영(靈)이다. 우리는 그 영(靈) 안에서 그분과 하나인 그 안에서 우리가 이 이상(異像)을 본다는 뜻이다. 그분과 하나인 안에서만 그것이 보여진다. 개안에서만 개가 본 것이 보이지 사람이 개 속에 들어가서 개가 본 것을 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내가 소 속에 들어가서 소가 본 것을 볼 수가 없다. 내가 소가 되어야만 소가 본 것을 볼 수가 있다. 내가 그 영(靈) 안에 있으려면 내가 그 영(靈)이라야만 그 안에서 그것을 보는 것이다. 소가 개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개가 소안에 들어갈 수도 없다.
우리가 이상(異像)을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디에서 보는 것인가? 영(靈) 안에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임 안에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예수의 세계는 그분과 하나임 안에서 보여진 세계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해도 사람들은 모두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라고 말하니까 “네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기냐”고 했다. 이것은 서로 동문서답이다.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는데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내 있는 곳에 영접하겠다”고 하니,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 길을 우리가 모르겠습니다” 하는 것은 동문서답하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니 그러면 “아버지를 좀 보여 주십시오” 하는 것도 동문서답하는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했더니 제자들이 캄캄해지게 되었다. 도대체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분 안에서가 아니면 그분이 하는 말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의 말도 사실은 그 사람 안에서가 아니면 그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남의 속 모른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은 이상 모른다. 나와 같은 형태로 방황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금방 이해하겠는데 나와 같은 방식으로 방황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머리만 아프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쿵저러쿵해서 괴롭다고 하는데 내가 들으면 아무것도 괴로운 것이 아닌데 왜 저렇게 괴롭다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그런 일이 문제가 아닌데 그 사람은 문제라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떤 사람의 말을 들을 때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 속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靈)이 아니고는 어떻게 영(靈)의 사정을 알 수 있냐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일 때만 그분의 세계를 볼 수 있지 그분과 하나가 아니면 그분의 세계를 볼 수가 없다.
이상(異像)을 보는 것을 볼 때, 계시록 전체가 하나의 이상(異像)이라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맨 처음에 나온 것이 일곱 교회의 이상(異像)이었다. 그 사이에 세상의 이상(異像)과 바벨론의 이상(異像)이 나오고, 마지막에 새 예루살렘의 이상(異像)이 나온다. 일곱 교회의 이상(異像)이 나오고, 예루살렘과 일곱 교회 사이에 세상의 이상(異像)과 바벨론의 이상(異像)이 나온다. 이 일곱 교회는 세상과 바벨론의 심판을 거쳐서 새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이다. 왜 사이에 끼여 있는가? 이것을 처리하느라고 있는 것이다. 일곱 교회를 그냥 가지고 왜 새 예루살렘으로 못 갔는가? 일곱 교회 안에 세상과 바벨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처리하고 가야되기 때문에 이것이 사이에 끼여 있다. 일곱 교회의 이상(異像)이 있고, 세상의 이상(異像)과 바벨론의 이상(異像)이 있고, 새 예루살렘의 이상(異像)이 있다.
우리가 세상의 이상(異像)을 보고 바벨론의 이상(異像)을 볼 때 그냥 현상(現像)을 보면 잘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지금 10억 이상의 인구를 갖고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선교를 하고 있다. 잘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상(異像) 안에서 보면 그것이 아니다. 세상도 지금 잘되어가고 있는데, 이상(異像) 안에서 보면 이것이 심판이고 멸망인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상(異像)이 보여야 내 안에 있는 세상과 바벨론이 떠나가게 되지 이 이상(異像)을 모르면 왜 세상을 보고 심판을 하는지 왜 바벨론을 보고 저러는가 하고 생각될 것이다. 너무너무 좋고 잘되고 있는데 괜히 너무 한다거나 세상에 대해서 저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바벨론에 대해서 저렇게 말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상(異像)이 없으면 그렇다. 이상(異像) 안에서 보니 세상의 정체가 이런 것이고 이렇기 때문에 심판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異像) 안에서 보니 바벨론의 실상이 이런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멸망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확실히 알면 우리는 우리 속에 이 세상과 바벨론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것을 지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異像)이 확실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것이 확실하게 보이기만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태도는 분명해질 것이다. 확실히 보이면 분명해진다. 교회가 확실히 보이면 내가 교회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분명해지게 된다. 교회가 확실하게 안보이면 내 태도가 분명하지 않게 된다. 형제가 이상(異像) 안에서 확실하게 보이면 내가 그 형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게 될 것인데 그 형제의 현상(現像)은 보이지만 이상(異像)은 보이지 않게 될 때 헷갈리게 된다. 저 형제는 참 좋은 형제라 했다가 어느 날 가면 좋다고 생각했더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가 된다. 현상(現像)만 보고 이상(異像)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10년이나 되었다면서 그 모양이냐 하기도 하고 30년이나 되었다면서 그것 밖에 안 되냐 그럴 수도 있다. 현상(現像)이 자기한테 만족이 되지 않고 현상(現像)은 바꾸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異像)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늘 흔들린다. 이상(異像)을 보게 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영(靈) 안에 있어야만 이상(異像)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임 안에서만 볼 수가 있다. 십자가 안에서 우리가 연합된 그 자리에서만 이상(異像)을 볼 수가 있다.
2) 크고 높은 산에서 (21:10)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영(靈) 안에서 크고 높은 산으로 이끌려갔다. 큰 음녀의 이상(異像)을 보기 위해서는 17장에 광야로(17:3) 갔는데 음녀는 광야에 있었다. 광야는 거치른 세상을 의미한다. 황막한 것, 생명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의 이상(異像)을 보기 위해서는 크고 높은 산으로 갔다. 이 크고 높은 산은 어디인가?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을 상징한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갔을 때 산으로 갔다. 산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그런 것인데 이것도 현상(現像)은 산인데 이상(異像)은 다른 것이다. 산기도 간다고 해서 하나님 만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골방에 간다는 사람도 있다. 골방에 간다고 하나님 만나는 것도 아니다. 골방이나 산은 현상(現像)이고, 이상(異像)이 필요하다. 큰 음녀를 만나기 위해서 큰 음녀의 실상을 보기 위해서는 광야로 갔다.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고 덥고 춥고 삭막하고 생명이 못살고 생명이 없는 곳이다. 그것은 큰 음녀의 실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을 보기 위해서는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갔다.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교회를 보기 위해서는 어디로 갔었는가? 1장 9절에 보니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한다. 내가 주의 날에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때 일곱 금등대가 보였다. 밧모라 하는 섬은 무엇인가? 이것은 제한된 곳이다. 사도요한은 그때 옥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섬에 갇혀있는 상태였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지금 이 땅위에서 교회는 예수의 증거로 극도로 제한된 곳이다. 바다 속에 있는 섬처럼 교회는 지금 예수의 증거로 제한된 곳이다. 교회는 오직 예수의 증거만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밧모라는 섬에서는 요한은 오직 예수의 증거 하나 때문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지금 넓은 세상과 바다에 돌아다닐 텐데 예수의 증거 때문에 섬에 갇혀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의미로는 교회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이 지금부터 교회에 가서 되겠는가, 조금 더 살아보고 살 것 다 살고 정년퇴직하면 가지 지금부터 가서 그렇게 제한되어 되겠냐고 한다. 젊은 애들이 예수만 알고 다른 것은 모르면 되겠냐는 말을 듣는다. 교회는 예수의 증거로 제한된 곳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우리는 예수의 증거로 제한된 사람이다. 이 제한된 것이 싫으면 못 들어온다. 들어오면 제한 될 것 같으니까 교회 주변을 빙빙 돌게 된다. 내가 교회 들어왔다면 나는 예수로 제한되어야 한다. 오직 예수밖에 없다. 다른 말해야 좋아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 바깥에서는 다른 말을 하면 호응하는 사람도 많고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데 교회에 들어오면 다른 증거를 하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예수의 증거만 계속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저것은 너무 편협하다, 너무 제한되다 꼭 저렇게 할 필요가 있냐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바깥에서 빙빙 도는 것이다. 섬에 갇힌 것이 아니라 배타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배타고 돌아다니니까 좋기는 좋다.
우리가 배타고 돌아다닐 것인가, 섬에 갇힐 것인가? 우리는 지극히 제한된 곳에 있다.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놀라운 것인지! 왜 우리가 그 제한을 즐거워하는 것인지! 우리가 갇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인지! 그것은 이상(異像)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여기서 이상(異像)이 없고 현상(現像)만 있다면 갇혀있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본 사람들은 이상(異像)은 못보고 현상(現像)만 보는 것이다. 현상(現像)만 보니까 젊은 사람들이 저기 갇혀있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밖에는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상(現像)이다. 그들이 이상(異像)을 본다면, 그 안에 갇혀있는 사도요한을 본다면, 그가 이상(異像) 가운데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볼 것이다.
제한 속에 감사한 나라! 우리 노래 중에 ‘제한 속에 감사한 나라’ 는 아주 잘 표현해 놓았다. 우리는 제한 속에 감사한 나라이다. 사람은 사실은 어떤 제한 안에서 자기가 안정을 갖는 것이다. 무제한 속에서는 안정이 없다. 그래서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다. 총각으로 오래 돌아다니면 좋다. 배타고 돌아다니면 좋기는 좋다. 제한도 없고 누가 늦게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고 왜 그러냐는 사람도 없고 다 좋다. 다 좋은데 왜 결혼을 하는가? 배타고 돌아다니는 것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배타면 멀미를 하는데 불안정하다. 결혼하면 제한이 많다. 이래라 저래라 하고 상대방의 비위도 맞추어야하고 자기 마음대로 못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다. 총각 때 없던 일이 많고 처녀 때 없던 일이 많고 안 해도 좋은 일도 많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하는가? 제한 속에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제한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결혼을 못한다. 평생을 배타고 돌아다니다가 풍랑을 만나서 부서지고 만다. 교회는 제한된 곳이다. 예수의 증거로 제한된 곳이다.
우리가 이 이상(異像)을 보기 위해서는 첫째로 적합한 존재(εγενομην εν πνευματι)가 필요하다. 영(靈) 안에 있는 그 존재가 필요하다. 존재적으로 영(靈) 안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과 하나인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우리가 그 세계를 보게 된다.
두 번째는 적합한 각도(위치)가 필요하다. 산에서 본다는 것은 각도를 의미하는데 하늘의 이상(異像), 영원한 실제를 보는 것은 각도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면 어떻게 보이고 어떤 사람이 되면 다르게 보이고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여러분이 경험해 보면, 분명히 그때는 교회가 이래서 나한테 귀찮고 괴로운 것이었는데 지금은 교회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이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각도가 달라진 것이다. 보는 각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물질은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정사각형은 어디서 봐도 똑같고 정삼각형은 어디서 봐도 다 똑같은데 직사각형은 동쪽에서 보는 것과 북쪽에서 보는 것이 다르다. 하나님은 영(靈)이시고 그분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니까 이것은 각도가 천만분의 일만 틀려도 다 틀린다. 그래서 이 각도가 아주 중요하고 어디서 보느냐가 중요하다.
오늘 교회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각도가 아주 중요하다. 우리 교회를 보는 것도 어느 각도에서 보면 이단이고, 어느 각도에서 보면 정통 중의 정통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자유주의이고, 어느 각도에서 보면 보수주의 중의 보수주의이다. 오직 예수뿐이므로 보수적이다. 또 어느 각도에서 보면 아주 자유주의이다. 나도 내 자신이 자유주의인지 보수주의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를 정의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자기들이 보고 나를 자유주의자라느니 이단이니 하니 나도 이단인지 정통인지 잘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데 자기들이 안다는 것이다.
영적 각도는 영적이어야 되고, 영적 각도는 그와 하나여야 된다. 그래야 되지 다른 방법이 없다. 하나가 아닌 이상 각도가 다 틀린다. 크고 높은 산으로 가서 새 예루살렘을 보게 되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우주를 말하고, 새 우주의 중심은 새 예루살렘이다. 이 말을 다르게 말하면,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우주는 우리자신이기도 하고, 우리자신을 포함하기도 하고, 우리가 그의 구성원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우리의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그분의 신부이고, 그분의 아내이고, 그분의 배필이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인생의 중심이다. 우리가 믿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모든 것의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분과 하나 되는 것, 그분의 배필이 되는 것, 그분의 돕는 자가 되는 것이 중심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렇게 머나먼 길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때를 따라서 택정하시고 때를 따라서 적절하게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셔서 과정을 거쳐서 당신의 배필이 되게 하도록 이렇게 배려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놀라운 경륜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전에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자였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을 데로 가던 사람들이고 우리는 결국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이르자고 하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를 새 예루살렘 안으로 이끄시고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적고 비록 우리가 어리고 비록 우리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한 목표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의 경륜의 최종적인 목표를 이상(異像)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이상을 보고 이 이상을 따라서 가기를 원하고 또 온 세상에 이 이상을 전파하기를 원하고 우매한 사람들에게 모르는 사람들에게 속은 사람들에게 이 이상을 분명하게 우리가 전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