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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구 분 | 광주정씨 정응규 | 온양정씨 정응규 |
1508년 6월 | 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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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1년 |
| 생 |
1533년 | 무과(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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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 | 장흥부사(종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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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 훈련원 첨정(종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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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 |
| 문과(23세) |
| 통정대부(정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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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6년 | 가덕진첨사(종3품) | 26세 |
1560년 | 전라좌수사(정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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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2월 10일 | 경기도수사(정3품) | 33세 |
1563년 4월 1일 |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을 미리 정하여야 함. 정응규(鄭應奎) 등은 모두 피초(被抄)된 사람으로서 지금 파직 상태이므로 군직을 붙여 명령을 대기토록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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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3년 6월 18일 |
| 33세, 형조정랑(정5품) 사헌부로부터 탄핵 |
1564년 | 경원부사(종3품) 불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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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 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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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년 |
| 41세, 창원부사(昌原府使) |
1574년 |
| 안동부사(安東府使) |
가덕진은 부산과 경상도 거제도 사이의 있는 수군군진으로 왜구의 방어에 중요하다. 전문무관직으로서 경험이 풍부하여야 한다. 수군절도사 역시 전임 무관직으로서 문관이 겸임하거나 전임할 수 없다. 수사 임기는 주로 1년으로 운용되었으며 당시에는 서해, 남해에 왜구가 창궐한 때이므로 더욱 그러하다.
온양정씨 정응규는 1531년에 출생하여 1553년에 23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56년 가덕진첨사 임명 시에는 문과급제 후 3년이 지난 26세에 불과하고 가덕첨사는 종3품 직책이므로 본인의 직책이 아니다, 1563년 2월의 경기수사 직은 정3품 전임무관직으로 온양정씨의 경우 33세이고 급제 후 겨우 10년 경과시점이다.
온양정씨는 명종실록에 1563년 6월에 형조정랑의 정5품 직책을 수행 중이었고 공무 해태로 사헌부 탄핵을 받았다. 2월에 경기수사 정3품직을 수행하다 갑자기 정5품 정랑 직책에서 탄핵되었다는 것은 동일인이 아닌 다른 동명이인이 있다는 것이며 논리적으로서 형세를 살펴보아도 어불성설이다. 이 분이 41세 나던 1571년에서야 창원부사에 제수되었다.
광주정씨 서해공은 족보기록과 왕조실록 기록이 물이 흐르듯 일치하고 자연스럽다. 1560년 전라좌수사 제수이후 1564년 두만강변의 요직인 경원부사에 다시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부임치 않으셨다. 그렇다면 1563년 경기수사는 왜 족보기록에 없는가? 제수되었으나 병이 생겨 부임치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동월 6월 명종실록의 조방장 및 방어사 대기 기록을 보아도 불부(不赴)로 인한 파직(罷職 : 직책에서 물러남)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하여 볼 때
왕조실록에 있는 동명이인의 온양정씨는 문관으로서 1563년 6.18자 형조정랑이고, 1556년의 가덕진첨사와 1563년 2월의 경기수사는 광주정씨 서해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역대인물자료는 무과 출신의 동명이인이 있음을 간과하였기에 이렇게 논리에도 맞지 않는 기록을 게재하게 된 것으로 수정되어 바로잡게 해야 할 것이다.
< 이력이 새겨진 묘갈문 >
- 이력은 이 묘갈문에 근거하였다. 다만 경기도수사 이력은 없다.
- 묘비 수립일 : 숭정3년(1631년) -> 흐릿해서 다시 확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