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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교 안암교당 원문보기 글쓴이: 순명부처
□ 원기 93년 9월 6일 청년 초대법회
□ 김제원 교무님 설법
# 설법에 앞서, 주의깊은 경청 부탁
반갑습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도 반갑습니다.
대학교 강의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수님이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업시간에 어느 사람이 옆사람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이 그 학생을 보고 “어이, 학생, 옆에 있는 학생보다 내가 나이가 많거든. 나한테 물어보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무엇이라고 하였을까요.
생뚱맞게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봤는데요” 하였다고 합니다.
교수님한테 물어볼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오늘 이 시간에 제가 35분 정도 짧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옆 사람에게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보는가 하는 것은 끝나고 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순전히 처음 오신 분들을 위해서 설법하려고 합니다.
기존에 계셨던 분들도 그런가보다 하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드릴 말씀은 양이 상당히 많습니다.
방송에서 몇 달간 설법한 것을 30분만에 한 것입니다.
그러면 말을 빠르게 마구 할까요.
실력이 있는 분은 재료만 주어도 음식을 잘 만들어냅니다. 실력있는 사람은 시간 탓하고 환경 탓하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실력이 있는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 오늘의 설법주제 :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특징
오늘 제가 설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조그마한 안내 책자 받으셨지요.
여기에 사진이 하나 나오지요. 겁나게 잘생긴 양반이 하나 나옵니다. 이 분들을 보시고 실제로도 많은 여자분들이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설명드릴 것은 원불교에 갔더니, 원불교는 무엇을 믿는가, 원불교와 불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원불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것을 어떻게 다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 중에 몇 가지를 잡아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셨습니다.
(1) 신앙의 대상인 법신불 일원상
첫째, 원불교에 딱 갔더니 동그란 일원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불자가 우리 교당에 찾아와서 “부처님은 어디있소” 하였습니다.
앞에 보니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이 부처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모셔져 있는 부처님이 없으니 그냥 가버리고, 한 사람은 다행히 제가 설명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부처란 마음이라는 것이 부처인데, 그 마음을 깨친 양반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그 석가모니 부처님을 불가에서 형상으로 모신 양반이 불상이요,
우리 원불교에서는 형상인 불상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치신 심체, 마음자리를 여기에 모셨다“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종교가에 가보면 모든 신앙의 대상이 의인화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상으로도 사람같이 하였고, 표현도 사람이 감싸주듯이, 사람이 말하듯이 해 놓았습니다. 부처님이나 하느님이 마치 사람처럼 이렇게 저렇게 하였다고 기도문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을 의인화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심체 당체를 그대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다만 일원상을 모신 것은, 진리라는 형상, 진리의 사진을 똑 찍어서 보았더니 둥그렇게 생겼다고, 굳이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 당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2)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
또 하나는 법신불 일원상을 수행의 표본으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자, 기독교에 갔다고 합시다.
기독교에는 예수님이라는 신앙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수행의 표본은 없습니다.
자, 이번엔 도가에 갔다고 합시다.
노장사상에서는 수행에 대한 이야기는 잘 갖추어 놓았지만 신앙의 대상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불교에 왔더니 일원상을 둥그렇게 모셔놓고 이 양반이 신앙의 대상이며 수행의 표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원상을 바라볼 때 한편으로는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받들고, 또 한편으로는 수행의 표본으로서 내가 닮아갈 대상,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실제로 바라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3) 신앙과 수행의 길을 두루 갖춘 원불교
그래서 신앙과 수행의 길을 두루 갖춘 원불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일원상
- 신앙(外) : 위력, 우주 만유의 본원
- 수행(內) : 속성, 제불 제성의 심인, 일체 중생의 본성
2. 원불교의 신앙 : 신앙의 대상을 일체 우주 만유에 두었습니다.
(1)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 부처님, 법신불 일원상은 같은 분!
자, 좌측에 보면 신앙이라고 썼습니다. 우측에 수행이라고 썼습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는 유일한 신이 신앙의 대상으로서, 나에게 복도 주고 죄도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신앙의 대상으로서는 하느님이나 부처님, 법신불 일원상이 다 똑같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름이 다를 뿐이지, 사실은 다 같은 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가장 위력적인 대상을 신앙하는데, 그 위력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자 생각해 봅시다.
봄이 오게 하고, 여름이 오게 하고, 내가 태어나서 죽게 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어떤 사람은 잘나고, 어떤 사람은 못살고, 어떤 사람은 벼락을 맞고 다른 사람은 돈벼락을 맞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위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신앙합니다.
왜 내가 잘살거나 못살며, 건강하거나 허약하며, 왜 이러한 인연을 만났으며, 이렇나 가정에 태어났는가!
이러한 것을 정해준 가장 근원, 뿌리, 위력있는 대상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하여 가장 근원, 뿌리, 위력있는 대상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력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불교도들은 부처님에게서 위력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공을 드립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위력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원불교에서는 신앙에 있어서 수평적 관계로,
아무리 하찮은 존재에게도 위력이 있다고 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우리 원불교에서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저 일원상은 우주 만유 일체의 근본 뿌리로서
여기에는 일체 만유 우주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원불교에서는 그 위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일체 우주 만유가 신앙의 대상인 것입니다.
과거에 어떤 신앙도 수직적인 관계의 신앙입니다.
저 위의 하느님이요 저 위의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원불교에서는 나의 죄복의 권능있는 부처님은 내가 만나는 대상 대상이라고 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누가 돈 벌어줍니까. 하느님입니까 부처님입니까.
물론 두 양반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손님이 벌어주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저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원남교당에 근무할 때인데요, 아침 9시 반쯤 되었을 때, 초인종을 소리가 나서 보니 술이 고주망태가 된 어느 아저씨가 저에게 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저씨~! 아침부터 술먹고 뭐여 이거~ 술먹고 오시오” 하고 쫓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무님이 우체국에 갔다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막 나가서 우체국을 향하여 살살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뒤에서 나를 발로 차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저는 맞은줄도 모르고 맞아버렸습니다. 그대로 무릎을 꿇으면서 넘어졌습니다.
마침 제가 그 때 비싼 옷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비싼 양복이 구멍이 나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고 얼른 보니 아까 숡먹은 아저씨였습니다
나에게 구박을 받고 화가 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대상을 저 위의 높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거기에 불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까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사람, 인생의 처진거리 같은 사람도 함부로 하였더니 그 사람이 나의 양복구멍을 내게 하고, 잘못하면 제가 허리를 다칠 수도 있는 권능을 행사한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더 원한을 품고 우리 교당에 불을 질러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불교 신앙의 핵심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만나는 그 대상이 아무리 하찮은 사람, 아침부터 술을 먹고 구걸하러 온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죄복의 권능을 주는 위력적 존재라는 것, 이것이 원불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수직적 신앙에서 수평적 신앙으로 아울러서 이야기한 신앙의 관계가 바로 원불교 신앙의 대상으로서 일원상입니다.
(4) “바로 여러분이 신앙의 대상이며 하느님입니다”
여러분 괜찮지 않습니까. 어디에서 이런 소리 들어보셨습니까.
쉽게 말하여 여러분들이 신앙의 대상이요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한번 옆에 앉은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나무로 금으로 만든 것이 부처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옆에 앉은 사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에이~ 마음을 쓰는 것은 보니 부처가 아니던데?”
(5) 뿌리가 부처님이면 그 삶은 결국 부처님, 전체 신앙을 하는 원불교
부처님은 두 가지 면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기분이 좋을 때 나타나는 부처님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성질날 때 나타나는 구부러진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그 그 구부러진 부처님이 왜 부처님인가. 기분좋으면 그 양반도 잘 하기 때문입니다.
앉아있는 여러분이 착한 일을 했다고 해 보세요. 내가 아주 귀한 사람이 된 것 같고 기분이 좋지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욕심에 끌리거나, 잘 몰라서, 또는 습관에 의해서 악한 일을 했다고 해 봅시다.
내가 하찮게 느껴지고 왜 그랬나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실수하고, 하찮게 느껴진다 하여도
그래도 나는 부처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뿌리가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부처님이면 그 사람은 결국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원불교의 신앙을 전체 신앙이라고 합니다.
내가 좋을 때, 또는 위대한 저 하느님마 신앙하는 장엄신앙, 조건적 신앙, 부분신앙이 아니라
실질적 사실 신앙, 전체 신앙이요, 동시에 개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불교의 원만한 신앙법입니다.
3. 원불교의 수행 : 나의 본래 속성을 그대로 발현하게 하는 수행법
(1)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앙과 더불어 수행도 필요함.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만 있습니까.
실제로 내가 복을 받으려면, 실제로 몸을 거기에 써서 실행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적을 잘 받고 싶으면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공부도 해야 합니다.
세상을 원만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행위로써 외부의 위력을 얻어서 세상사를 살아갈 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내면의 자력을 기르고 닦아서 세상사를 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불교와 원불교에서는 수행의 길을 잘 갖추어 놓은 반면에
기독교는 신앙을 위주로 하여 수행길은 불교보다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수행의 그 원리와 방법, 효과를 자세하게 적어놓았고
특히 출가자 뿐 아니라 여러분처럼 직업을 가지거나 학교를 다니는 재가자도
일상 생활 속에서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쉽고도 자세하게 그 길을 밝혀놓았습니다.
(2) 원불교 수행의 특징은 내 안의 본래 갖추어진 속성을 발현하는 것
그런데 이 수행의 특징은,
나에게 없는 높은 모습을 닦고 닦아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못난 나를 잘난 나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바로, 내 안에 원래 갖추어진 진리의 속성을 그대로 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안에는 저 둥그런 일원상과 같은 원만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원상의 내면에는 다음과 같은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리의 속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원상의 내면, 즉 우리의 속성은 어떤 것인가.
다음의 세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텅 비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원래 텅 비었기 때문에 어떤 마음도 자유자재로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 검은 안경을 쓰고 있다면 색깔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텅 비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온갖 마음이 나올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텅 비었고, 여러분들의 마음도 텅 비어있습니다.
둘째는 훤하게 밝다는 것입니다.
귀신같이 밝습니다.
여러분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발소리만 들어도, 문여는 소리만 들어도 나타납니다.
내 마음ㅇ에 안 좋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광명, 귀신같이 밝습니다. 부처님처럼 밝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훤히 밝습니다.
셋째는 바르고 따뜻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이 바르다, 자비롭다, 사랑스럽다, 은혜롭다, 인자하다라고 하는데
부처님의 본래 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자의 마음자리가 그렇게 텅 비고, 밝고, 따스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마음만 그러한가.
부처님과 같은 우리의 본래 마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분이 좋을 때는
텅 비어서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가림이 없이 훤해서 다 볼 수 있고,
어떤 때는 자기가 생각을 하여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였느냐 하는
멋지고 좋은 생각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특별히 태어나서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지만
마음이 텅 비면 다 밝아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양과 연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분이 좋을 때는 보시도 하고 희사, 봉공도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우리들은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이 좋아하는 것이며, 우리의 본성은 본래 그렇습니다.
일체 중생의 본래의 성품이라는 것은 원래 우리의 마음이요, 그것은 훤하여 귀신같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는 것이 어디까지 아는가.
내 마음의 실체도 알고, 전생사도 알고, 옆사람도 알고, 우주와 일체 생령의 원리까지도 볼 수 있는 눈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어떠죠.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비기는 무엇이 빕니까.
딱 가려서 아무것도 안 보일 때도 있고
성질이 나면 잔인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래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일원상 부처님은 본연의 마음자리이다.
그리고 일원상 부처님은 크게 깨달으신 심법 적공이 들어있는 마음자리입니다.
나도 한번 그렇게 써 보자,
내 마음이 삐뚜러진 마음이 아니라, 내 본래 마음은 원만 구족해서 나라고 할 것도 없이 우주와 하나인 마음인 것입니다.
코미디 프로에 보면 천상 천하 유아독존~! 하고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저 놈이 과연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를 알고 하는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내 마음이 텅 비어서, 밝으면서, 부처님과 같이 훈훈하게 쓸 수 있는 본래의 마음자리가 바로 천상천하에, 어떤 것보다도 짝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코미디 프로를 보고, 아이고, 그 사람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것을 많이 알려라,
그럼 법회 때 내가 설명하겠다~!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4.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을 다 원만하게 신앙하는 원불교
일원상이란 신앙의 대상으로써, 위력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것은 죄복의 권능을 가지고 있으며 누구에게 있는가.
하다못해 금수초목에게도 다 있습니다. 나에게 죄와 복을 줍니다.
화분에 조금만 신경을 써 보십시오, 잘 큽니다.
내가 마이크에 무엇을 빼 보십시오. 금방 망가지지 않습니까. 여기에다가도 함부로 하는가 안 하는가에 따라서 죄복의 권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집에 있는 자녀들, 형제들, 내 며느리까지.. 함부로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고서 절이나 예배당 가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이란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진리 뿐 아니라 보이는 일체의 대상이 함께 하여야 그것이 제대로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과 보이는 세상이 다 있습니다.
음부 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기도를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양 시대가 되어서 실지로 무엇이 더 주가 되는가, 음부의 기도도 잘 하여야 하겠지만 양가의 보이는 대상 대상에게도 실지로 잘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수능 시험을 보는 사람에게 기도만 하라고 해서 될까요.
저라면, 오늘 저녁에 간절하게 기도하고, 아침에 시험 보기 전에도 “법신불 사은님, 오늘 시험 잘 보겠습니다. 기운 밀어주세요” 하고 심고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미리 준비를 잘 하고, 마음을 챙겨서 모아서 일심으로 시험보라고 합니다.
실질적인 준비가 없이 기도만 잘하라고 해서는 결코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위력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기도의 위력은 대단하지만, 진리 불공 뿐 아니라 실지 불공까지, 보이는 대상 대상에게 다 잘해야 우리가 원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5. 처처불상 신앙과 실지 불공의 위력 : 대종사님 노부부와 며느리 예화
대종사님 당대에, 대종사님께서 산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머무시는데 험한 산에 불공을 드리러 올라가는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두분을 오시라고 해서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더니, 집에 있는 며느리가 너무나 불효를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부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부부가 당연히, “법당에 부처님이 있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합니다.
대종사님은 웃으시면서, 법당에 있는 부처님보다 더 위력이 있는 부처님이 있으니 나를 따라서 해 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집에 있는 며느리가 부처요, 그 부처님에게 불공드릴 그 정성과 시간에, 집에 있는 며느리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종사님께서 직접 지도를 해 주셨습니다.
며느리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물어서, 비단과 꽃신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시장에 가서 갖다주라고 합니다.
실제로 노부부가 그렇게 했더니 며느리가 어떻게 생각하였겠습니까.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갑자기 미치셨나. 돌아가시기 전인가 보다” 하였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이가 안 좋은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갑자기 장에 가서 비단과 머리핀을 사다 주니 놀랍고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노부부가 다음에 대종사님께 드렸더니, 대종사님께서는 이번에는 손자들 선물을 사다주라 지시를 내립니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보고 갸우뚱하며 의아해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차츰차츰 계속 불공을 하다 보니,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매우 잘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노부부는 너무나 좋아서 대종사님에게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못된 며느리가 부처라는 말씀을 듣고 갸우뚱 하였는데, 실지로 그 말씀을 듣고 해 보니 정말로 며느리가 변했고, 우리 가정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변화와 희망을 찾아서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그 시간은 진리적 신앙이요 사실적 신앙, 실질적 신앙, 효과있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바로 대종사님은 신앙의 대상 일원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6. 마음 수행의 힘 :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마음을 잘 쓰는 공부
(1) 일체유심조 : 마음을 잘 쓰려는 수행
그리고 일원상 우측의 수행, 이 수행은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을 잘 쓰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엇이 만들어내는 것입니까.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다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2) 한 마음의 차이가 모든 것의 차이를 만들어냄
왜 재미있는 연속극을 보면 1시간이 10분 같고, 좌선을 하면 10분이 1시간 같을까요.
왜 같은 설법시간에 교무님 말씀을 듣고, 어떤 사람은 교무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고 기쁘게 듣는 반면에, 어떤 사람을 너무 지루해 하면서 화장실에도 갔다오고 전화도 받고 할까요.
그것은 한 마음의 차이입니다.
설법을 재미있게 듣는 사람의 마음 속에는, 저것이 무엇일까 하는 까닭이 있고,
재미가 없는 사람은 까닭있는 마음, 변화를 갈구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설법하는 교무가 하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가, 들어볼 만한가,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출가하여 저런 말을 할까, 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차이입니다.
그 마음은 참으로 묘하여 10분이 1시간이 되기도 하고 1시간이 10분 되기도 합니다.
그 소중한 것이 마음입니다.
여기에 온 사람은 마음은 콩밭에 있는데 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마음이 그래도 한번 누가 가자고 하니 가볼이거나 하고 오신 분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가자 하니 몸이 따라온 것입니다.
(3) 마음 자리를 모르고 현상 세계에 정신을 빼앗겨 나타나는 마음의 병들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서울대 공대생들의 상당수가 약간 정신적인 질환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그것은 이 마음이 욕심 세계에 보이는 현상세계에 너무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안의 텅 빈 마음은 있는줄도 모르고, 찾아갈줄도 모르고, 현상 세계에만 정신없이 쫓아가다 보니 이것이 콘트롤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신분열증, 강박증, 우울증 조울증이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비울 자리에 비우고 본래 마음 자리를 회복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4) 육신은 유한하나, 마음은 불생불멸
육신은 유통기한이 몇 년 되지 않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면 햇빛도 못봅니다.
길어보았자 7~80년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원래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생이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은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고, 생긴 바도 없고, 멸할 바도 없는 불생불멸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불샐불멸한 마음이 들어서 모든 것을 조종합니다.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묻고 싶으면 묻고, 교당도 오고 싶으면 옵니다.
(5)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찾으려 한 이유 : 내 근본자리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므로
그렇다면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은 본래는 어떤 것인가.
정말로 우리의 마음은 어둡고 효과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밝고 위력있는 것인가.
이 마음을 알기 위해서
역사를 거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구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고, 좌선하고, 염불하기도 하고 요가를 하기도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마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찾아서 나의 근본자리로 갈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마음을 비우고 맑히고 가라앉혀서 그 고요한 마음의 세계, 내 근본자리로 갈 때에 우리는 가장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마음 공부를 하다 보면, 불면증 우울증 강박증 다 해결이 됩니다.
(6) 마음을 잘 알아서 닦으면 -> 마음의 힘이 길러져서
->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내 인생을 진급의 길로 전환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잘 알아서 닦으면 마음의 힘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실제로 쓸 때 무엇을 할까 말까 할 때 마음의 힘을 내게 됩니다.
시험 공부를 해야 하는데 텔레비전을 보게 되고,
엄마에게 성질을 안 내려고 하는데 성질을 내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은 다 마음의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불교는 이 마음의 비우고 잘 알아서 잘 쓰는 그러한 공부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살고,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음이며,
내 마음의 실지를 알아서 잘 키우고 잘 쓰는 공부가 원불교 공부입니다.
누구나 마음을 알면 부처가 될 수 있고 내 인생을 대 전환으로써 유턴할 수 있습니다.
터닝포인트로 바꾸어서 부처의 길로 진급의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시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례법회방과 화요공부방 후기 게시판에 가시면 더 많은 교무님 설법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