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고장 강릉(江陵)
<6> 허균·허난설헌(許筠·許蘭雪軒) 기념관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허난설헌 생가(복원) / 난설헌 동상
강릉 초당동(草堂洞)에는 허균·허난설헌(許筠·許蘭雪軒) 기념관과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난설헌(蘭雪軒)은 강릉에서, 동생 허균은 사천진리(沙川津里)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 균(筠) 생가터인 애일당(愛日堂)이 있고 남매가 실제로 자란 곳은 이곳 초당이며, 마을 이름 초당(草堂)은 난설헌 아버지인 허엽(許曄)의 호(號)이다.
허균(許筠)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가로, 기념공원에는 홍길동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난설헌(蘭雪軒)은 아명(兒名)이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고 호가 난설헌인데 뛰어난 여류작가로 그녀가 쓴 한시집(漢詩集) ‘난설헌집(蘭雪軒集)’이 중국과 일본까지도 이름을 떨쳤으니 강릉은 신사임당(申師任堂)과 더불어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곳으로 우리나라 여류작가들의 성지(聖地)라고 할 수 있겠다.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시재(詩才)를 보였던 난설헌은 23세 때, 자신은 스물일곱(27세)이면 죽을 것을 예견(豫見)하고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라는 시를 쓰는데,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 홍타월상한(紅墮月霜寒) -부용꽃 3·9타래 / 붉은 꽃 떨어지니 달빛만 차갑도다.’...
난설헌은 자신의 예견대로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한다. <三九朶(삼구타)는 3☓9=27, 즉 27세를 가리킨다.>
난설헌은 오언고시(五言古詩) 15수(首), 오언율시(五言律詩) 8수, 칠언고시(七言古詩) 8수, 칠언율시(七言律詩) 13수, 오언절구(五言絶句) 24수, 칠언절구(七言絶句) 142수 등 총 200여 수의 시작(詩作)을 남겼는데 그중에서 도교사상(道敎思想)을 바탕으로 하는 신선시(神仙詩)가 128수나 차지한단다.
그녀가 7세 때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보면 그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데 광한전(廣寒殿)은 도교(道敎)에서 달 속에 있는 전각(殿閣)을 가리킨다.
전남 남원(南原)에 있는 춘향과 이도령이 만났던 광한루(廣寒樓)도 그것이다.
그 상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抛梁東 曉騎仙鳳入珠宮(포양동 효기선도입주궁)
-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를 올리세. 새벽에 봉황 타고 진주 궁궐에 들어가
平明日出扶桑底 萬縷丹霞射海紅(평명일출부상저 만루단하사해홍)
-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네. <下略>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에 가면 집안의 내력과 함께 큰아들 봉(崶), 난설헌의 동생인 균(筠)과 난설헌의 불우했던 시집살이와 요절(夭折)한 배경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다.
난설헌의 아버지인 양천허씨(陽川許氏) 허엽(許曄)은 정실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와의 사이에서 장남 성(筬)과 2녀를 두었고, 한씨(韓氏)와 사별한 후 후처(後妻)인 강릉김씨(江陵金氏)와의 사이에서 2남(崶, 筠) 1녀(楚姬)를 두어 모두 6남매인데 이 중 아들 셋(筬, 崶, 筠), 그리고 초희(楚姬)와 아버지 엽(曄)까지 다섯 명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서 ‘허씨오문장(許氏五文章)’이라는 칭호를 들은 문장가 집안이다. 그러나 허균(許筠)이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역모에 연루되어 광해군에 의해 참수되면서 집안이 몰락하게 된다. 그로 인해 아버지 허엽의 산소까지 파묘(破墓)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風飛雹散)되었는데, 훗날 수습되어 가족들 산소가 서울에서 경기도 용인(龍仁)으로 옮겨져 가족 묘원(墓園)이 조성되어 안장되었다.
봉(篈)은 금강산으로 가다가 객사(客死)하고 난설헌은 27세에 요절, 막내인 균(筠)은 역모(逆謀)로 참수... 비극적인 가족사(家族史)이지만 초당에 허균·난설헌 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집안의 명예를 되찾게 되었고 그들의 자랑인 허씨 오문장(許氏五文章) 비석도 기념공원에 줄을 맞추어 서 있다.
부연(敷衍)으로, 강릉 초당(草堂)이라 하면 언뜻 생각나는 먹거리로 초당두부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처가(妻家)가 강릉 송정동(松亭洞)으로, 초당의 옆 동네인데 70년대 결혼 초에 처가로 가면 장모님께서 ‘두부를 만들어 줄 테니 바다에 가서 바닷물을 길어오라’고 하셨다.
양동이를 들고 송정 해변으로 나가 바닷물을 길어오면 두부를 만들 때 콩물을 엉키게 하려면 보통 간수(소금에서 녹아 나오는 짠 물)를 쓰는데 장모님은 바닷물을 간수 대신 사용하셨다.
바닷물을 부으면 간수를 부을 때보다 엉키는 것이 더디지만 만들어 놓으면 두부가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다. 이 두부가 ‘초당두부’로, 지금도 초당두부 식당에서는 간수를 쓰지 않고 파이프로 바닷물을 끌어다 간수 대신 쓴다고 한다.
이 초당두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 바로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許曄)으로, 호가 초당(草堂)이다.
<7> 화부산(花浮山) 흥무왕사(興武王祠)
흥무왕사(일명 화부산사) 입구 강모문(講慕門) / 김유신 장군 기적비(紀積碑) / 영정각(影幀閣)
강릉 시내의 대표적인 산(山)인 화부산(花浮山)은 봄이 되면 글자 그대로 꽃이 만발하여 꽃밭(花)이 하늘에 떠(浮) 있는 모양이 된다. 이 지역은 주로 벚꽃이 많은데 산을 넘으면 곧바로 경포호(鏡浦湖)가 되고 호수 둘레에도 벚나무가 가는 곳마다 들어서 있어 매년 봄이면 온통 꽃밭을 이루는데 우리나라에서 진해군항제 벚꽃축제가 유명하지만 매년 4월 초에 열리는 경포 벚꽃축제도 그에 못지않다.
화부산에는 신라 김유신(金庾信) 장군을 신주(神主)로 모신 사당인 흥무왕사(興武王祠), 일명 화부산사(花浮山祠)가 있는데 무형문화재 57호로 지정(指定)되어 있는 사당(祠堂)이다.
이 흥무왕사(興武王祠)는 신라 때 북방 오랑캐인 말갈족(靺鞨族)의 침입이 잦자 김유신 장군은 이곳 화부산 기슭에 진영을 설치하고 말갈족을 막아내었으며 뒤이어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위업을 달성한다. 金庾信(김유신) 장군은 태종 무열왕(武烈王) 김춘추(金春秋)를 보필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자 왕족이 아닌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왕(王)이라는 호칭을 하사(下賜)받는데 바로 흥무왕(興武王)이다. 김유신 장군이 말갈족을 막기 위해 화부산 기슭에 진영(陣營)을 설치하였던 곳에 사당을 지은 것이 현 흥무왕사(興武王祠), 일명 화부산사(花浮山祠)이고 매년 5월 단오제에는 이곳에서 제(祭)를 봉헌(奉獻)한다. 강릉시와 강릉향교에서는 별도로 매년 11월에 유림(儒林)과 후손이 흥무대왕추향대제(興武大王秋享大祭)를 봉행하는데 전폐례(奠幣禮),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籩豆), 망료례(望燎禮) 순으로 진행된다.
참고로, 전폐례(奠幣禮)는 신주(神主)에 세 번 향을 올리고 폐백을 올리는 절차, 철변두(撤籩豆)는 제례가 끝나고 그릇을 덮는 절차, 망료례(望燎禮)는 제문 등 제례에 사용하였던 것들을 태우는(燒祭) 절차이다.
흥무왕사로 들어가면 강모문(講慕門), 통일문(統一門), 화랑문(花郞門)을 거친 후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이 있고 경내에는 장군의 생애와 공적을 적은 ‘순충장렬흥무왕화산재기적비(純忠壯烈興武王花山齋紀蹟碑)’도 있다.
강릉에서 주문진 쪽으로 가려면 화부산 고갯길인 임영(臨瀛)고개를 넘게 되는데 예전 보통 이민고개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2009년 강릉시가 이 고개 이름을 ‘이명고개’로 표지석(標識石)을 바꾸어 세우면서 조금 말썽거리가 되었다.
원래는 근처 교동에 있었던 고려시대 건축된 객사인 임영관(臨瀛館)에 연유하여 붙인 이름으로 모두 알고 있었는데 향토사학자(鄕土史學者)인 김기설이 ‘고려 충숙왕 때 박징(朴澄)이 중건한 사찰 염양사(艶陽寺)가 이곳 골짜기에 있어 『염양고개』라 부르다가 『여명고개』, 『이명고개』로 변했다.’고 하여 ‘이명고개’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니....
글쎄 어느 것이 진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