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 기해박해 때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그리고 188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 성 최형 베드로 그리고 홍봉주 토마스 등이 얼마간 암매장됐던 곳이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한자로는 와고개(瓦署峴)로 알려져있다.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던 와고개 또는 왜고개에서는 서울 명동 성당과 중림동 성당을 지을 때 사용했던 벽돌도 공급해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맞이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조선 교회는 또다시 목자 없는 양 떼 신세가 됐다. 그 후, 30년 만인 1831년 조선 교구는 중국 북경 교구로부터 독립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와 함께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들 성직자들은 외인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상복 차림으로 변장하고 먹을 것도 여의치 못한 채 험한 산길을 걸어다니며 전국 각지의 신자들을 찾아 다녔다.
제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 전파에 힘쓴 결과 이들은 입국한 후 불과 1년 만에 신자가 9천여 명으로 늘어나는 성과를 얻는다. 방인 사제 양성을 의해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등 세 소년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는 한편 정하상 등 네 명의 열심한 신자들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신부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 모두 이 때의 일이다.
앵베르 주교는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이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자 수원에서 가까운 어느 교우집에 몸을 숨겼고, 여기서 그는 다른 두 신부에게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당부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하고 임지로 돌려보낸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로 인해 이들의 거처가 알려지고 포졸들이 들이닥친다. 앵베르 주교는 화가 여러 교우들에게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잡힌 몸이 되는 동시에 동료 신부들에게도 스스로 자수해 순교할 것을 권했다.
이리하여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면서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새남터에서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된다. 이들이 곤장을 맞고 팔을 뒤로 결박당한 채 형장으로 끌려오는 모습은 참으로 참담한 대목을 이룬다.
희광이들은 이들의 옷을 벗기고 겨드랑이 밑에 몽둥이를 끼워 처형 장소에 이르러서는 머리채를 모두 기둥에 매고 나서 목을 쳤다. 이 때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사흘 동안 한강변 모래톱에 버려져 있던 이들의 유해는 감시의 눈이 소홀해진 틈을 탄 몇몇 교우들에 의해 스무 날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수습되기에 이른다. 세 성직자의 유해를 거둔 교우들은 시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에 일단 암매장한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유해를 훔쳐 낸 교우들 중 하나인 박 바오로는 자신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에 세 분 성직자의 시체를 다시 안장하고 이 사실을 아들 박순집에게 알려 준다.
박순집은 부친의 뜻을 따라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 및 다른 치명자의 시신을 바로 이곳, 왜고개에 안장한다.
시복을 앞둔 1924년에 무덤이 다시 발굴 되어 이들의 유해는 대부분 로마와 파리외방 전교회 등으로 분배되고 명동 성당에는 현재 그 일부만이 모셔져 있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4호선을 이용 신용산역에서 내려 서울 체신청 직영 우체국(용산 우체국) 쪽으로 나가 우체국 좌측 길을 따라 250m쯤 가면 국방부 후문이 된다. 현재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 왜고개 사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