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에 홍난파는 《처녀촌》이란 단편집을 내면서 그 서장에 〈애수〉라는 제명의 곡보를 실었는데 뒤에 김형준이 가사를 붙임으로써 가곡 〈봉선화〉가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만인의 심금을 울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당시 김천애(金天愛)라는 소프라노 가수가 있었다. 그는 1930년 후반 일본의 무사시노(武藏野)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1942년 봄 동경의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신인 발표회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선발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보내준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 섰다. 예정된 노래를 부르자 앙코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에 답해서 그는 가곡 〈봉선화〉를 부른 것이다. 청중석의 교포들은 너무도 감격하여 모두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난 후 분장실로 달려간 교포들은 그를 붙들고 울어 흰 치마저고리가 눈물에 젖었다고 한다. 그후 귀국한 김천애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가면서 소복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고 이 노래는 곧 전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봉선화 울밑에선 봉선화야 /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 너를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 네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 너의혼이 예있나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 환생키를 바라노라.
이 시는 초라한 초가집 쓸쓸한 울타리 밑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도 한여름 내내 빨갛게 피어 있는 봉선화의 이미지를 뚜렷이 부각시키면서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민족의 의기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이 가사의 제1절에서는 봉선화가 성하(盛夏)의 시절에 아름답게 꽃을 피우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제2절에서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의 처량한 모습을 읊었다. 일제의 모진 침략으로 쓰라림을 당한 조국의 비운을 가을에 지는 봉선화에 비유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곡 〈봉선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2004. 3. 10., 이상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