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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의 행적을 따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을 당한 후 그의 많은 제자들이 기독교인 박해의 칼날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복음전파의 여정을 시작했다.
당시 극에 달한 기독교인 박해로 인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예수의 제자 중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돌에 맞거나, 단두대에서 또는 목이 매달리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당시 그들이 그토록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음미해본다.
오래전에 다녀온 여행인데 여행기를 쓰면서 자료의 빈곤함과 성경의 짧은 지식에 한계를 느낀다.
가급적 성경을 기초로 사도들의 행적에 관한 중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정리해 보았다.
1. 안탈리아 가는 길
안탈리아로 가는 여행길에 찍은 사진이다.
그 옛날 사도바울이 기나긴 여정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하며 기진맥진하여 걸었을 이 길을 버스를 타고 단숨에 달린다.
차창 밖으로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피해 살았던 토굴형 집들이 끝없이 보인다.
암벽 높은 곳에 문이 있는 곳이 많은데, 평소엔 밧줄 사다리를 내려트려 진입하고 적이 습격해 올 땐 밧줄 사다리를 거두어 드린 후 진입하려는 적을 위에서 아래로 공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안탈리아
안탈리아는 성경에 나오는 밤빌리아 해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이며 성경에 쓰여 진 지명은 앗달리아(Attalia)다.
바울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가를 경유하여 안탈리아에서 전도한 후 이곳 항구에서 배를 타고 전도 여행의 출발지인 안디옥으로 귀환했다(행14:24~26).
사도바울은 전도 여행 시 대부분 유대인회당에서 설교를 했다.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교 신자가 목표였다.
당시에는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교가 온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신앙적 논리가 다른 유대교인들을 상대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적지 않은 갈등과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사도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안탈리아 항구는 작지만, 높은 바위 밑에 자리 잡고 있어 풍랑으로부터 안전했으며 아담하고 아름다운 항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디옥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절벽 밑으로 내려가는 바울 일행의 모습이 연상된다.
숙소에서 바라보는 안탈리아 해변의 밤 풍경이 아름답다.
나는 호텔에서 편안히 쉬고 있지만 그 옛날 사도바울은 이 해변에서의 밤을 어떻게 보냈을까 생각해 본다.
3. 히에라폴리스
성스러운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 히에라폴리스는 15,000명을 수용하는 대극장과 교회, 아고라(시장), 신전 그리고 죽은자의 도시라고 불리는 네크로폴리스 등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1988년 유네스코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곳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 역대 로마 황제와 귀족들이 온천을 즐기기 위해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들이 즐기던 대 욕탕 유적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에는 번성기 때 에페소에서 온 사도바울의 영향으로 기독교 교회가 세워졌다.
십이사도 중 한 사람인 사도 빌립은 만년에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 말씀을 전도 하다가 AD 80년경 우상숭배자들의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4. 히에라폴리스 사도빌립기념교회
히에라폴리스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언덕 위에 폐허가 된 고대 건물의 잔재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사도 빌립 기념교회다.
이 건물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만년에 히에라폴리스를 찾아 사역하다가 우상 숭배자들이 던지는 무자비한 돌팔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을 나오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는데,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 이후 그가 숨진 성문 밖 감옥 터에 기념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 교회 중앙 홀은 폭 20미터, 길이 20미터의 정방형이며 AD 5세기 후반에 화재로 손실되고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이 사도 빌립 기념교회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사도 빌립 기념교회는 직경 20미터 중앙 홀에서 사도의 추모행사를 개최했고 그 둘레를 따라 팔각형 모양으로 8개의 기도실이 배치되어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팔각형으로 배치된 구조로 되어 있고, 히에라폴리스의 어디에도 이런 구조의 건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은 사도의 피가 얼룩진 곳으로, 사도 빌립의 히에라폴리스 복음 전파의 처절한 역사가 새겨진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의 땅이 되어버린 유령도시 히에라폴리스의 한 언덕에 그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지금도 빌립 사도를 추모하는 순례 객들의 행렬이 꼬리를 문다.
오늘날 한국 땅에 전해진 그의 복음과 히에라폴리스의 폐허가 된 그의 흔적, 이 두 사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얼까 생각해 본다.
5. 에페소 가는 길
히에라폴리스를 뒤로하고 에페소로 가는 차창 밖의 풍경이 아름답다.
6. 에페소
에페소는 기원전 12세기 이전에 이오니아인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었고 그 후에 그리스와 리디아가 이곳을 지배하였으며, 후에 로마가 마지막으로 이 도시를 지배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 신전이 있던 곳이다.
BC 33년에 로마의 안토니우스와 크레오파트라가 자주 방문한 후 로마에 의해 급성장하였고, 로마는 에페소를 소아시아의 수도로 정하고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수 세기 동안 이곳을 거쳐 간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에페소는 로마제국의 부흥과 함께 인구 25만이 넘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항구가 있는 이 도시는 1,000년이 넘도록 에게해 최대의 상업 도시로 번성을 누렸으나, 훗날 항구에 1km가 넘는 토사가 밀려와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점점 퇴락했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을 당한 후 기독교인 탄압이 극에 달했다.
그로 인해 사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박해를 피해 이곳 에페소로 피난하였으며, 이곳에서 신약전서인 에베소서를 썼다.
지금도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에 마리아의 생가가 있다.
이곳은 사도 요한의 유해가 안치된 요한 교희가 있고, 마리아 기념교회와 누가의 묘가 있으며 사도바울의 불타는 선교 활동이 지금도 느껴지는 기독교 성지다.
사도바울은 이곳에서 포교 활동을 27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였으며, 사실상 3차 전도 여행의 주 무대가 에페소였다.
7. 에페소 누가의 묘
에페소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 풀밭에 폐허가 된 건물의 잔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불멸의 복음서를 쓴 누가(빛을 주는 자 라는 뜻)의 묘다.
인류를 구원할 복음서를 쓴 그의 명성과는 달리 그의 묘는 황량한 벌판에 방치되어 바람 소리만 쓸쓸하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성지다. 이곳은 누가의 체취가 감도는 곳으로 사도 바울과 함께 에페소 복음전파의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의 땅이 되어버린 폐허 속에 그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1860년 영국 고고학자 T. J. WOOD가 오데이온을 발굴하던 중 귀가하던 길에 본건물의 일부인 십자가와 황소 그림이 부조된 비석을 보고 누가의 무덤이었음을 판명하였다고한다.
건물엔 누가의 묘지임을 말해주는 황소 문양이 부조된 비석이 서 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서 출생한 누가는 바울로부터 감화를 받아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던 의사에서 병든 영혼을 치료하는 사역자로 거듭난다.
누가는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에 동참하여 본격적인 복음 전파 활동을 전개하였고,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동행하며 많은 고난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84세때 감람나무에 목매달려 순교를 당했고 사도 요한이 시무하던 에베소 성 밖 바로 이곳에 안장됐으며 후에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로 이장 했다고 한다.
그가 기록한 복음서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불멸의 진리로 남아있다.
묘지 건물은 이오니아식 건축양식을 따라 16개의 기둥을 세워 16미터의 길이로 건축되었다.
원래 이 건물은 로마 시대 유명 용사나 건강의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이었다고 한다.
8. 에페소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은 에페소의 원형 대 경기장의 일부를 훼손하여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인 박해의 시절,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로마인들에게 많은 기독교인들이 잡혀 와 그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먹잇감으로 던져졌다.
그 후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가 도래하자 한 맺힌 기독교인들이 그 경기장으로 달려가 대리석을 부수어 이 박해의 문을 세웠다고 한다.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그렇게 했을까 쉽게 짐작이 된다.
9. 성모 마리아 생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임종하기 직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마리아와 요한을 향해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요한을 향해 "이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말하고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했다.
그 후 요한은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 에페소로 건너와 지금의 쎌축성안에 정착하여 평생 동안 마리아를 보살피며 살았다.
지금도 에페소의 산 중턱에 성모 마리아의 생가가 있다.
10. 에페소 사도요한 기념교회
사도 요한은 야고보의 동생으로 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어부였는데, 어느 날 두 형제가 게네사렛 호수에서 배를 타고 그물을 손질하던 중 홀연히 예수를 만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야심이 큰 사람들이었다.
하루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예수께 간청하기를 자기들을 예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사도들은 이 형제의 야심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하기를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셨다.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로 피난을 온 요한은 그곳에서 요한복음서를 기술하였으며, 포교 활동을 했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인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고 밧모섬에 유배되는 삶을 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4세기경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는 곳에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고,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 577~565)에 의해 재건축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사도 요한 교회는 6개의 돔과 130미터 길이의 십자가 모형으로 설계되었다. 이 교회의 일부는 무너진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에페소가 아랍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8세기에 사도 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위 사진의 사각기둥 밑이 요한의 무덤이다.
11. 에페소 성모 마리아 기념 교회
이 건물은 원래 로마 시대 건물로 하드리안 황제 때에 지금의 특수학교 일종인 무세이온(Museion)으로 의학과 과학의 수준 높은 교육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4세기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교회로 전환하여 증축하였고, “성모 마리아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아시아에 건립된 최초의 마리아 교회이다.
이곳에서 431년 200명의 주교들이 모여 제3차 에페소 공회(종교회의)를 가졌다.
이 공회에서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 예수의 어머니다’ 라고 주장한 네스토리안(Nestorian)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로 받아들여졌다.
1967년 교황 바오르6세의 방문으로 마리아 교회와 마리아의 집을 성지로 지정하였다.
12. 에페소 도미티아누스 황제 신전
도미티아누스 황제(81~96년 재위)는 유능하지만 스스로를 ‘신이요 황제라’ 자처하면서 많은 신전을 세워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이를 거부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였고, 사도 요한을 로마로 불러 고문을 가하고 밧모섬으로 유배시키기도 했다.
그는 자식이 없어 아들을 입양했는데 아들의 친부모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잔인한 일들로 인해 가족과 로마 원로원의 미움을 사게 되고, 결국 아내를 포함한 가족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원로원은 네로에 이어 두 번째로 기록 말살 형을 내렸다.
밧모섬에 유배된 요한은 낮에는 노역을 당하고 밤에는 굴속에서 예수의 계시대로 계시록을 집필하였으며 황제가 암살당하자, 그곳에서 풀려났다.
사진 속 두 기둥 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와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의 조각상이 보인다.
13. 에페소 원형대극장
많은 유적지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인 에페소 원형 대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건축된 원형극장으로 2만 5천 명을 수용하는 웅장함을 보였다.
음향 장치가 없는 시대에도 관중석 끝까지 들리도록 한 자연과 지형을 이용한 지혜가 돋보였다.
처음에는 연극 공연장으로 시작했으나 로마제국 시대 후기에는 검투사(Gladiator)들의 투기장을 겸하였다고 한다.
황제와 수만 관중들의 구경거리로 많은 검투사가 이곳에서 사투를 벌이다 죽어갔다.
또한 기독교인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시절 숨어 지내던 기독교인들이 수없이 이곳에 잡혀 와 맹수들의 사냥 먹잇감으로 던져저 처참하게 비명사 한 곳이기도 하다.
박해의 시대가 가고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생존한 기독교인들이 이 극장의 대리석을 뜯어다 요한 교회 입구에 박해의 문을 세우기도 했다.
헤아려 보면 참으로 끔찍하고 소름이 돋는 유적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의 발걸음만이 붐빌 뿐이다.
이곳은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 있는 곳으로 사도바울이 3차전도 여행 중 이곳에 들러 선교하다 에페스의 은 세공장이 들로부터 수난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은 세공장이들은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세공품으로 만들어 팔았는데 사도바울의 활발한 전도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늘어나자, 그들의 수입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은장이 대표 데미트리오는 은장이들과 시민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그의 일행 가이오와 아리스타르코에게 난동을 부렸다.
그로 인해 바울은 로마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에페소 원형경기장에서 일행들의 요청에 따라 하모니카 연주를 해보았다.
25,000명을 수용했던 큰 규모의 경기장으로 무대에서의 숨소리까지 모든 좌석에 들리도록 설계했다는데,
저 관중석 끝까지 내 하모니카 소리가 잘 들렸는지 나는 들어보지 않아 모르겠다.
암튼 일본인 여행객들이 많은 박수를 쳐 주었다.
14. 그리스 히오스섬에서 페리 탑승
그리스의 히오스섬에서 정원 3,000명인 페리호를 타고 아테네의 페레우스항으로 출발했다.
히오스섬은 사도바울이 3차 전도 여행 중 거쳐 간 곳이다. 성경에는 히오스섬이 "기오"로 쓰여있다.
15. 아테네 아레오파고스 언덕
아레오파고스는 신들의 재판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쏘크라테스가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 최고의 학파인 에피크루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학자들을 상대로 설교를 했다.
당시 그리스는 하늘을 향해 머리를 둔 자가 신성을 모독하는 것, 그 자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하는 사회였는데, 그들의 신 아테나가 바로 내려다보고 있는 언덕에서 사도바울이 그리스 최고의 지성들을 상대로 유일신 하나님의 존재를 역설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유대인에 접근하는 방식으론 안 된다. 그들의 지혜를 뛰어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이스라엘 최고 학자 가마리엘의 제자였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가 만연하던 사회에서 최고 교육을 받은 바울이 에피크루스 학파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설교에서 그리스 철학이나 신화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17장 28절의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라는 부분은 크레타의 에피메니데스가 제우스신에게 바친 찬미가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한 설교 방법이 많은 그리스 학자들로 하여금 복음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언덕에서 일부 에피크루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학자들과 끝없는 논쟁을 벌이던 사도바울은 급기야 그들로부터 모함을 받아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신약성경 사도행전 17장 22~31절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재판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리스 정교회는 6월 29일을 사도바울의 날로 정해 아레오파고 언덕에서 매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16.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신전 - 처녀의 집이라는 뜻이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건설된 파르테논 시전은 고대 아테나이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네 여신에 봉헌된 신전이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건축물 중에 가장 중요하며, 도리아식 기둥 양식의 발전에 정점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르테논 신전은 세계문화유산 1호다.
17. 아테네 제우스 신전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제우스 신전이다.
18. 에게해
에게해의 짙푸른 바다 빛이 시리도록 아름답다.
19. 여행기를 마치며
예수의 뒤를 이은 사도들의 험난한 생애가 사진 속 곳곳에서 느껴지는데, 그들은 왜 그토록 처참한 고난의 길을 갔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래대로 돌아가면 그뿐인데 말이다.
의사였던 사람은 병든 자를 돌보는 일로, 어부였던 사람은 고기 잡는 일로 돌아가 편히 살면 되는데 말이다.
선교활동이 무엇인데 목숨까지 바쳐가며 한단 말인가.
어느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당시 사도의 선교목적은 유대인들의 틀 속에 갇혀 있던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대인의 틀 속에 갇혀있는 기독교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던진단 말인가.
기독교가 틀 속에 갇히건 말건 내버려 두면 되는데 말이다.
내 상식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예수님의 헌신적인 인류 사랑의 마음을 닮은 것이다.
그리고 영혼이 곤 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헌신적인 사명감과 신념이 그들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것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된 예수님의 참사랑처럼 말이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는 헌신 없는 종교는 사회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수많은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2018년 10월 8일 양재천변 늙은 열운(洌雲)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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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바빌론의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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