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영원하여라! 5월 3일 제1부 여명(黎明)
창가상승의 원점! 3대회장 취임의 날
- 이케다 SGI회장의 〈수필 신·인간혁명〉 〈수필 인간세기의 빛〉에서 배운다
‘창가(創價)’란
‘승리’의 이명(異名)
하늘이 맑아지면 땅은 밝아지고
활짝 갠 5월 3일.
‘창가’의 두 글자는 ‘승리’의 이명(異名)이다.
3대회장이 취임한 지 ‘46주년’이라는 가절(佳節)을 맞이한 올해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은 승리로 활짝 개어 있다.
이케다 SGI회장은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적었다.
“그날은 아주 활짝 갠 맑은 날씨였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도 활짝 갠 것처럼 밝았다. ‘구원원초’의 5월 3일도 그날과 똑같았음이 틀림없다. ‘그날’이란 바로 3대회장 취임식 날인 1960년 5월 3일이다.
이후 46년 동안 ‘불꽃 같은 대분투의 경애’도 언제나 대청천이었다.
“하늘이 맑아지면 땅은 밝아지고”(어서 254쪽). ‘구원원초의 5월 3일’도 대청천이라는 대신념, 대경애.
스승의 ‘5·3’의 추억을 함께 만드는 벗, 말하자면 ‘구원의 동지’와 함께해 온 추억이다.
‘창가의 ‘5·3’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SGI회장은 말한다.
“‘니치렌과 같이’ ‘니치렌처럼’의 금언대로 광선유포라는 대서원을 내걸고 새로운 분투를 시작하는 날이 바로 ‘우리의 5·3’이다. 대성인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하여 제난(諸難)을 두려워하지 않고 묘법유포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 5월 3일의 영원한 원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날 5월 3일을 새로운 결의로 맞이하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어본불의 대생명이 찬란하게 맥동하고 있다”라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5·3’이란 최초의 출발인 동시에 최후의 완승을 알리는 때다. 이날은 위대한 영혼의 승리와 영광의 최성기(最盛期)를 실현하는 우리의 크나큰 기념일이다.”
‘5·3’에 모든 것이 집약(集約)
도다 2대회장의 취임식 날은 1951년 5월 3일이다.
도다 회장은 사자후처럼 외쳤다. ‘75만 세대의 대절복’과 ‘동양광포’ 달성, ‘불법서환’의 성취, 그것은 “이 세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앤다”라는 열렬한 대선언이었다.
그리고 SGI회장도 1960년 5월 3일 3대회장으로 취임했다.
‘5·3’에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창가문화의 근원이, 평화와 행복의 원천이, 민중 승리의 원리가, 창가의 모든 원점이 여기에 있다.
◆ 당시의 이야기 (아오키 사토루 씨)
‘5·3’이란 학회혼의 불꽃이다. 학회혼의 불꽃이 있는 한 창가는 승리합니다. 전진합니다.
창가의 교육, 문화, 평화 운동을 다각적으로 짊어진 창가의 광채는 세계로 발전했습니다. 190나라·지역으로 넓혀져 선의 연대가 되었습니다.
소카학원, 소카대학교와 도쿄 후지미술관, 민주음악협회(이하 민음), 동양철학연구소, 도다 기념국제평화연구소도 원점은 ‘5·3’입니다.
인류사를 바꾸는 에너지를 발하기 시작한 날. 그것이 ‘창가의 5·3’입니다.
교육의 승리가 인간의 승리
◆ 당시의 이야기 (다시로 야스노리 씨)
소카대학교, 소카학원의 구상도 그 원점은 선생님의 회장 취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학 초창기 선배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회장에 취임하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몇 번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한다는 말에 정말 괴로웠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괴로웠던 것은, 회장에 취임할 경우 창가학회를 훌륭하게 발전시키는 것은 당연합니다. 문제는 그 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미래를 위해 교육에 힘을 쏟자!
‘학원’ ‘대학’을 만들겠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회장에 취임한 가을에 대학 토지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소카대학교가 개학하자 선생님은 곧바로 “이번에는 미국에 소카대학교를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육의 승리야말로 인간 승리다”라는 선생님의 깊이 있는 행동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불법서환의 위대한 선견(先見)
◆ 당시의 이야기 (가와다 요이치 씨)
이케다 선생님이 동양철학연구소를 설립하신 것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던 위대한 사업이었는지 지금에 와서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동양철학연구소의 설립 구상은 선생님의 회장 취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취임식장에서 “팔만법장의 극치는 법화경이다”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은 이듬해 1월부터 아시아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여정 중에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불법서환’을 실현할 수 있을까.
또 “동양광포를 부탁하네”라는 도다 선생님의 말씀에 어떻게 보답할까를 고민한 끝에 동양철학연구소를 설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선생님이 직접 선두에 서서 ‘문명 간의 대화’의 길을 개척해 오셨습니다. 세계 최고봉의 지성과 깊은 우정을 쌓아 오셨습니다.
‘슬리퍼 차림’ 콘서트
◆ 당시의 이야기 (고바야시 히로야스 씨)
민음이 탄생하기 얼마 전 이케다 선생님과 간담회를 했습니다.
“서민들이 ‘슬리퍼 차림’으로 갈 수 있는 콘서트를 열어 봅시다!”
이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민중에 기인한 민음의 ‘창립 정신’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선생님은 수동식 축음기로 베토벤의 명곡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클래식 음악과 무대 공연은 서민과 거리가 먼 이야기였습니다. 일부 부유층 사람들만이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공통의 보물인 최고의 음악을 민중에게 선물하고 싶다’라는 염원으로 선생님은 고난을 이겨 내고, 1963년에 민음을 창립하셨습니다.
윈 국립가극장과 밀라노 스칼라좌의 초대를 “학회와 민음은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그랬지만 선생님은 오페라의 보배 <밀라노 스칼라좌>의 일본 공연을 실현했습니다. 스칼라좌의 바디니 총재는 “이 공연은 이케다 씨의 노력이 없었다면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음이 추진한 윈 국립가극장의 일본 공연의 쾌거도 음악계가 괄목(刮目)했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음악가가 차츰 선생님 주위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민음을 통해 세계 90나라·지역과 대문화 교류라는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
이케다 SGI회장은 〈수필 신·인간혁명〉에 이렇게 썼다.
“내가 걸어온 인생길에 한점 후회도 없다. 학회는 정신적으로 승리했고 언론전에서도 승리했다. 사상(思想)에서도 승리했고 문화면에서도 승리했다. 사회에서 승리했고, 세계 속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교육, 인재에서도 승리했다”라고.
이런 모든 것의 원점은 ‘5·3’에 있다. 사제불이(師弟不二)의 출발이었다.
1960년 5월 3일, 인류사가 바뀌는 역사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3대회장 추대에
시동(始動)
‘청년부는 나와 함께’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시자 ‘학회는 공중분해한다’라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나는 젊은 총무로서 고이즈미 이사장을 지키며, 단결된 힘으로 전진을 향해 지휘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의 3주기인 4월 2일을 앞두고, 이사장을 중심으로 3대회장 추대(推戴)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수필 신· 인간혁명〉
은사가 서거하신 지 2년. 회장자리는 공석이었다. 당시 청년부장이었던 아키야 회장은 그 상황을 〈대백련화〉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 2년간 스승 도다 선생님을 잃었다는 슬픔을 이겨 내고 투쟁해 왔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처럼 정말 슬펐다.
그러나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뒤를 이어 일어서신 분은 이케다 선생님뿐이라는 것을 청년부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 당시의 이야기 (야마자키 히사미 씨)
도다 선생님 서거 후, 학회 단결의 중심자로 모든 승리의 실증을 보이며, 우리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신 분이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청년부는 나와 함께 전진하자.”
이케다 선생님의 확신에 찬 한 마디에 얼마나 기뻤던가!
도다 선생님의 직제자로서 사제의 맹세를 실현하며,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확신에 찬 말이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요시다 겐노스케 씨)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각종 매스컴에서는 “창가학회는 공중분해한다”라며 온갖 중상모략을 할 때였습니다.
1958년 5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제7의 종’을 쳐서 울려라!”고 광선유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말에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구나! 새로운 광포의 길을 열자’라고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어두운 마성을 부수어 주셨습니다.
스승의 말씀이 모든 기준
당시 아키야 청년부장이 청년부를 지휘하신 이케다 선생님의 분투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우리가 무심코 흘려버린 도다 선생님의 한마디 한마디를 전부 가슴에 새겨 사색하고 바로 용감히 실천에 옮겼습니다.
청년부가 도다 선생님의 영광스러운 친위대라는 호칭을 받고, 명예로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케다 선생님이 제자로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 당시의 이야기 (하치야 유미코 씨)
1959년의 일입니다. 저녁에 불과 30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케다 선생님은 여자부와 간담회를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오노승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왜 오노승이 퇴전했는가. 대성인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닛코유계치문>에 적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오노승이 되면 안 됩니다. 학회와 도다 선생님을 배신하면 안 됩니다”라고.
그 의미를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간부들 틈 속에서 홀로 고생하시며,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학회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계셨습니다.
말한 것은 성취한다
회장 취임 직후, 〈대백련화〉에 기타조 히로시 副이사장(당시)이 3대회장에 대해 수상(隨想)을 썼다.
“지금까지 ‘한다’라고 정하고 이루지 못한 것은 없었다. 반드시 이루어 내셨다. 실천 속에서 훈련받은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도다 선생님 곁에는 언제나 이케다 선생님이 계셨다. 가마타 지부 발족 당시, 분쿄 지부의 발전, 오사카의 참의원 선거, 야마구치 투쟁, 오타루 문답, 탄로(炭勞)문제, 청년부의 수많은 고투 등, 열거하면 끝이 없다.
결국 광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하나 같이 중요한 일들이다. 이 모든 활동의 원동력은 이케다 선생님이셨다.”
◆ 당시의 이야기 (시부야 쿠니히코 씨)
상경해서 도다 선생님 댁을 방문한 것은 1955년 가을 무렵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갑자기 “시부야 군, 3대회장이 결정되었다네. 3대가. 알겠는가. 이런 기쁜 일이 또 있겠는가. 자! 축하라도 하자고. 자네도 마셔봐, 함께 축하하자고”라고 하시면서 술을 권하셨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흥겨워하시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제 머릿속에는 이케다 선생님의 웅장하고 선명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 보면 1949년 가을, 도다 선생님이 이케다 선생님을 소개하실 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소개하겠네. 주저하지 말고 나라고 생각하고 사귀어 보게나.”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 도다 선생님과 진정한 사제불이(師弟不二)의 길을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아네노코지 긴츠네 씨)
돌아가신 형수님(아네노코지 에이코 씨)이 살아생전 문집(文集)에 써 놓은 내용입니다.
도다 선생님 서거 후 이케다 선생님이 3대회장에 취임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치가야의 분실(分室)에 도다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으러 갔을 때, 도다 선생님은 “내 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더욱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하고 뛰어난 제자 다이사쿠가 해 줄 것이기 때문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형님 부부는 이케다 선생이 차기(次期) 회장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활동하셨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다다쇼고 씨)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이케다 선생님이 얼마나 결의하고 분투해 오셨는지 알게 된 것은 오사카에 동행할 때였습니다. 출발하기 전 “지금부터는 이제까지 한 것과 다릅니다. 나와 함께 확실히 분투합시다”라는 엄한 말씀이셨습니다.
1959년 봄. 본부 건물 옆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만났을 때 당시 제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을 보고드렸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부가 선두에 서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1956년에 도쿄는 참패했지만 이케다 선생님이 앞장서서 직접 지휘하신 1959년에는 압도적으로 승리했습니다. 저는 “선생님만 계시면 학회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부는 모두 이케다 선생님에게 “하루라도 빨리 회장이 되십시오”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이기는 것이
제자의 증명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는 결과
‘2월 투쟁’의 벽을 부수고, ‘분쿄 지부장 대리’로서 분쿄 지부를 C급에서 A급 지부로 만들며 전국제패(制覇)를 달성했다.
그리고 ‘오사카 투쟁’에서는 11,111세대 절복이라는 금자탑과 ‘설마 했던 일들이 실현된 대승리. SGI회장은 상승의 기세를 탔다. 이기지 못하면 후계의 진정한 제자가 아니다.
“불법이라고 함은 승부를 우선으로 하고”(어서1165쪽)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다 선생님과 한 사제불이의 약속은 당연했지만 조직에서 볼 때 그러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모두 납득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며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없어집니다.
학회의 다음 후계자라는 의미에서 이케다 선생님은 가마타 지부에서 ‘한계의 벽을 부수는 싸움’을 하고, 오사카에서 승리해 ‘제자의 증명’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분쿄 지부를 일본 제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회장이 되신다는 것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결과로서 회장이 되신 것입니다.”(〈대백련화〉 2002년 5월호, 이케다 히로마사 副회장)
◆ 당시의 이야기 (소지 다케히사 씨)
이케다 선생님은 입신하고 2년 뒤인 1949년에 도다 선생님의 출판사 직원이 되어 직장과 학회활동에서 사제(師弟)로서, 부자(父子)로서 도다 선생님과 하나가 되어 분투해 오셨습니다.
니치렌 대성인에게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어서 869쪽) 상수급사하신 닛코상인처럼 누구보다 도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체득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께 결과를 만들어 보답하려고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가마타 지부간부로서, 어떤 때는 분쿄지부 지부장 대리로서, 어떤 때는 제1부대장으로서, 청년부 실장으로서 이케다 선생님이 계신 곳에 학회는 항상 기세 넘치고 번창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하기하라 야쓰 씨)
도다 선생님은 회합에서 “3대회장은 마키구치 문하에게 주지 않겠다. 다음 회장은 도다 문하에서 나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다이사쿠는 훌륭한 남자다. 다이사쿠만 따른다면 틀림없다. 다이사쿠가 하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라고. 그래서 이케다 선생님이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회장이 되시길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우리 쪽에서 부탁만 드리기엔 정말 죄송했습니다. 회장이 되시기까지 우리 간부도 단결해야 했습니다.
1959년, 도쿄에서 참의원 선거로 분투. 제가 입후보를 했습니다. 3년 전에 진 것은 잊어버리고 즐겁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싸움에서 대승리를 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지휘하신 분투는 기쁨이 있고, 감동이 있었습니다. 학회는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개점휴업
당시 개인지도를 받으러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학회 본부를 찾았다. 모두 이케다 총무에게 지도를 받기 위해 온 것이다.
초창기 선배들은 말한다.
“다른 간부도 있었지만 모두 이케다 선생님에게 지도를 받으려 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학회원이 선생님의 회장 취임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본부의 면접지도, 정말 바쁘다. 오는 사람, 장년부, 부인부, 청년부 다수”라고 《젊은 날의 일기》 (1959년 12월 28일)에도 적혀 있다.
◆ 당시의 이야기 (나카무라 요시카즈 씨)
고이즈미 이사장님이 본부 2층 부실에서 회원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이사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이케다 총무가 있는 곳에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2층 부실은 개점휴업이에요. 모두 이케다 총무만 찾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아오키 사토루 씨)
당시 저는 일이 끝나면 거의 매일같이 본부에 갔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저녁까지 1층에서 개인지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부실에는 고민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10명~20명 정도 모여 있었고, 이케다 선생님은 그 사람들에게 명쾌하게 지도를 하셨습니다. 모두 이케다 선생님을 원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니와미에 씨)
초대 고적대 부장이었던 저는 당시 결핵으로 쓰러져, 이케다 선생님께 많은 걱정을 끼쳤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각오로 참석한 여자부 총회.
강당 앞에서 몸을 겨우 가누며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케다 선생님이 곁으로 다가오셔서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결핵을 앓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결핵이라고요, 저도 결핵을 앓고 있습니다. 반드시 잘 될 것입니다. 창가학회의 운명을 같이 짊어지고 갑시다”라며 엄한 아버지와 같이 지도하셨습니다.
그 3년 뒤, 이케다 선생님의 회장 취임식 전날이었습니다. 신주쿠에서 급하게 뛰어 올라 탄 전철 안에서 옆에 앉아 계신 분이 말을 걸었습니다. “건강해 보이시네요.” 저도 얼른 인사를 했습니다. 사모님이었습니다.
사모님은 미소 띤 얼굴로 “남편이 니와 씨의 일을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건강해져서 보기 좋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기원해 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건강합니다.
◆ 당시의 이야기 (소비하라 토시오 씨)
이케다 선생님이 회장이 되시기 1~2년 전의 일입니다. 선생님께 여쭈어 본 적이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수많은 학회원의 서명으로 추대받고 회장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다 선생님은 다음 회장을 어떻게 결정하셨을까요”라고.
저는 “하루라도 빨리 이케다 선생님께서 회장이 되십시오”라는 말이 목전까지 나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선생님은 묵묵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대성인의 불법유포를 위해 홀로 창가학회의 회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을 자각하고 계셨습니다”라고.
이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선생님도 이미 회장이 되실 것을 깊이 자각하고 계신 것이 틀림없다’라고. 저는 기뻐서 ‘만세’라고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결코 지면 안 된다’
중압(重壓)을 한 몸으로
1959년 말 《젊은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도다 선생님의 사후(死後), 학회의 약체와 붕괴를 비웃는 내외(內外)의 적, 날마다 증가.”
“‘동지는 적고 적은 많도다’라는 은사의 노래가 어쩐 일인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1960년 연초(年初)에는 “은사가 돌아가신 지 2년이 흘렀다. 썩고 있는 정신을 막을 뿐”이라고.
사제를 어떻게 지킬까. 학회를 어떻게 발전시킬까.
?SGI회장의 마음고생이 일기에서 엿보인다. 그리고 또 이렇게 적혀 있다.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사색에 사색을 거듭하고 있는 바늘이 멈추지 않고, 아내도 몸을 걱정해서 빨리 쉬라고 한다.”
“오늘 하루도 무리해서 지휘. 학회의 장래도 광포 미래도 나 혼자 책임져야 한다.”
“몸 상태가 아주 안 좋아 괴롭다. 숙명을 타개하는 분투. 결코 지면 안 된다.”
◆ 당시의 이야기 (후루가와 노부코 씨)
이케다 선생님이 오타 구의 고바야시 초에 사실 때, 선생님과 사모님은 제 블럭 소속이었습니다. 선생님이 회장이 되시기 전, 선생님 댁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사모님께 말씀하셨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다이사쿠는 단명(短命)한다. 걱정이다. 걱정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당시 결핵을 앓던 선생님의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항상 학회를 위해, 회원을 위해 선생님은 귀가할 시간도 없이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얼마나 무리를 하고 계실까.
회장에 취임하실 때 본 푹 파인 뺨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건강을 지켜 오신 사모님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런 사실도 전혀 모르고 사모님에게 블럭의 가정지도를 부탁드렸습니다.
사모님은 흔쾌히 함께 블럭에 가 주셨습니다. 200세대였던 블럭을 한집 한집 활동해 주셨습니다. 그때 사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학회는 점점 더 커집니다. 그때는 회장이 직접 회원 한분 한분을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가 회장 대신 달려와야 합니다”라고. 사모님은 제일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
SGI회장은 총무로서 종횡무진하며 지휘를 했다. 인사(人事)에서도 청년을 대대적으로 등용, 새로운 학회건설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단결’을 첫번째 목표로 내걸었다. 이체동심이야말로 전진의 요체이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청년부 간부가 이렇게 말했다.
“회합에는 ‘단결’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선생님이 제안하셨습니다. 학회에서 단결이 얼마나 중요한가! 선생님은 ‘억겁의 신로’를 다하고 계셨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셨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아키야먀 에이코 씨)
이케다 선생님은 회장에 취임하시고 난 뒤, 노고하신 최고 간부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광포의 선진(先陣)에 세우시는 데 마음을 쓰셨습니다.
선생님은 초창기부터 활약하신 대간부 한사람 한사람을 최대한 배려하며 지키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1960년 봄. 상황은 바뀌었다. 학회 본부 안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테오카 쿠라이치 씨가 당시의 일을 수기(手記)로 썼다.
“회장 취임이 결정되기까지 학회 본부는 긴장된 분위기였습니다.
연일 심야까지 기타조 이사장이 신중하고 분주하게 움직이셨습니다.
당시 본부 직원으로서 근무한 우리는 매일 아침, 본부 조례가 열려 훈련을 받았습니다.
기타조 이사장은 한숨도 자지 못해 충혈된 눈으로, 우리에게 호소했습니다.
‘지금 학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스승은 누구인가, 우리가 지도를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 당시의 이야기 (오가와 신이치로 씨)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학회는 분열해서 붕괴한다”라고 매스컴은 크게 떠들었습니다. 우리 청년부는 이를 갈면서 분통해했습니다.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이케다 선생님이 3대회장에 취임을 하셨으면 하는 것이 모든 청년부의 바람이었습니다.
1960년에 들어서 지부장, 부대장이 출석한 회합에서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3대회장 추대(推戴)를 서둘러 주십시오. 3대회장이 되실 분이 여기 우리 눈앞에 엄연히 계시지 않습니까!”
회합이 끝나자 청년부들은 모두 “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을 3대회장으로!
그 기운은 선생님 슬하에서 분투한 청년부들 속에서 들끓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창가(創價)의
발전을 위해서
첫번째 요청
추대에 대한 경과 내용은 〈수필 신·인간혁명〉에 자세하게 적혀 있다.
“3월 3일 오후. 본부 제1 응접실에서 고이즈미 이사장이 나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학회는 더 새로운 발전을 할 수 없습니다. 학회 내부에서 선생님의 회장 취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꼭 올해 5월 3일 총회 때 취임해 주십시오.’
고이즈미 이사장의 심정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단호히 거절했다.
아직 32살. 풋내기라 할 만큼 어린 나이였다.
도다 선생님도 마키구치 선생님의 7주기를 끝내고 회장에 취임하셨다. 나도 하다못해 도다 선생님 7주기까지는… 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오사카 사건의 피고인 신분이었다. 회장이 된다 하더라도 혹시 유죄 판결이 나면 학회에 상처가 난다.
나는 무죄 선고를 받을 때까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 고이즈미 이사장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당시의 이야기 (쓰지 다케히사 씨)
학회 전체 분위기는 “일각이라도 빨리 이케다 선생님을 회장으로”라는 목소리가 팽배하게 들끓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케다 선생님을 우러러 보는 남녀 청년부들의 기세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나는 이사(理事)들 중에서도 젊은 편이라, 그러한 열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케다 선생님에게 부탁한다는 내용에 모든 이사들의 의견도 일치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다 선생님의 3주기인가, 7주기인가,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의 건강과 심정은 어떨까 라는 내용을 이사들 간에 주고받았습니다.
그 결과 4월 7일 저녁, 고이즈미 이사장 댁을 찾아가 3주기가 끝날 즈음 이케다 선생님을 회장으로 추대해 5월 3일 총회 때 회장으로 취임해 줄 뜻을 비쳤습니다. 고이즈미 이사장도 그 시기에 관해 깊이 생각한 뒤 곧바로 찬성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하치야 유미코 씨)
제가 학회 본부에 근무하기 시작한 때는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기 한 달 전이었습니다. 신입사원이었던 저는 선배들이 오기 전에 매일 아침 7시 45분에 출근해 본부 청소를 했습니다.
그 와중에 맨 먼저 도착하는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8시에는 본부 현관에 오셔서 아침 인사를 하시며 모든 직원을 맞이했습니다.
그 모습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자, 싸우자”라는 선생님의 생명력 넘치는 목소리에 마치 학회 본부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2번, 3번째 요청
“이후 4월 9일에 임시 이사회의 결정으로 추대의 연락을 받았지만 정중하게 사양했다.
의사에게서 ‘30살까지 살 수 있을지 어떨지’라는 말을 들은 병약한 나였다.
이날의 일기에는 ‘누군가 피곤에 지친 나 대신에 지휘할 사람이 없을까’라고 적혀 있다.
4월 11일에는 본부 회의실에서 긴급 이사회가 열려 나도 참석했다. 모든 이사들의 바람이었다. 마음은 괴로웠지만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인 12일과 13일도 이사실(理事室)의 대표와 간담을 했지만 나는 사양했다.”〈수필 신·인간혁명〉
◆ 당시의 이야기 (쓰지 다케히사 씨)
고이즈미, 하라지마, 쓰지 세 사람이 4월 7일에 모여 상의한 결과, 다음 날 8일부터 고이즈미 이사장이 다른 이사들에게 먼저 전달한 뒤 모두 다같이 이케다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을 하려고 했습니다.
4월 11일, 정식 이사회가 소집되어 이케다 선생님께 참석을 부탁하여 이사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3대회장 취임에 관해 논의했습니다.
그러나 이케다 선생님은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라며 곧바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날 12일, 이케다 선생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드리자, 선생님은 어제 답변으로 자신의 심경을 말씀하셨다며 회장 취임을 사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7주기까지 늦추면 광선유포는 점점 늦어지고 맙니다. 이케다 총무가 회장에 취임하면 전국에 있는 회원들이 얼마나 기뻐하며 단결된 힘으로 똘똘뭉칠까요”라며 부탁을 드렸지만 선생님은 수긍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후 4시경 본부에서는 이사 전원이 모여 선생님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사 전원이 다시 용기를 내어 이케다 선생님에게 회장 취임을 부탁한다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다음 날 13일, 이사들을 대표해서 고이즈미 이사장이 다시 이케다 선생님을 찾아가 부탁을 했습니다.
이때 이케다 선생님은 또 사양을 하셨지만 간담회를 지속한 결과, “그렇다면 한 번 더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위대한 3대를 지켜라!’
“4월 14일 목요일.
비가 갠 뒤 서서히 맑아졌다. 이날 제1 응접실에서 고이즈미 이사장과 하라지마, 쓰지, 하기하라야스 세 명의 이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장은 거두절미하고 기백을 담아 간절하게 부탁했다.
‘선생님이 사퇴하신다면 광선유포는 점점 더 늦어집니다.’
‘위대한 3대회장을 모든 혼을 담아 지켜라! 3대를 중심으로 나아가라. 그렇다면 광선유포는 반드시 이루어진다. 이것이 도다 선생님의 유언이었습니다.’
‘회장 추대는 광선유포를 바라는 모든 간부의 요청입니다. 받아들여 주십시오.’
이제는 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여러분의 마음이라면……’라고 내가 말을 꺼내자 이사장은 지체 없이 ‘괜찮으시지요! 감사합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시각은 오전 10시 10분.
벽에는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의 사진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 한 사람이 서둘러서 방을 뛰쳐나갔다.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모든 멤버의 기쁨이 파도처럼 일고 있었다.
이사장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내 손을 세게 잡으며 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수필·신인간혁명>
◆ 당시의 이야기 (쓰지 다케히사 씨)
14일, 드디어 이케다 선생님이 승낙하셨습니다. 어떻게 될까 고민했던 이사들은 기뻐하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교수회(敎授會)를 서둘러 본부부장회의로 바꾸어 이 기쁨을 전했습니다.
한편 19일, 긴급 전국 대표간부회의를 본부에서 열어 이케다 선생님의 3대회장 추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자 장내에서 커다란 갈채가 일었습니다.
이 순간 욱일(旭日)이 광포의 지평선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처럼 학회는 전국적으로 급물살을 탔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소네하라 토시오 씨)
도다 선생님의 3주기 법요 때부터 이사회가 자주 열렸습니다. 2년 전에 본부 직원이 된 저는 이케다 선생님에게 회장 취임을 부탁하려는 중대한 회의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본부 사무국장이었던 기타조 이사에게 회의 상황을 바로 들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우리의 스승이다. 틀림없다. 지금이야말로 선생님을 회장으로 맞아야 할 때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부탁할 수는 없다. 제자로서 선생님과 끝까지 분투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분투할 결의가 있는가다”라고.
몇 번이나 회장 취임 부탁을 사양하셨지만 선생님께서 승낙하셨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정말 살아돌아온 듯한 기쁨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들끓었습니다.
세계의 역사를
만드는 분투
광포의 진두(陳頭)에 서다
15일의 《젊은 날의 일기》에 회장 취임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적었다.
“일본의 역사, 세계의 역사를 만드는 싸움이다. … 어부의 아들 이케다 다이사쿠, 드디어 광포의 진두에 서다. 일대사(一大事: 중생을 구하기 위해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난 중대사)의 숙명을 지각(知覺)할 뿐. 제천도, 삼세시방의 부처, 보살도 지켜줄 것이다. 부처의 소작이라는 것을 이번만큼 심각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금세의 중대한 수행을 하게 된 것이 황공할 뿐이다.”
19일, 전국 대표간부회가 학회 본부에서 열렸다. 회장 추대의 정식 결정의 장이 되었다.
◆ 당시의 이야기 (하치야 유미코 씨)
전국 간부들에게 전국 대표간부회가 있다는 내용을 서면으로 보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참석할 수 있다는 답변이 도착했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다가오는 회장 취임식이 얼마나 의의 깊은 일인지 모두 생명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니시구치 료조 씨)
선생님의 회장 추대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의 기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1958년, 선생님의 총무 취임 이전부터 ‘다음 회장은 이케다 선생님이다’라고 간사이 멤버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오사카 투쟁의 대승리를 시작으로 도다 선생님을 지키고, 학회를 지키고, 승리의 증표를 굳건히 세워 오셨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싸움’으로 학회의 노선을 결정지었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가네코 츠네코 씨)
19일, 이케다 선생님이 3대회장으로 추대되셨습니다. 분쿄 지부의 기쁨은 거의 폭발적이었습니다.
“이 4월이야말로 오랜 세월 이케다 선생님께 배운 것을 이번 기회에 은혜로 보답하자. 절복으로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자.” 지부장의 커다란 호령으로 환희에 찬 절복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활동이 한창인 때 회장 취임식으로 분주하셨을 이케다 선생님이 메지로의 지부장 댁에 오셨습니다.
축하를 드린다는 우리에게 “분쿄가 가장 기뻐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더 열심히 합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 한사람 한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심의 쐐기를 박는 지도에 이어, 선생님은 넥타이와 넥타이 핀, 지갑, 만년필을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 “아직 벨트가 남았는데”라고 하셨습니다. ‘설마 거기까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네, 부탁드립니다”라고 누군가 손을 들어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대은에 보답하고 싶다. 단지 그 일념으로 우리는 움직였습니다.
그 달의 분쿄 지부 절복성과는 전국 1위. 도다 선생님이 “나의 제자를 보낼 테니 착실히 잘 따르시오”라고 말씀하셔서 이케다 선생님이 지부장 대리가 되신 뒤, 6년 동안 지부는 700세대에서 7만 세대로 크게 발전하고, 전국제패라는 성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회장에 취임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 당시의 이야기 (세이류 야스코 씨)
이케다 선생님이 회장이 되셨습니다. 우리 무코지마(向島) 지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제1부대 부대장으로 싸워 오신 인연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 선생님 슬하에서 약 300명의 부원이 1년 사이 약 4배의 확대를 달성, 선생님은 청년들을 수없이 격려하시고 성장시키면서 유대를 맺어오셨습니다.
나는 청년부와 함께 격문(檄文: 어떤 일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부추기는 글)을 만들어 지부에 배포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을 무엇에 비유하리오. 절복 밖에는 없다. 결과를 내서 보답하자”라고. 그 결과 4월 절복성과는 2001세대, 분쿄 지부에 이어 전국 2위를 달성했습니다.
남모르는 고뇌
21일, SGI회장은 은사의 묘소 앞에서 3대회장 취임을 보고했다. 26일 저녁에는 다이토 체육관에서 본부간부회가 열렸다.
◆ 당시의 이야기 (아키야마 에이코 씨)
1960년 4월의 일입니다. 회장 취임이 결정되어 모두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케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을 앞두고 광포 대전진의 지휘를 어떻게 할까, 동지를 어떻게 지킬까 남모르는 고뇌에 쌓여 있었습니다. 문득 하신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창가학회의 회장이라고 함은 중대한 책임이지요. 모두 편히 쉬고 있을 때나 기뻐할 때도 회장은 쉴 수 없지요. 저 개인적인 시간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되도록 신문기사나 글을 쓰고 싶었다. 회장이라는 자리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도다 선생님의 유언을 결코 허망(虛妄)하게 할 수는 없다. 도다 선생님의 유언이 나의 오체(五體)에서 한순간도 사라지지 않았다. 순수하게 신심하고 있는 회원을 위해서라도 광선유포를 위해서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속 깊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듯한 어조였습니다. 한없이 깊은 선생님의 생각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회장이 되면 마가 기습할 것입니다. 더욱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커다란 마가……”라고. 광포의 대전진에서 마와 싸우는 것은 필정(必定)입니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을 통해 반드시 삼류의 강적이 일어난다는 것을 각오하시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동지입니다’
26일, SGI회장 댁을 방문한 간사이 동지가 있었다. ‘오사카 투쟁’ 이후 SGI회장이 몇 차례 방문한 교토의 중심자 히로타니 키누 씨와 교코 모녀였다.
SGI회장은 〈잊을 수 없는 나의 존귀한 동지들이여〉에 썼습니다.
“1960년 4월 26일, 내가 3대회장에 취임하기 전에 열린 본부간부회에 히로타니 키누 씨와 교코 모녀가 같이 참석했다.
전날 저녁 고바야시 초의 자그마한 우리 집에 오셨다.
‘이제 마음대로 오면 안 되는구나’라는 복잡한 심정 때문이었을까. 두 모녀의 표정은 슬퍼 보였다.
‘회장이 되었다고 해서 특별한 눈으로 보거나 회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만두십시오.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똑같은 동지입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맞이한 1960년 5월 3일, 3대회장의 취임식 때 히로타니 씨는 교토 지부의 제2대 부인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힘차게 출발한 일본의 출진식 날이었다.”
◆ 당시의 이야기 (도쿠노 교코 씨)
26일, 저는 어머니와 함께 다이토 체육관에서 열리는 본부간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토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날 저녁 고바야시 초의 선생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이전에는 도쿄에서 열린 회합에 참가할 때마다 자주 찾아뵈었지만 그때는 회장에 취임하신다는 것에 상당히 긴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쉽게 부를 수도 없고, 다가설 수조차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저희 모녀를 초대하셔서 한 마디 건네셨습니다.
“저는 치켜세우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 말에 안심했습니다. 그때까지 “선생님이 안 계신 우리 간사이는……”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선생님 말씀에 기쁜 나머지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앞날은 밝다
청년부에게 무거운 책임이
취임식 날인 제22회 춘계총회 장소인 료고쿠의 니혼대학교 강당.
며칠 전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준비는 가와사키 지부와 청년부 멤버가 중심이었다.
전날 니혼대학교 강당에서 준비로 날이 꼬박 새버렸다.
정면에 걸린 은사 도다 회장의 사진. 좌우 현수막에 와카, 단상의 부별기, 지부기 배치 그리고 입장 행진 연습 등 몇 번이나 리허설을 했다.
당시 청년부장이었던 아키야 회장이 그날의 모습을 적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사용한 니혼대학교 강당이었지만 그날은 어쩐지 달랐다. 상쾌한 대의식으로 만사 실수 없이 해야 한다는 긴장감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총회 전날 저녁에는 꼭 이케다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스승을 맞이하는 엄연한 자세, 급소를 지적받고 세세히 임원들을 배려하며 이것으로 좋다고 말씀하실 때, 내일 총회가 반은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책임을 청년부가 짊어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회합장소 하나를 준비하는 것도 손쉬운 것이 아니라는 긴장감이 점점 더했다.
청년부는 총회 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당일 청천(晴天)을 필사적으로 기념했다. 그러나 전날까지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 당시의 이야기 (모리다 카즈야 씨)
이케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3일부터 날씨가 맑아지면 광포의 미래는 밝습니다. 만약 날씨가 나빠지면 나는 한층 더 결의를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그러나 취임식 전날 저녁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학회 본부에서 귀가하시는 선생님과 택시로 동승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지 물웅덩이를 지날 때 물보라 소리와 와이퍼가 왔다갔다하는 프론트 유리에 붙은 빗방울을 원망스럽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댁에 내려 드리고 저는 츠루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목을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시 반쯤이었습니다. 비는 그쳤습니다. 12시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월천자(月天子)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내일 날씨는 좋다! 얼마나 기뻤는지 이케다 선생님이 피곤하시겠다는 사실도 잊고 한밤중에 선생님 댁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수화기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선생님, 비가 완전히 멈췄습니다. 내일 날씨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차분하면서 엄격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금부터 대단한 싸움이 시작됩니다.”
◆ 당시의 이야기 (고이즈미 야쓰 씨)
회장 취임식 전날 저녁, 이케다 선생님이 일부러 저희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이사장을 지냈던 남편(고이즈미 씨)에게 “지금까지 노고 많이 하셨습니다. 내일부터 새로운 분투가 시작됩니다. 이번에도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라고 머리를 깊숙이 조아려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1960년 5월 3일에 발간한 도다 선생님 의 《권두언집》을 주셨습니다.
그 책 앞장에 ‘두 사람’이라는 검은색 글자가 크고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광선유포에 매진합시다’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깊은 배려심과 자비심에 저희 부부는 감격했습니다.
도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남편이 이사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도 이케다 선생님이 그늘에서 모두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취임식 날 아침에 ‘승리’의 시를 읊다.
“1961년 5월 3일.
우리의 스승인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 마키구치 초대회장의 순교에서 7년째 되던 해 2대회장으로 취임하신 기념일이다. 아주 맑다. 내 마음도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맑다.”〈수필 인간세기의 빛〉
그렇게 맑게 갠 취임식 날 아침,?SGI회장은 고바야시 자택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삼세까지
승리 또 승리
창가성”
그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모든 회원이 서원하는 광선유포를 위해”
이 시는 지금도 학회 본부 집무실에 남아 있다. SGI회장은 그 시에 대한 심경을 적었다.
“‘영원히 승리의 대도(大道)를!’
이것이 32살에 젊은 회장이 되었을 때 내가 이루어야 할 사명이고 책임이었다.”〈수필 신·인간혁명〉
창가는 영원히 승리 또 승리한다.
패배하는 창가는 없다. 그것이 SGI회장이 3대회장 취임 때 세운 굳은 맹세였다.
택시로 강당에
SGI회장은 취임식 당일 택시를 타고 니혼대학교 강당으로 향했다.
“취임식 날 아침 오타 구 고바야시 초(당시)의 자그마한 집으로 장모님이 불러주신 택시를 타고 총회장소로 향했다.”〈수필 신·인간혁명〉
어느 택시 운전수가 당시의 회상을 적었다. “이케다 씨 집 현관에 도착하자, 추운 날씨였지만 사모님은 현관 앞에 서서 따뜻한 차를 대접해 주셨습니다. 항상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시면서 배웅을 해 주셔서,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케다 다이사쿠 씨는 정말 공손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차 문을 열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셨습니다.”
◆ 당시의 이야기 (야마자키 히사미 씨)
회장 취임식 날 저도 강당 밖에서 스태프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질서 정연하게 입장시킨 뒤, 료코 구에서 니혼대학교 강당까지 몇 번이나 왕복을 했습니다.
취임식이 시작하기 전 택시 한 대가 도착. 내리는 사람은 이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의 입장이 끝나고 개회와 동시에 저도 들어갔습니다. 끝난 뒤에는 다시 장외 임무지로 돌아왔습니다. 대기실에서 쉬고 있을 때 선생님께서 메시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정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새로운 학회를 같이 만듭시다.”
선생님 자신의 성대한 의식이었지만 정리반까지 배려해 주시는 마음에 배고픔과 피곤도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가슴이 떨렸습니다.
은사의 양복을 입고
◆ 당시의 이야기 (하치야 유미코 씨)
당일 회합장소에서 안내를 담당한 저는 입구에서 이케다 선생님을 맞이했습니다. 선생님은 도다 선생님의 양복을 입고 계셨습니다. 감개무량했습니다. 진정한 사제불이의 모습이었습니다. ‘도다 선생님과 함께’ 회장 취임식에 임한다는 선생님의 강한 결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내 입구에서 사모님이 선생님에게 흉장(胸章)을 달아 드렸습니다. 야무지게 옷을 꼭 여민 사모님은 마음속 깊이 무언가를 결의하고 계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어쩐지 제 가슴도 뭉클했습니다.
음악대의 대연주
회합장소 안팎은 2만 명의 동지들로 가득 찼다. 사회자가 “드디어 개회가 시작되오니 정숙해 주십시오”라는 멘트를 했다.
찬연한 5월의 태양이 장내로 스며든다. 드디어 정오(正午). 개막을 알리는 음악대 연주의 지휘가 시작된다.
“장내(場內)에서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한 물결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더! 한 번 더!’라고 울려 퍼지는 음악대의 연주 소리가 거대한 니혼대학교 강당을 뒤흔들어 깨우는 듯했다.”〈수필 신·인간혁명〉
◆ 당시의 이야기 (아리시마 시게다케 씨)
지금까지 니혼대학교 강당에서 몇 번이나 연주를 했지만 그날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1층 통로로 이케다 선생님이 입장. 저는 들고 있던 지휘봉을 아래로 내렸습니다.
팡파르와 같은 ‘일본남아의 노래’ 전주(前奏) 트럼펫 소리가 니혼대학교 강당에 메아리쳤습니다.
드디어 장내를 뒤흔드는 학회가는 완전히 리듬을 탔습니다. 그 정도 규모의 강당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음악대, 고적대, 합창단 쪽으로 등을 돌려 선생님을 응시하면서 ‘일본남아의 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지휘는 필요가 없었습니다. 2만 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을 중심으로!
‘어리지만’
남녀부기(旗)가 단상 앞에 나란히 서고, 본부기를 선두로 1층 중앙으로 3대회장이 입장.
강당 정면에는 은사 도다 선생님의 사진이 높이 걸려 있었다. 이케다 회장은 고인의 초상화를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돔의 커다란 지붕 꼭대기까지 울려 퍼지는 학회가. 그리운 은사 도다 선생님의 초상화를 보면서 입장했다. 결의하신 모습이 어제 일처럼 뚜렷하다.”〈수필 신·인간혁명〉
강당 안의 흥분이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모든 참가자가 숨을 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이케다 3대회장이 인사를 하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우렁찬 목소리가 강당 안을 뒤흔들었다.
“아직은 어리지만 오늘부터 도다 문하생을 대표해서 광선유포를 목표로 일보 전진의 지휘를 하겠습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