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32> 서장 (書狀)
"그대의 안목을 보니, 열에 아홉은 이해하고 있으나 다만 마지막에 한 번 내려놓는 힘이 부족하더군요. 만약 한 번 내려놓는 힘을 얻고나면 유학(儒學)이 곧 불학(佛學)이고 불학이 곧 유학이며, 승(僧)이 곧 속(俗)이고 속이 곧 승이며, 범(凡)이 곧 성(聖)이고 성이 곧 범이며, 내가 곧 그대이고 그대가 곧 나이며, 하늘이 곧 땅이고 땅이 곧 하늘이며, 물결이 곧 물이고 물이 곧 물결이니, 우유와 제호를 섞어서 한 맛을 이루고 그릇과 비녀와 팔찌를 녹혀서 하나의 금을 이룸이 나에게 있고 남에게 있지 않습니다.
이 속으로 들어오면 내가 모든 것을 지휘하니, 이른바 내가 바로 법왕(法王)입니다. 법(法)에서 자재(自在)하니 얻고·잃고·옳고·그름에서 어찌 거리낌과 장애가 있겠습니까?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본래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안목에서 말하면, '지금'이 이것이요, '몇 년 몇 월 몇 일'이 이것이요, '몇 시 몇 분 몇 초'가 이것이요, '여기'가 이것이요, '대한민국'이 이것이요, '무슨 시 무슨 구 무슨 동'이 이것이요, '몇 번지'가 이것이요, '나'가 이것이요, '책상'이 이것이요, '앉는 것'이 이것이요, '컴퓨터'가 이것이요, '두드리는 것'이 이것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것이요, '분별심'이 이것이요, '하나 하나의 생각'이 이것이요, '따라가는 것'이 이것이요, '말하는 것'이 이것이요,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안목이 없으면 손대는 일마다 마주치는 인연마다 걸리고 부딪혀서 구속을 받지만, 바른 안목을 갖추면 하나 하나의 일과 하나 하나의 인연이 한결같이 다만 이것일 뿐이니 걸릴 것도 없고 부딪힐 것도 없고 구속받을 것도 없어서 늘 자재하고 거리낌이 없다. 요컨대 법을 모르면 일마다 물건마다 걸리고 구속받아서 일과 사물에 부림을 당하지만, 법을 알면 앞에 나타나는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의 정체를 남김 없이 다 알기 때문에 일과 사물을 능동적으로 부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별과 태양의 움직임이 바로 내 손가락의 움직임이며, 손가락의 움직임이 바로 자동차의 움직임이며, 자동차의 움직임이 바로 내 생각의 움직임이며, 생각의 움직임이 바로 태평양 바다 깊숙이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움직임이며, 물고기의 움직임이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의 눈동자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모양을 따라가면 천차만별로 다른 세계가 있지만, 법으로 보면 오직 하나일 뿐이라고 한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