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2년 몽고 징키스칸의 수장 살래탑의 눈을 명중하여
2차몽침전쟁을 단 한번의 승리로 마감한
김윤후장군은 자신의 전공을 자신의 공적이 아니라 사양하였다.
3차로 침입한 몽고군은 처인성의 모습을 훼손하여(돌멩이 하나 겹친게 없도록)하고 이곳 주민들을 전부 노예화시킨 부곡(部谷)으로 보복하였다( 현재 역사서술은 상황을 이해 봇하고 바꾸어 말 하고 있다) 조선태종때에 용구현과 합처 용인(龍仁)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뜻은 "龍의 仁" 이라 하여 용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씨방(精室)을 뜻한다.
그리하여 명당이 많다는 곳으로 유명해 진 것이다
처인성은 지금 작은 논두렁만 큼 작지만 이 전쟁은 그나마 무신독재압정의 틈바귀에서도 민족의 끈질긴 항몽정신을 빛낸 자리로서 용인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지금의 처인성 규모는 겨우 농구장크기만 하고 돌맹이도 없는 곳이지만 몽고군이 다시 침입하였을때 이곳의 돌이 겹치지 않게 파괴하고 주민들을 모두 죽이거나 천민으로 취급하는 부곡으로 지정하였던 것인데 역사는 이를 바꾸어 썼다, 지금의 성터도 임진왜란, 병자호란때 주민들이 성을 다시 쌓았던 흔적이며, 구한말 의병들도 이 성을 쌓아 항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겨우 성의모양을 갖추기는 했지만 억센 몽고대적을 막아 낼 당시의 석성은 간데 없고 장소도 이곳이 아니라는 설도 있을 만큼 황폐되어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민족의 혼이 깃등 이곳을 다듬어 민족정기를 다시 일깨우는 일을 하기 바란다.
이제 고려도 가고 조선도 갔다
남은 것은 신화처럼 아름다운 전설만 남았다.
이 한방의 화살하나로 적장의 눈을 뒵어 놓은 이 전쟁은 곧 끝났다
반도를 휘젔던 몽고군사들이 대장이 죽어버리니 사기를 잃고 물러갔지만
아직도 이전쟁은 층첩(勝捷)이란 이름으로 붙여진다
한산대첩, 살수대첩도 대첩이라 한다
대첩은 적군을 물리쳐 더이상 전쟁을 못하게 한 승리를 말 한다면 처인성전투는 단순한 전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방의 화살하나로 적의 수장을 도패시키고 2차몽고전쟁을 마무리한 싸움임에도 말을 아끼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옹졸함이 엿보인다.
(이순신의 한산대첩도 왜놈이 전쟁을 그만두고 물러갔다가 다시 정유년에 재침한 것이다)
나는 처인성 김윤후장군의 승리를 대승첩(大勝捷)이라 이름하노라
11. 몽골군의 침략
일연이 세상 사람들과 인연을 완전히 끊고 비슬산에
머문 지도 어언 네 해가 지난 1231년 8월. 한창 더운
여름날이었다.
일연은 동네에 시주를 나갔다가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다.
"몽골 오랑캐가 쳐들어왔대!"
"우리 고려 조정에 늘 간섭을 해오더니 마침내
그놈들이 쳐들어왔구만."
"그 놈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다는구만."
백성들은 큰 걱정을 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무신들의 정권 다툼으로 고려의 국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몽골은 본격적인 침략을 한
것이었다.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너자
밀물처럼 고려 땅을 휩쓸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재산을 빼앗는가 하면
사람들을 잡아가기까지 했다.
고려 땅은 완전히 몽골 군대의 말발굽 아래서
짓밟히고 있었다. 하지만 고려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최우는 몽골과 맞설 준비를 하였다. 우선 군대를
3군으로 편성해 군사들을 모았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귀족 세력에 대항했다가 관군에
쫓기고 있던 노비들이 가장 먼저 달려와 몽골군과
싸울 차비를 했다. 그리고 산적도 있었다. 특히 개경
근처 마산에 있던 산적의 두목은 실권자인 최우에게
건의하였다.
"청컨대 우리 산채에 있는 무리 5천 명은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우겠습니다. 우리도 정식 군대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최우는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 즉시
정식 군대의 옷을 나눠주며 3군에 가담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모집한 지 8일만에 3군의 수효는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렇게 이루어진 3군은 개경을 출발하여
황해도의 동선역에 이르렀다.
그 때까지도 몽골군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날이
저물어 3군은 그 곳에서 머무르기로 하고, 말의
안장을 풀어 놓은 채 쉬고 있었다.
전쟁 경험이 없는 3군의 병사들은 밤이 깊어지자
두려움에 떨었다. 얼마나 밤이 깊었을까. 산 위에서
망을 보고 서 있던 병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몽골군이 쳐들어온다!"
싸움의 경험이 많지 않던 군사들은 막상 몽골군과
맞닥뜨리고 나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면서
도망칠 눈치만 보는 병사들도 있었다. 만약 그런
상태로 싸움을 계속한다면 몽골군에게 지게 될 것은
너무도 뻔했다. 그러나 그때 고려의 3군 쪽에서
용맹스럽게 싸우는 장수가 몇 명 있었다. 그들은
자성, 이승자, 노탄 등의 장수였는데,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맹렬히
싸움에 임했다.
그 중 자성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다가
적의 화살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러자 겁을 집어먹고 있던 군사들 사이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망치면 고려의 백성들이 놈들의 칼날
아래 죽지 않을까?"
"그래, 우리 가족들도 모두 죽게 될 거야."
"우리 가족들은 우리가 지켜야 돼. 고려를 지키자!"
"도망쳐 봐야 모두 죽는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만이 살 길이다!"
"우리 군사가 더 많다.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고려의 병사들은 점점
대담하고 용감하게 싸움에 임하기 시작했다.
도망치려던 병사들도 발길을 돌려 몽골군에게 칼을
겨누었다. 마침내 3군은 하나로 뭉쳐 몽골군에게 맞서
싸웠다.
특히 산적을 하던 병사들은 활을 아주 잘 쏘았다.
이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았는데, 그들의
화살에 맞은 몽골군사들은 통나무처럼 바닥으로 쿵쿵
쓰러졌다. 차츰 고려 병사들은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고려 병사들의 용맹성에 놀란 몽골 군사들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3군은 도망가는 몽골군을
뒤쫓으며 몽골 병사를 죽였다.
결국 고려의 승리였다. 첫 싸움에서 승리를 하자
고려 병사들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안주성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전력을 가다듬은 뒤 몽골군과 맞서 싸울 차비를
차리기 위해서였다.
고려군이 안주성으로 들어간 얼마 뒤 몽골은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안주성으로 쳐들어왔다. 그들은
이전보다 더욱더 맹렬히 공격해왔다.
그런데 안주성에서 하는 싸움은 고려 병사들에게
물리했다. 우선 들판에서 많은 전투를 치룬 몽골군의
전투력과 기동력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려군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대부분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장수들 몇 명만이 간신히 도망쳐서
살아 남았다.
이 싸움이 고려 조정에 주는 타격은 매우 컸다.
안주성 싸움 이후 최우는 몽골군과 싸울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더이상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았고, 각 지방에서 백성들이 몽골군과 맞서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 사이 몽골군은 어느덧 개경 근처까지
공격해왔다.
그러자 최씨 무신 정권과 왕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대로 가만 있다가는 몽골군의 칼 아래 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마침내 최우는 몽골 장수 살리타이에게 항복을 하고
말았다. 살리타이는 최우에게 금 1만 근, 말 2만 필,
수천 명의 인질을 요구하였다.
고려 쪽에서는 이 만한 공물을 바칠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살리타이에게 공물을 깎아달라고 사정을
하였다. 살리타이는 금 70근, 은 1천 3백 근, 말
170필을 받고 물러났다.
이처럼 공물의 양을 깎아주고 살리타이가 물러난
것은 최우가 교섭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몽골의 주력 부대는 중국의 금나라와 싸움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곳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 스스로 대항하는 고려 백성들이
두렵기도 했다.
한편 살리타이는 고려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살리타이는 고려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하여
'다루가치'라고 하는 감독관 72명을 개경과 중요한
지방 도시에 남기고 갔다.
이들 몽골 감독관은 왕실과 지방 관청에서 하는
일을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말하자면 이전에는 최씨
무신들이 하던 짓을 다루가치들이 대신하였다.
그러자 가장 다급해진 것은 최우였다. 다루가치가
고려에 있는 한 옛날처럼 왕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다루가치들은 조정에 들어와
여러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고려의 왕자와 공주를 보내 주시오."
"고려의 기술자를 보내 주시오."
비록 아니꼽기는 했지만, 조정의 중신들은
몽골사신을 달래서 돌려 보냈다.
사신을 돌려 보내고 최우는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몽골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조정을 옮겨버리는 계획이었다.
최우는 조정중신들을 모아 놓고 단호하게 말했다.
"몽골은 앞으로도 이런 요구를 자주 해올 것이오.
이러다간 민족의 자주성을 잃고 말겠소. 백성들과
중신들이 힘을 합쳐 죽기를 각오하고 몽골과 싸워야
하오."
그랬다가 혹시 백성들만 더 상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중신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최우의 결심은 확고하게 굳은 뒤였다.
"오랑캐와 더이상 타협할 필요는 없소. 몽골족은
바다에서의 싸움이 약하니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뒤
싸움에 대비하도록 합시다."
모든 것은 최우의 생각대로 되어갔다.
마침내 1232년 7월.
최우는 나라 곳곳에 머물러 있는 다루가치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그리고 재빠르게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성들에게는 섬이나 산성으로 피난을
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몽골은 가만 있지 않았다. 그해 12월,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
이번에도 고려 백성들은 그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곳곳에서 몽골군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대륙에서 오랫동안 싸움을 해온 몽골군을 당할 수는
없었다.
고려는 곧 처인성까지 밀리고 말았다.
처인성은 김윤후 장군과 노비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미 고려의 여러 성을 무너뜨린 몽골군은
기세등등하게 처인성을 공격해 왔다. 몽골 장수
살리타이는 다른 성처럼 처인성도 금방 무너뜨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처인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고려의
저항이 워낙 완강했던 것이다.
처인성 안에서 하나로 똘똘 뭉친 관군과 노비군은
이미 죽기를 각오하기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백성들을
대장 김윤후는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목숨을 걸고 싸워 나라를 지키자."
이렇게 되자 몽골군은 처인성에서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당황하였다.
몽골 장수 살리타이는 일찍이 대륙의 여러 나라를
돌며 싸움을 많이 한 노련한 장군이었다. 그는
처인성이 쉽게 쓰러지지 않자 놀라면서 말했다.
"내가 전쟁을 여러 번 해봤지만 이토록 강한 군대를
처음 보겠다."
살리타이가 이렇게 중얼거리며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처인성에서 화살 한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그 화살은 정확히 살리타이의 얼굴에 꽂혔다.
"악-"
살리타이는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두머리를 잃은 몽골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후퇴를 하면서도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에 띄는 백성들을 칼로
베고 집은 불질렀으며 농토를 황폐하게 만들고 가축은
잡아먹어버렸다. 또한 귀중한 유물들을 많이
파괴했다. 이때 '초조대장경(처음 만든 대장경)'도 불
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몽골이 영영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년 뒤, 군사력를 보충한 몽골은 다시
고려 땅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이듬 해 10월에는
전주의 고부 경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제 전라도가
무너지고 섬진강을 건너 경상도까지 쳐들어오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일연은 보당암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몽골의 칼날 아래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이 무참히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도 걱정되었다. 출가한 이후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다가, 몽골의 침입까지
있자 일연은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듯했다.
일연은 조국을 위해 자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았다. 죽어간 백성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고려에서 몽골이 물러나기를 부처님께
기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연은 자신이 너무도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백성들을 위하는 승려가 되겠다는 자신의
결심조차도 한낱 뜬 구름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일연은 문수보살 앞에 눈을 감고 앉아서 어떻게
해야 할는지를 생각했다. 먹는 것도 중지하고 이틀을
그렇게 내처 앉아 있기만 했다.
그런 한 순간, 자신의 온몸이 나무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란 일연이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일연은 눈을 감은 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눈앞에 뭔가 보였다. 이어 찬란한 빛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일연은 눈이 부셨다. 그 빛 속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한 문수보살이 갑자기 나타났다.
"아, 문수보살님!"
일연은 땀을 줄줄 흘리며 외쳤다. 그러자
문수보살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주에 있다가 내년 여름에는 다시 이 산의
묘문암에 거처하라."
일연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비로소 눈이 떠졌던
것이다.
그런데 문수보살은 간데없고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불상만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문수보살의 목소리는
또렷이 살아서 일연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일연은 자기 볼을 꼬집어 보였다. 생시와 같았다.
단순한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그 모습과 목소리가
생생하였다. 문수보살이 어떤 계시를 준 게 분명했다.
일연은 곧바로 비슬산 북쪽 무주암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주암으로 간 일연은 고려와 고려의 백성들을 위한
기원을 계속했다. 그리고 간혹 산책을 하기도 하면서
쓰리고 아픈 마음을 달랬다.
그러던 어느날 일연은 법당 앞마당을 천천히 거닐고
있었다. 알맞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싱그러운 나무
내음과 꽃내음이 났다. 일연은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해 그 내음들을 들이켰다. 바람 어디에도 전쟁으로
인한 피내음이 없었다.
'고려가 이토록 평화스러우면 얼마나 좋을꼬...'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났다. 지금 백성들은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신음하고 있는데 자신만 편하고
안전한 곳에 있는 것같아 몹시 죄스러웠다.
'문수보살님은 무엇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이곳
무주암으로 오라고 했을까...'
일연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마당을
거닐었다.
'불경에 이런 말이 있었지. 백성의 세계는 줄지
않으며, 부처의 세계는 늘어나지 않는다...'
바람이 또 불어왔다. 그러자 마당 한 켠에 있는
소나무에서 송충이 몇 마리가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송충이는 구불구불 땅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근방에 있던 참새들이 날아와 송충이를 쪼아먹고
있었다. 참새 부리에 물린 송충이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버둥거리고 있었다. 몽골의 침입에 버둥거리는
고려의 백성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참새가 약한 벌레를 잡아먹는다고 탓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참새는 벌레를 잡아먹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끼리는 어떠한가.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함부로 사람의 생명을
상하게 하지 하지 않는가. 살기 위함이 아니라 한낱
욕심 때문에...
순간 일연은 무릎을 탁 쳤다. 진리 하나를 깨우쳤던
것이다.
송충이는 벌레로 태어났기 때문에 참새에게 잡아
먹히는 것이고, 참새는 살기 위해서 벌레를
잡아먹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이 문제였다. 인간끼리의 싸움,
그것은 욕심이 만든 죄였다. 부처님 앞에서는 먹는
자도 먹히는 자도 다 같은 죄인인지도 몰랐다. 그
죄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죽어서도 영원히 부처가
되지 못하고 개, 돼지, 또는 작은 생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었다.
일연은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고 산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스러울까 생각했다.
이제 고려의 불교가 해야 할 일은 이 땅에서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욕심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리라.
개인의 욕심으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민족의 욕심에서부터
고려 민족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무력
싸움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
민족이 유지될 수 있는 강한 민족정신이 필요했다. 그
일을 고려 불교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었다. 또한 그것은 부처님의 뜻이기도 할
것이었다.
일연은 산을 내려가 백성들과 함께 할 결심을 했다.
백성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달래주는 일이 자신의
몫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온 우리 민족의
정신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연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그 때가 그의 나이 서른둘, 승과에 합격하고
비슬산에 들어온 지 꼭 십 년이 되던 해였다.
2244
(다음에 이어 12. 불타는 황룡사
)http://cafe.daum.net/kg2244/Sqf6/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