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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성지 - 김대건 신부, 은하수 별빛 아래 잠들다 |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산리 141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미리내 교우촌 형성
미리내는 은하수(銀河水)의 순수 우리말로서 경기도 안성 시궁산(時宮山 515m)과 쌍령산 중심부의 깊은 골에 자리하고 있다. 골짜기 따라 흐르는 실개천 주위에,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점점이 흩어져 살던 천주 교우들의 집에서 흘러나온 호롱불빛과 밤하늘의 별빛이 맑은 시냇물과 어우러져 보석처럼 빛나서, 그것이 마치 밤하늘 별들이 성군(星群)을 이룬 은하수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다운 옛 지명이다.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양평(양근), 용인, 안성, 화성, 시흥 일대와, 충청도 천안 목천, 진천 배티, 동골 등, 교회 초기에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 중에서, 중부내륙 용인과 안성에 깊숙이 위치한 한덕골, 골배마실, 굴암, 검은정 등과 함께 초기 비밀교회 중의 한 곳이었다. 미리내와 인근의 20리 안에 있는 이들 교우촌들은 본래 신유박해(1801년) 이후에 크고 작은 박해를 거치면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찾아들어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신자들은 이곳 골짜기 마다 작은 마을들을 이루며 주로 척박한 밭을 일구고 그릇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중 큰 교우촌인 미리내는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미리내 교우촌은 한미통상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883년 공소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5월 20일 갓등이(현 왕림) 본당에서 분리되어 일찌감치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미리내 성지 초입 우측에 있는 성 요셉 성당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본당신자들과 함께 1906년 여름 건축을 시작해 1907년 초 완성하여 성 요셉을 주보로 봉헌식을 가졌다. 그해에 강도영 신부는 성당 옆에 해성학원을 짓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신자 자녀들에 대한 교리와 초등교육을 실시했다. 해성학원은 일제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1936년 폐교되었다.
미리내 성지의 의의
미리내 본당이 성지로서의 의의를 갖게 된 것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은 후부터이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 서품 후 1년 남짓 짧은 사목활동을 한 후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26세의 나이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처형되었다.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敎)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복을 얻으려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오.
국사범으로 형을 받은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연고자가 찾아 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경우 장례마저 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꾼을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이를 그대로 둘 수 없었고 그들 중 한 사람인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는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난 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백 50리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이 되는 날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여기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곧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 의해 처형 직후 새남터 형장과 가깝고 새남터 순교자들의 묘지가 있는 왜고개에 임시로 묻혔다가 박해가 풀린 후 미리내에 모셨다는 것이다. 지금 왜고개 성지에서는 그렇게 안내하고 있다.)
자신의 선산에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묻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보살피던 이 빈첸시오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순교자 옆에 묻어달란 주교의 유언대로 김대건 신부 옆자리에 그를 안장했다.
그 무렵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도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들 김대건의 유학 중 기해박해 때에 남편 성 김재준 이냐시오를 순교로 잃고 7년 만에 아들조차 잃은 우르술라,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이집 저집으로 문전걸식을 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를 이어간 끝에 선종했다. 이민식은 고 우르술라도 김대건 신부의 묘 옆에 나란히 모셔 생전에 함께 하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미리내 성지의 오늘을 있게 한 당사자인 이민식 자신도 92세까지 장수하다가 선종해 김대건 신부 곁에 묻혔다.
이처럼 미리내는 김대건 신부와 어머니 고 우루슬라, 교구장 페레올 주교, 그리고 이들의 묘역을 처음 조성했던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성지 중의 성지가 되는 곳이다.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무덤은 이곳 교우촌 신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오다가 1901년 5월 21일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다시 경남의 밀양 성당으로 옮겨져 잠시 안치되었고, 1951년 서울 수복 후에는 다시 혜화동 소신학교 성당(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으로 옮겨졌다. 한편 미리내에는 김 신부의 유해 중 하악골(아래턱뼈)만이 보존되어 오다가 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종아리뼈도 이곳으로 돌아와 함께 김대건 기념 성당 안에 안치되었다.
이윤일(요한) 성인도 특이하게 미리내 성지와 관련이 있다. 본래 충청도 홍주 출신인 그는 박해의 위협을 피해 경상도 상주 골짜기에 은거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66년 12월 26일 대구 관덕정(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목이 잘려 순교하였다. 이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날뫼(대구시 비산동)에 안장되었으며, 훗날 먹방이 교우촌(용인군 이동면 묵리)으로, 1976년 미리내로, 1986년 대구 관덕정으로 이장되었다가 지금은 복자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이중 먹방이 무덤은 '거꾸로 된 무덤'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 이유는 성인의 가족들이 훗날 그 시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거꾸로 묻었기 때문이란다.
이제 미리내에는 김대건과 이윤일 성인의 유해가 안장되었던 자리가 빈 무덤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빈 무덤이 아니라 성인들의 피와 살이 그들의 신앙과 함께 스며 있는 진토(塵土)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순례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순교 신심을 바탕으로 내일의 신앙을 다져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미리내 성지 조성 과정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되었다. 1976년 무명 순교자 묘역이 조성되었고, 같은 해 정행만 프란치스코 신부가 부임하면서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정착하고 주차장 시설,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을 순차적으로 완공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경당 옆에 3만 평 규모로 광장을 확장하고 미리내 성 요셉 성당에서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까지 길 옆에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고,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이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종아리뼈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2층 전시장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들이 설치되어 박해의 아픔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그 후 103위 시성 기념 대성당과 성 김대건 기념성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었고, 입구에서 성 김대건 성당까지 오르는 길에는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성당 뒤편으로 해서 성 김대건 기념성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옮겨 설치되었다.
성지의 제일 위쪽인 미리내 언덕에는 가경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9월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현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기념경당 내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하악골(아랫턱뼈)와 성인의 시신이 담겨져 있던 목관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성인의 다른 유해는 현재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성당 안에 안치되어 있다.
2005년 10월 25일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가 수원교구로 이관되었다. 수원교구는 그동안 성지를 가꾸는데 애써온 수도회의 노고를 치하하고 미리내 성지를 성 김대건 신부의 영성과 믿음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의지를 밝혔다. 2015년 4월 7일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 부조상을 제작 설치하고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죽산 성지에서 간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죽산 도후부 옥터를 떠나 미리내 성지에 도착하니 오후 3시 40분. 일단 안내판의 성지 안내도와 홈페이지의 순례안내도를 보고 대략의 동선을 정했다.
성지 앞 광장에는 “임은 가시고 진리는 왔습니다. 피로써 가꾼 땅에 무궁화 피나이다“라는 시 구절이 새겨진 시비(詩碑) 겸 미리내 성지 표지석이 맞이한다.
성체조배실 및 한국 순교성인복자상
성지 입구에는 한국 순교성인복자부조상과 성체조배실이 있다.
한국순교성인복자상은 너비 23m, 높이 5.5m 크기로 오직 하늘나라만을 바라봤던 103위 성인, 124위 복자의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2015년 최영철 바오로 작이다.
성체조배실은 지상 2층, 8m 높이의 철근콘크리트 및 한옥구조로, 마치 김대건 성인이 사목하던 조선시대의 성문을 떠올리게 하는 형상으로 건축됐다. 2018년 4월 28일 성체조배실 축복 당시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는 “성체조배는 천국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형상과 같다”면서 “언제 어떤 처지에 있든 성체 대전에 가장 먼저 달려오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 되길 바란다”고 전한 바 있다. 미리내성지 성체조배실은 성지 입구 밖에 조성돼 성지 운영 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방문해 기도할 수 있다. 건물 윗부분에 天國門(천국문)이라고 씌어 있는데 이는 성체조배가 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뜻이다.
다만 지금 공사 중이라서 장비들과 인부들이 뒤섞여 제대로 보기 어려워 아쉽다.
나지막한 문 위에는 바늘구멍이라는 문 이름이 적혀 있다. 비록 문이 낮아서 아무나 들어올 수가 있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들어올 수 없는 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부자가 이 문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문이다. 이 낮고 좁은 문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크다.
다음으로는 입구에서 가까운 무명순교자의 묘와 겟세마네 동산. 이곳으로 가려면 숲길로 나있는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을 거쳐야 한다.
성모칠고 묵주기도의 길 - 성모칠고를 묵상하며 바치는 기도로 13세기초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의 성모님의 종 수도회에서 시작되었다.. 7고의 매단마다 주님의 기도 1번, 성모송 7번, 다음 “통고의 어머니 저희에게도 나누어 주소서”을 염한다.
"당신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날에 찢기듯 아플 것입니다. (루카 2,35)"
겟세마니 동산
겟세마니는 예루살렘의 기드론 계곡을 눈앞에 둔, 올리브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동산으로 예수님이 죽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제자들과 함께 올라 슬픔과 고뇌에 찬 최후의 기도를 드린 곳이다.
정행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지은 겟세마니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그동안 우리는 산아제한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살생을 했는가? 그 대가가 국가적 재앙인 출산율 저조와 성소자 고갈 사태를 유발하여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십자가와 제대 앞에는 자연석 교우석으로 넓은 공간을 메우고 있다. 옆쪽에는 고해실도 마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피땀 어린 기도는 아랑곳없이 잠만 자는 제자들은 오늘날의 우리 교우들의 행태를 보는 것 같아 지켜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하다.
무명 순교자들 묘소와 성 이윤일 요한 천묘사적비
겟세마니 동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다.
1976년 성지에서 순교자 현양사업을 진행하며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 17위를 이곳에 이장해 모셨다. 그 중에서 6월 24일 용인 이동면 묵리(먹방이)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12월 21일 대구대교구 성모당으로 이장해 이듬해 1월 21일 대구 관덕정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리고자 1988년 9월 20일 미리내에 성 이윤일 천묘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대구대교구는 성인의 유해를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순교기념관 지하경당에 모시고 봉안식을 가졌다.
나머지 16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 중에서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는 2013년 10월 22일 생전에 신앙생활을 하던 손골 성지로 이장해 현양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묻혀있는 12위는 모두 용인 내사면 대대4리의 목 없는 순교자 줄무덤에서 이장한 유해이다. 그동안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 하단에 자리했던 수원교구 성직자 묘역은 지속적인 이용이 어려워 2019년 5월 31일부터 수원교구 안성 추모공원 내에 조성한 성직자 묘역으로 이장을 시작해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에 묘지 축복식을 거행했다.
순교자무명 순교자 묘역은 맨 꼭대기에 피에타 상이 있고 그 아래 좌로부터 차 수산나 묘, 무명순교자 묘비, 대형 무명순교자비, 성 이윤일 요한 천묘비의 순으로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로는 순교자 합장묘와 맨 밑에 제대가 있다.
이밖에도 수원교구 2대 교구장 김남수 안젤로 주교와 한국외방선교회 신학생 이종하(야고보)의 묘비도 있다.
다시 내려 오면서 대건회관을 바라보며 피정시설 묵상의 집을 거쳐 성 요셉 성당에 갔다.
묵상의 집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피정기관으로 일상의 소음을 벗어나 하느님을 만나는 생명의 쉼터이며 교육의 장소이다. 널찍한 주차장 안으로 양쪽에 십자가의 길의 14처가 있어 마치 조각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성 요셉 성당
1907년에 봉헌된 성 요셉 성당은 미리내 성지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성당이다. 한국인 신부 중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라우렌시오)와 함께 최초의 국내 사제인 초대주임 강도영(마르코) 신부가 교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열성적 신지들과 함께 직접 돌과 나무를 나르고 쌓아 세운 성당이다.
뼈대나 석조 외벽 등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나무로 만들어졌던 종탑은 세월 속에 허물어져 후대에 현재의 회벽탑으로 개축되었다. 성전 제대에는 이곳 미리내 성지에 묻혔던 김대건 신부의 유해(발가락뼈)가 모셔져 있다.
종각에 올려진 미리내 종은 1917년 강도영 신부가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로부터 들여왔으며, 일제시대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포탄 제작을 위해 하마터면 망실될 뻔하였다. 이 종은 현재도 미리내 본당에서 사용되고 있다.
성당 내부는 십자고상 앞에 옛날의 제대가 있고 오른쪽에 예수성심상이 있다. 제대는 일제시대 때 원산 덕원 수도원에서 제작되어 우마차에 실고 미리내까지 운반해 왔으며,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이후에도 제대와 감실만을 분리한 채 현재에도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양쪽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새겨져 있다.
성당 밖에는 성 가정상과 말구(마르코) 우물이 있다. 말구 우물은 1905년 강도영 마르코 신부가 파서 성당 건립과 교우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인데 30자를 파내려가니 암반을 만났으나 포기하지 않고 5자를 더 파니 암반 사이에서 두 줄기 물이 솟았다고 한다. 한 동안 사용하지 않다가 2008년 우물의 낡은 누각을 개축한 후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성 요셉 성당을 나오면 부근에 성지 사무실과 성물 보급소, 그리고 식당 우르실라 홀이 있다. 그리고 한국순교자 103위 시성기념성당, 성모당, 성 김대건 신부 기념성당 및 묘소로 안내하는 표지석이 나온다. 이제 미리내 성지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이 3곳을 간다.
《미리내 성지 (하)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