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4. 중국불교성지 오대산 ① - 남선사, 불광사
1500년 역사 남선사 대전 ‘옛 모습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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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사 대전 > |
사진설명: 당나라 덕종 건중 3년(782)에 건축된 남선사 대전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지금도 당당함을 자랑하는 남선사 대전의 모습. |
2002년 10월10일 오후 2시. 천룡산 석굴을 보고 오대산으로 내쳐 달렸다. 훼손된 ‘천룡산 석굴 모습’에 마음 상했으나, 신선한 가을날씨와 화창한 햇살 덕분에 기분은 다시금 정상을 되찾았다.
오대산! 중국불교 제일의 성지,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에 가고 있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서서히 흥분됐다. 평창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가 수행한 곳,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스님(704~787)이 마지막을 보낸 곳. 항상 참배하고 싶었던 오대산에 이제 곧 도착한다.
중국불교 제일 성지 오대산은 어떤 곳인가. 언제부터 오대산이 중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중국 산서성 오대현 동북부에 위치한 오대산은 사방 500리에 걸쳐 뻗어있는 거대한 산이다.
취암봉.망해봉.금수봉.게월봉.엽두봉 등 5개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다고 ‘오대산’이라 하는데, 특히 다섯 개 봉우리 정상은 평평하고 수목이 없어 마치 형상이 흙으로 된 평원 같아 예부터 ‘오대(五台)’로 불려졌다. 금수봉은 중대(中台. 해발 2936m), 망해봉은 동대(東台. 해발 2880m), 취암봉은 남대(南台. 해발 2757m), 게월봉은 서대(西台. 해발 2860m), 엽두봉은 북대(北台. 해발 3056m)에 해당된다. 중대 금수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있는 형상이다.
후한 명제 영평연간(58~75년) 한나라 명제가 사신을 천축에 파견해 불경을 구해오게 한 후부터 오대산엔 사찰이 건축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360여개에 달했던 사원은 현재 대회진(臺懷鎭)을 중심으로 47개 정도 만 남아있지만, 오대산의 종교성.신성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특히 오대산엔 수행하는 유명한 선당(禪堂)이 5개 있는데,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것이 현통사의 선당이다. 지금도 많은 중국 스님들은 이곳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782년 건립…중국 최고의 목조건축물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불교성지로 자리 잡았지만, 오대산은 본래 신선도(神仙道) 신도들에 의해 개발되기 시작했다. 5세기경 “〈화엄경〉에 나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거주지인 청량산(淸凉山)이 바로 오대산”이라고 믿어진 후, 불교성지로 굳건하게 서서히 바뀌게 된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6세기 말 7세기 중반 경, 보현보살이 상주하는 아미산,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보타산, 지장보살이 머무르는 구화산과 함께 ‘중국불교 4대 성지’로 자리 잡았다. 수나라.당나라 시절엔 인도.간다라(파키스탄).서역(중국 신강성) 등 외국에서 순례자가 올 만큼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성지가 됐다. 그러다 원나라 때 라마교가 오대산에 들어왔다. 청나라 조정은 몽골족과 티베트족에 대한 회유책으로 라마교를 중시, 라마교는 오대산 ‘중심 불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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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남선사 대전의 모서리 공포(맨위), 불광사 대웅보전 모습(가운데), 불광사 대웅보전에 걸려있는 편액. |
지금도 선종과 라마교불교는 오대산의 주요 종파지만,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선제(善濟)스님 등이 주도한 불교회(佛敎會)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산중엔 적지 않은 사찰이 있지만 라마계의 진해사(鎭海寺), 불광사(佛光寺), 현통사, 금각사, 탑원사 등은 특히 유명하다. 신라 혜초(慧超)스님이 오대산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여생을 보낸 것은 유명하다.
상념에 상념을 거듭하는 사이 차는 어느 새 중국 최고의 목조건축이 있는, 남선사 근방에 가 있었다. 남선사 대전(大殿)은 당 덕종 건중 3년(782)에 건축된 것으로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목조건축물이다. 남선사에 대한 기록을 뒤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단아함을 자랑한다. 대전 안에 봉안된 채색 소조상(彩色塑造像)은 현존하는 소조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본존과 좌우 각 8구씩 협시상이 다양한 크기로 배치돼 있다. 보살상들은 화려한 보관, 풍만한 용모, 잘룩한 허리, 얇은 천의의 유려한 자태 등을 자랑하는 당나라시기를 대표하는 조각이다.”
자료를 읽고 고개를 밖으로 돌리는 순간 백양나무 가로수가 눈에 들어왔다. 신강성 타클라마칸 사막을 돌아다닐 때 많이 보았던 나무. 남선사 입구에서 다시 만나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신강성의 백양나무는 푸른 잎이었는데, 오대산의 백양나무 가로수는 어느 새 노랗게 단풍이 들어있었다. ‘벌써 한달이나 지났고, 계절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하다’고 생각됐다. 노랗게 물든 백양나무 잎을 보고 있는데, 안내인 오승화씨가 “남선사에 도착했다”고 옆구리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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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857년에 세워진 중국 오대산 불광사 대웅보전. 남선사 대전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에 포함된다. |
남선사 입구에 내려 입장권을 사 들어갔다. 782년에 세워진 남선사 대전이 위용도 당당하게 그 자리에 그대로, 사진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게 서 있었다. 건중 3년(782)이란 묵서명이 남아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조건축. 그러나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에겐 ‘세계최고 목조건축’이란 위세보다 ‘천년 전에 조성된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라는 것이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기단 주변을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크게 돌고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의 다른 사찰처럼 신발을 신고 들어가게끔 돼 있었다. 방석에 무릎을 꿇고 삼배를 드렸다. 장엄한 본존과 찬란한 보살상들이 인자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한 명제 영평연간에 건립된 최초의 사찰은 낙양의 백마사였다. 섭마등스님과 축법란스님이 백마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낙양에 도착했으나,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 외국 빈객이 오면 머물던 홍려시(寺)에 숙소를 잡았다. 이듬해 따로 준비된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 새로 마련된 건물은 흰말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왔다는 의미에서 백마사로 불렸다. 원래 중국 관서(官署)의 이름이었던 사(寺)는 이후 점차 불교건축을 가리키는 고유명칭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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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불광사 대웅보전 편액. 불광진용선사(佛光眞容禪寺)라 적혀있다. |
불교가 확산되자 많은 부호들과 귀족들이 자신의 주택을 기부해 사찰로 삼았다. 이를 ‘사사위사(捨舍爲寺)’라 하는데, 귀족들이 내놓은 대저택의 전청(前廳)은 부처님을 모신 불당(佛堂), 후당(後堂)은 불경을 학습하는 경당(經堂), 곁채와 후원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생활공간(요사)으로 사용됐다. 이것이 후일 중국사찰의 근본 형식으로 굳어졌다. 물론 일주문.천왕문 등 다른 부속건물이 생기는 등 사찰의 규모는 커졌지만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경전을 공부하는 경루와 경당, 스님들이 거주하는 요사가 중국 사찰의 기본 건축물이 됐다. 대웅전과 경당을 일직선상에 놓고, 이들 건물의 양쪽과 사방에 손님을 맞거나 물건을 보관하는 건축물이 배치됐다. 일부 사찰에서는 앞뜰 양편에 종과 북을 걸어두는 종루(鐘樓)와 고루(鼓樓)를 배치하거나, 중심축 선상에 관음전.비로전 같은 전각을 세우기도 했다. 중국 사찰건축은 지금도 이런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선사도 마찬가지였다. 대전을 중심으로 맞은편에 대문이 있고, 좌우에 부속건물이 있는, 요새 같은 사각형 형세였다. 대전 안에 봉안된 소상(塑像)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화려한 채색, 굴곡이 분명한 조각, 생동감 있는 자세 등 모든 것이 멋졌다. 대전을 ‘자세히 참배’하고 남선사를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여러 번 사진을 찍었다. 물론 대전 안에서는 찍지 못하게 막았다. 시간에 쫓겨 남선사에서 오대산 불광사로 달려갔다. 857년에 세워진 불광사 대웅보전은 또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에 포함된다.
불광사 대웅보전 감동
불광사에 도착하니 어느새 어둑어둑 해져 있다. 마음도 급하고 몸도 급했다. 불광사도 마치 성새(城塞) 같았다. 입구의 문만 잠그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런 성 같았다. 첩첩이 쌓인 전각들을 뒤로 하고 대웅보전에 올라갔다. 정면 7칸, 정면 맞은편 중앙 5칸에 불단이 설치돼 있고, 본존과 보살상 32위(位)가 불단 위에 봉안돼 있었다. 화려한 광배, 섬세한 조각, 치밀한 채색, 마치 살아있는 듯한 얼굴표정, 진진한 손 자세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상들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사진과 실물은 확실히 달랐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낳다”는 말이 왜 그렇게 인구에 회자되는지 확실하게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1시간 정도 대웅보전 주변을 서성이며 감상에 빠졌다. 관리인이 “퇴근해야 된다”며 나가라고 하자, 별 수 없이 나왔다. 남선사 대전에서 받은 감동과는 확실히 달랐다. 물론 남선사 대전이 더 오래된 건축이지만, 종교적 감동은 불광사 대웅보전이 한 수 위인 것처럼 느껴졌다. 불광사 밖에 서서 한참이나 불광사를 쳐다보았다. 닫혀진 문, 너무 늦게 왔다는 자괴감 등이 어우러져 떠나기가 싫었다.
다시 차를 타고 서서히 오대산 본진(本陣) 속으로 들어갔다. 오대산을 빛내고 있는 사찰들이 즐비한 대회진, 그곳에 가기 위해 이미 어두운 산길을 달렸다. 다시 오대산을 생각했다. 평창 월정사 개산조 자장스님은 중국 오대산 태화지 가의 문수석상 앞에서 7일기도를 드리던 중 게송을 받았다. 전해 받은 게송을 풀기 위해 고민하는데 홀연 한 노스님이 나타나 내용을 풀어주고, 가사와 불두골.바루 등을 건네주었다. “당신 나라 동북방 명주경계에는 오대산이 있고 그곳엔 일만(一萬)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니 가서 뵙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띠집을 짓고 기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평창 오대산 월정사 터다. 그 자장율사가 기도한 중국 오대산에 늦은 밤에 마침내 도착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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