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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세 가지 고통(창35:16-29)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구속사를 보여준 야곱은 35장을 끝으로 요셉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준 후 역사 속으로 서서히 퇴장합니다. 그런데 35:16-29의 내용은 우리에게 다소 의아스런 대목을 보여 줍니다. 극한 위기를 극복한 야곱이 또 무슨 세 가지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여러 가지 크고 작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으나 고통은 인생 가운데 쉼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서 야곱이 당한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단락에서 벧엘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경험한 야곱이건만 누구든지 받아야 하는 인간의 고통은 계속됩니다. 이 고통은 이 땅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며, 누구든지 받아야 하는 고통입니다.
1. 아내 라헬의 죽음의 고통
17-18절,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라헬은 야곱이 사랑하던 여인이었습니다. 야곱은 빈털터리였으므로 결혼지참금 대신 삼촌 라반의 일을 해주며 7년을 일하는데,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토록 사랑하였던 라헬이 둘째 베냐민을 출산하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자신의 향수를 다 지내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 장례는 우리는 보통 호상(好喪)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라헬의 죽음은 호상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연사가 아니고 산고로 인한 극심한 고통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 중에 라헬은 둘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고 불렀습니다. 베노니는 '고통', '슬픔'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웬'과 '아들 '벤'이 합쳐진 말로 '나의 슬픔(고통)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신분이 되어 비록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지라도 여전히 이 세상에 거하는 불완전함 속에서 겪어야 하는 인생의 고통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라헬의 죽음의 고통은 성도가 부부간에 이 땅에서 당해야 하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아들 요셉을 낳은 후 또 다른 아들을 갖기 위해 그토록 갈망했던(30:34) 라헬이 그 꿈이 이뤄지는 기쁨의 순간을 눈앞에 둔 채 심한 산고로 인해 죽어가는 라헬을 바라보는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겟습니까?
향수를 다 누리다 죽는 자연사가 아니라 아들을 낳다 죽는 극한 고통을 당하여 죽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남편 야곱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이 고통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상처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느 사이에 체중은 줄어들었고, 밥맛도 없고 하루하루가 구름 위에 떠다니는 것 같기만 하며, 잠을 자다가도 작은 소리만 나도 놀라게 되고, 전화만 오면 가슴이 깜짝 깜짝 놀라는 노이로제 상태가 되어갑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자녀를 낳는 고통은 인간의 범죄한 이후 주어진 고통이었습니다. 이 고통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의인이로되 아직은 세상에 거하는 존재이므로 고통은 끓이지 않음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생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데서 오는 고통입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인간은 범죄한 후, 해산의 고통이 오고 죽음의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본문의 야곱도 이 고통을 이어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중 하나 일 뿐이었습니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아포름'입니다. 원문의 뜻은 '파괴'입니다. 이는 3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이고, 둘째, 에덴의 축복의 파괴이며, 셋째,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의 파괴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이 고통은 누구든지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 고통은 부부 사이의 관계의 파괴를 통하여 찾아오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살다가 사이가 악화될 수도 있고, 화목하게 살다가도 어느 한쪽이 먼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파괴될 때, 당하는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아픈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고통의 해결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관계의 파괴는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심각한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이 고통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시록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지간의 모든 고통의 문제는 예수님께 가야 해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인생의 고통의 문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록하고 있는 계시록에 가서 완전하게 해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의 최고의 축복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야곱이 전 단락에서 인생의 축복의 극치를 경험하였으나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 최고의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에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본문의 키워드는 예수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초림은 축복의 시작이요, 재림은 축복의 완성입니다. 부부 사별의 고통의 눈물도 우리의 진정한 신랑되신 예수 안에서 만이 완전 치유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정한 축복,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 자식 때문에 오는 고통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창35:22) 야곱의 고통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죽음의 고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르우벤 때문에 기가 막힌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장남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한 것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아닙니까? 야곱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를 믿었으나 인생의 고통은 죽는 그 순간까지 그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누구든지 피할 수 없으며, 이 땅에서는 온전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즉, 르우벤으로 인한 야곱의 고통은 사람이 자식으로 인해 받는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고통의 진원지는 어디인가? 창세기 4장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창4:7-9)
자식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사건을 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처절한 고통을 경험해야 했을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이와 같이 끔찍한 것입니다. 이 자녀들로 인한 인생의 고통은 야곱처럼 아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창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2아들은 축복이 아니라 일종의 저주였습니다. 자식이 많은 것에 대해 구약시대 사람들은 최고의 축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받게 되는 축복이 진정한 축복입니까?
물론 물질이 풍성한 것, 건강한 것 등은 하나님이 주신 귀하고 소중한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독한 죄성은 그것들을 왜곡시켜버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통해 보면 세상에서 받게 되는 축복이 진정한 축복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12 아들을 얻게 되는 최고의 축복을 받았으나 인간의 죄성으로 인하여 그것은 일종의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아내와 통간함으로 야곱의 가슴을 찢어놓았고, 시므온과 레위는 왜곡된 복수, 곧 잔인한 살인으로 인하여 온 가정을 최악의 위기로 몰아갔으며, 유다는 며느리와 잠자리를 함으로 야곱의 마음에 고통을 주었고, 요셉은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함으로 부모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으며, 베냐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랑하는 아내를 죽이는 고통 안겨주었습니다.
딸 디나는 세겜성에 들어가 구경하고 나가 강간당하는 고통을 주었고 나머지 아들들도 요셉을 파는데 작당하여 심장을 파고드는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이래도 자식 많음이 최고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까?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보라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자식으로부터 오는 이 인생의 고통도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만이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는 아담으로부터 오는 고통의 원리를 세상사는 날 동안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세상에서 오는 축복이 진정한 축복인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축복이 무엇입니까? 계21:4은 세계의 길이 로마로 통하였듯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예수로 통하게 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 그것은 예수 그 분, 그 자체이십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예수님만이 진정한 축복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것을 말해줍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요, 진정한 영광입니다.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십시오. 똑바로 바라볼 수 없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 없는 영광, 진정한 축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3. 아버지 이삭의 죽음의 고통
29절,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부모를 잃은 고통은 매우 가슴이 아픕니다. 자신의 못 다한 효도를 생각하며 극심한 자책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의 진원지도 창세기에서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4) 아담이 자녀들을 낳다가 생명이 다하자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줄어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자식들이 겪는 고통도 배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아버지 이삭을 장사하며 겪었던 야곱의 고통은 성도들이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이는 창세기 5장 사건의 연장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밟아야 할 전철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우리들이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은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고사성어 중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은 멎지 아니하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말이 있습니다. 부모는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고통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인간은 시작이 있으면 결론이 있는 존재임을 우리에게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처럼 살아가지만 인간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유한한 존재임을 하나님은 야곱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모를 잃는 이러한 인생의 고통 역시 예수 안에서 해결될 것임을 계시록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입성하게 될 천국에서는 죽음이 없게 될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사65:20)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예상치 못한 아픔과 고통과 슬픔이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어느 때라도 주님앞에 설 준비를 하고 사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 우리의 모든 슬픔과 눈물과 고통은 사라집니다.
영원한 안식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땅에서 혹 축복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예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장차 다가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이 와도 당황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인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은 천국이 아닙니다. 광야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다가올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그날 이 모든 고통이 끝나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소망삼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