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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고난을 이상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흉악한 죄인들에게만 임하는 징계로도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악으로 가득 찬 인류의 모순된 삶의 구조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료는 꽃이나 열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병든 고래의 기름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또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의 재료는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수목한계선”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웅크린 채 자란 나무라고 합니다. 고난이 인생을 아름답고, 값지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고난을 통해 단단한 삶의 옹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찬미 예수에는 최용덕씨가 중 환자실 병상에 기록했다는 “인생의 고난 중에”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찬미”라는 문화선교 팀을 막 출범시킨 그는 음악팀 창단 공연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밤 11시에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긴급 X-ray 촬영 후 그 자리에서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수술 후 4일 동안은 가슴에 튜브를 꽂은 채 생애 최악의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느냐?”고 반문하며 절규했습니다. 8일째 되던 날, 여전히 각종 기계들이 가득한 중 환자실에 있었던 그는 다음과 같은 가사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일생 중에 이해할 수도 없는
엄청난 고난이 닥칠 때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뼈를 깎고 살을 에이는 고통 후에
아름다운 진주가 탄생되듯
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당신을 성숙시키시기 원해요
때론 남녘으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봄기운처럼
때론 한 여름 몰아치는 대노한 폭풍우처럼
그 시험은 당신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알 순 없어요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을 성장케 하시려는지
그 고난을 통해 당신을 매질 하시려는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고난은 그 분의 사랑으로
인한 것이란 사실 분명히 기억 해야 해요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 고난의 골짜기를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써는
일일이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어서
때로는 불평하고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우리 주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지켜보시고
우리의 철부지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시길 원하시지요
그분은 묵묵히 웃으시며
그 고난의 시나리오를 진행시키시고
한 인간의 성숙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계시죠
가능하다면 그 처음 불평의 늪에서
빨리 벗어나야 해요
그 만큼 당신은 빨리 하나님의 계획 속에
동참케 되는 것이죠
모질고 험했던 그 고난이 다 지난 후
당신은 조용히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에 머물러 있는 또 하나의 당신의 모습을
겸손한 맘으로 바라보세요
어쩌면 몰골은
더 초라해지고 초췌해졌을지라도
그 안의 거듭 태어난 든든한 당신의 영혼
당신의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참 복된 인생입니다
이제 조용히 눈을 감읍시다
두 손을 모으고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의미를
그리고 기도해요 그리고 기뻐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그는 자신이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 때 자신의 결단이 헛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무저항주의자 간디는 “고난이란 인류의 표지(標識)이다. 이는 영원의 법칙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아이가 잘 살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 밀이 자란다는 것은 씨앗이 죽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고난의 불길을 거쳐서 정화됨이 없이 일어난 나라는 하나도 없다......우리는 존재에 대해서 불가결한 근원인 고난의 법칙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숙한 인생을 위해 고난은 필수적인 하나의 과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은 드디어 로마를 향해 떠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한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를 향해 가는 바울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천부장 루시아와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또 아그립바까지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바울에게서 어떤 혐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시기심만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바울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때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2년 이상 걸린 지루한 재판이 끝나고,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혐의가 벗겨졌습니다. 남은 것은 자유의 몸이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뱉어놓은 말 때문에 풀려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안타깝고 답답하지 않았겠습니까? 후회가 물밀 듯 밀려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보통 사람 같으면 얼마든지 땅을 치며 후회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습니다. 후회하지도, 땅을 치지도 않습니다. 묵묵히 로마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는 로마에 대한 비전으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가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중의 하나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가이사랴에서의 구금생활을 통해서 자신을 위해 세밀하게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① 그는 실제로 가이사랴에서 유대인들의 극심한 핍박으로부터 합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40인의 결사대까지 조직해서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총독의 감옥에 넣어 두심으로 손쉽게 핍박을 피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만약 자유로운 몸으로 재판을 받았다면, 교회는 그를 보호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인력과 경비를 낭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② 무엇보다 바울의 투옥은 교회와 유대인간의 갈등을 잠재우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핍박도 잠잠해졌습니다. 결국 바울의 투옥은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③ 바울은 또 가이사랴에서 충분히 휴식하고 충전할 수 있었습니다. 총독은 바울에게 자유로운 감옥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동안 쉬지 않고 강행된 선교일정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바울이 충분히 쉬면서 충전할 수 있는 천금같은 기회였습니다. ④ 뿐만 아니라 총독의 감옥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로마에서 파견된 고급 관리들과의 빈번한 교제를 통해 로마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총독의 감옥에서의 생활은 로마로 가기 위해 준비된 좋은 학교였던 것입니다.
⑤ 또 구금생활은 총독과 왕과 귀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감옥생활을 통해서 평소에는 쉽게 만날 수 없었던 고위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몸으로 체험한 바울은 자신이 뱉어 논 말 한마디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묵묵히 믿음으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은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뱉어놓은 말 한마디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될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우연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까지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후회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의 선택 때문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가 주어지더라도 합력 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묵묵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주어진 은혜는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죄수의 신세가 되어 로마로 향하는 바울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처량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속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배려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의 배타고 이달리야로 갈 일이 작정되매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 사도대의 백부장 율리오란 사람에게 맡기니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행선 할 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라”
바울은 가장 값싸고 안전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죄수의 몸이었지만 로마의 백부장이 호송하는 가운데 가장 안전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이사에게 호소한 죄수의 호송이므로 당시의 형편으로는 엄청난 경비였던 로마 여정을 로마정부의 공금으로 지불 받는 여행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로 향하는 그의 여정에는 함께 동행하는 수종자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사도 행전에서 네 번 사용되고 있는 “우리”라는 말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에 속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누가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는 21장 이후 무려 2년만에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지난 2년 동안 바울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바울 곁에 머물러 있었지만,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하여 자신을 숨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명의 반가운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입니다. 그는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의 제2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받은 그는 제3차 여행 때에는 에베소에서 바울을 도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함께 핍박을 당하다 옥에 갇히기까지 하였습니다. 복음을 받은 이후 한번도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는, 이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는 시점에서 다시 합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승은 그가 로마의 네로에 의하여 순교 당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때에 함께 동참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정치계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쉽게 볼 수 있는 거울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권좌에 오르면 생각과 이념과 철학도 없이 철새처럼 몰려 와 줄을 섭니다. 그러다가 권좌에서 내려오거나 철창 신세를 지게되면 신복처럼 섬기고 따르던 자들까지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달아나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죽으려 가는 길에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이요, 우정이요, 사명입니다. 물론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바울과 동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총독의 허락이 있어야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여정이 외롭거나 힘들지 않도록 누가와 아리스다고의 동행까지 세밀하게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때 바울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연약한 몸을 언제나 제 몸처럼 돌보는 의사 누가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섬기는 아리스다고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보면 비록 몸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그와 “우리”로서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힘써 기도했던 사람들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목을 껴안고 울며 작별하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의 선교에 동참하던 빌립보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로 그에게 보낼 헌금을 모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3절입니다.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받음을 허락하더니”
바울을 태운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은 시돈이었습니다. 그곳은 바울이 한 번도 들려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이미 복음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백부장 율리오를 통해 친절한 배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는 바울을 죄인 취급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또 다른 “우리” 곧, 스데반의 순교 이후 각지로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 시돈에 자리잡고 복음을 전파하던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도중에 어떤 위험을 만날지 모르는 위험한 여행을 하고 있던 바울에게 커다란 용기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곳곳에 “우리”를 숨겨두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로마로 향하는 바울을 위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어떤 “우리”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행18:10a)라고 말씀하시고, 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 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행23:11b)고 말씀하셨던 주님께서 그의 “우리”가 되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나 고난의 길을 가실 때에 함께 하는 “우리”는 없었습니다. 철저히 소외된 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소외된 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헤아리십니다. 슬픔을 당한 자들의 고독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그들 곁에 “우리”가 되셔서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우리”로 함께 하셨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우리”로 찾아가셨습니다. 사랑에 실패한 시몬 베드로에게 찾아가 진짜 “우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쫓겨가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백성들은 생사를 함께 하는 “우리”관계였습니다. 그들은 비록 신분도 없고, 가진 것 없었지만 생명을 함께 나누는 “우리”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자신과 생사를 함께 하는 수백 명의 백성들보다 더 든든한 “우리”가 계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와 “우리”의 관계를 맺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1, 4a)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우리”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우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예배하시고 붙여놓으신 “우리”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같이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우리”입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은 누구와도 진정한 “우리”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패기가 넘치던 젊은 날, 이스라엘 백성들과 “우리”가 되기를 원했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학대하는 애굽의 군사를 쳐죽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를 “우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인자로 고발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후 하나님과 “우리”가 된 그가 백성을 찾았을 때, 백성들은 그를 진정한 “우리”로 받아들여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더 하나님과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우리”가 되어 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우리”의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함께 더불어 “우리”가 될 수 있는 조건부터 갖추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우리”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8절입니다.
“또 거기서 우리가 떠나가다가 바람의 거스림을 피하여 구브로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 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성에 이르러 거기서 백부장이 이달리야로 가려하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오르게 하니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의지하고 행선 하여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
바울은 고후1:8-9a절을 통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 고후1:3절을 통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힘에 지나는 고난 속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찬송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렇게 심각한 고난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겠습니까? ① 고난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후12:5b절에서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고백했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신의 약함과 허물을 절감한 그는, 그런 자신을 사도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② 고난을 통해 고난 당하는 이웃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후1:4절을 통해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고난 당하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고난의 괴로움을 주시면서 까지 자기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사실 고난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은 고난 당한 사람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성숙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고난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후1:9b절을 통해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④ 고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롬8::17-18절을 통해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특권이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시련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벧전4:13)고 말했던 것입니다. ⑤ 고난을 통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5:8-9a절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23: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 역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정금같이 거듭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해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묵묵히 믿음으로 순종한 바울이 가장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과 함께 좋은 사람들까지도 붙여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로마를 향해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라는 책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북해에서 청어를 잡는 사람들에게는 청어를 잡는 것만큼이나, 잡은 청어를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런던까지 산채로 운반하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청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런던에 도착했을 때에는 언제나 대부분의 청어들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부만은 청어를 산채로 운반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결을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청어를 넣은 통에 메기를 한 마리씩 집어넣습니다. 메기는 청어를 잡아먹는데 런던까지 오는 동안 기껏해야 두세 마리 정도만 잡아먹지 그 이상은 배가 불러서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청어들은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쳐 다니기 때문에 싱싱한 채로 런던까지 올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고난이 더 강하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살 소망마저도 끊어진 것 같은 고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삶은 아무 것도 없는 초라한 삶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의 삶에 필요한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다 채워졌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는 로마로 향하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수많은 “우리” 곧 누가와 아리스다고와 백부장과 많은 당신을 사랑하는 백성들을 준비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 곧 로마는 무엇입니까? 그 로마를 향해 가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루터는 “좋은 교회의 표시는 고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난 없이 좋은 교회가 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성도들은 좋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명을 향해 가는 길에 고난이 있습니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다하는 순간까지 지켜주실 것입니다. 당신의 뜻과 섭리를 통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위로와 힘이 되는 “우리”를 붙여주실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고난이 주어지든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곧 로마를 향해 믿음으로 끝까지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