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우리가 나주임씨이고 정자공파라고 들었다
부친(逸松 鐘壽 1918~1999)은 4대종손이고 8남매의 장자로 나에게는 다섯명의 고모님들과
두분의 숙부님이 계셨고 모친(옥천趙月禮 1919~1983)이 살아계셨던 1982년 까지는 일년에 9번의
제사와 설 및 한가위 명절에 차례를 지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살림에 제사가 많아 어린시절 모친이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지만
나는 그래도 제사날이 돌아오면 북적이는 분위기등으로 즐거웠다.
부친은 모친이 돌아가신 1983년 부터 집안의 모든 제사를 폐하고 선산에서 10월3일 한번의 성묘로 대체하는
당신으로서는 큰 용단을 내리셨다 .
숙부님 고모님들이 당신들의 부모님 제사는 지내기를 원하시며 서운해 하셨지만 종손으로써
조부모,증조부모 ,고조부모의 윗대 제사를 폐하는데 어찌 부모의 제사만을 지낼 수 있겠느냐?며
다음 대에서 부모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각자 집안에서의 선택사항이라 하시었다.
4대 봉제사가 세태가 바뀌어 길게 이어나갈 수 없으므로 당신이 가문의 오랜 전통을 바꾸고 사후에
조상님께 죄를 받으시겠다 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부친은 종손으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6.25동란 등 어려운 시대를 살으셨지만
집안을 돌보고 조상 추모와 형제 족친과의 화목을 평생 행동으로 자식들에게 보여주셨다
그 후 제사의 형식은 바뀌었지만 지난 40년 동안 10월 성묘일은 잘 지켜져 전국 각지는 물론 미국 유럽등
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일가도 만나는 즐겁고 기다려지는기념일이 되고있다
정자공 복 할아버지가 1556년 나주회진에 영모정을 짓고 부모를 성심으로 추모한 봉제사의
가풍이 420여년 이어지다 현세에 이르러 삶의 형태가 바뀜에 따라 부친께서 용단하신대로 부모의 제사는
형제자매가 함께 지내고 조부모이상의 윗대 제사는 선산의 묘에서 전 일가가 함께 추억하고 기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전승됨을 본다. .
지난 5월21일 옛 학우들과 코로나로 미루어진 從心소풍길에 여수 소호의 船所 (거북선 제작소)에 들렀다가
임진왜란에 활약한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자리에사 거북선을 최초설계 입안한 사람이 나주임씨 라고 친구가 말하여 귀가 번쩍 띄였다
이에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는 강항의 수은집 국역본을 구하고 집안 족보 (인터넷에 등재된)등 을 참조하여
"임진왜란 18년전 창달린 배 거북선을 수군에 배치한 인물 ! 임복"
이라는 글을 이 곳 카페와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것이 선조의 삶에 대해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한달 전까지도 정자공이 임복을 칭하는 것 정자공의 정자(正字)가 복 할아버지의 관직 명칭이라는 것도
도 알지못하였다 . 지면에 기록된 강항 선생의 풍암임공 행장을 콤퓨터로 옮기다 보니 그 내용을 꼼꼼히
마음에 새기는 효과가 있었고 직계 조상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면서 많은 생각과 궁금증이 들었다 .
1 .강항선생은 왜 기록을 남기고 싶었을까? 임진왜란 관련한 인물의 행장편에 임복할아버지 ,창의사 김천일公 .
율정 윤진公을 선정한 이유나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2 16세 정자공 복할아버지가 돌아가실때 일곱살 과 네살 어린 두 아들을 두었다는데
이들 어머니께서는 남편없이 어떻게 자식들을 키웠을까 ?
3. 17세 협 할아버지가 26살로 생을 마칠때 여섯살과 갓난아이 두 아이을 두고 가셨는데
이들 어머니께서는 남편없이 어떻게 자식들을 키웠을까?
4. 23세 달원 할아버지는 소뫼 죽산안씨 집안 처가 마을에 정착하신 것인데
안씨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을까?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에 달원 할아버지로 부터 6대를 살았던 우리 집안 일가는
정자공 복 - 협 - 타 -일유- 정- 회 -상하 -달원 -구진-으로 이어진 후손들이다
보성군 문덕면이기도 하였던 우산(牛山)은 우리말로 소뫼로 불린다
23세 달원 할아버지(1719~1763)는 상하 할아버지의 두째 아드님으로 소뫼에 일가를 이루고 있던
죽산 안씨 집안의 안(安)씨 처자와 혼인하여 소뫼에 정착하셨다
240여년 간 조상이 살았던 소뫼마을은 주암댐을 건설(1984년착공)하면서 마을은 수몰되었고
지금은 아무도살지 않고 마을 동남쪽 산자락 아름다운 사슴동산 (美鹿洞)에 조상을 모신 묘들만 남아있다.
매년 10월3일은 전국에 산재되어 열심히 살고 있는 소뫼 나주임가들이 미록동 선산으로 소풍가는 날이다
1.1.강항 선생은 기록의 힘을 믿고 자신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 기록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견딜 수 없는 것을
기록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가 기록한 많은 것 중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는 415년의 시공을 넘어 나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임진왜란을 온몸으로 겪은 그는 임진왜란의 숨겨진 영웅 . 기억해 주어야할 사실을 기록한 것이리라
당신의 시대에 당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많은 것을 남겨 현세에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수은 강항
아래는 임공 행장의 마지막 구절로 강항선생의 바램이다
감히 내 자신의 재주없슴을 잊고
그 중 큰 절목(節目)을 뽑아서 행장(行狀)을 만들어 세상에 발표할 만한 군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더 늦기전에 나도 내 자신의 재주 없슴을 잊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정리해보아야겠다.
..
2.2 17세 임서 임협의 어머니 남평서씨 (족보 기록 )
정자공 임복이 돌아가실때 서는 7살 협은 4살이었다
서와 협의 어머나 남평서씨 할머님 (정미1547 ~ 정사1617)은 70세까지 당시 기준으로는 장수하신다
3.3 .18세 임타와 임위의 어머니 음성 박씨 (족보 기록)
유호공 협 (1573~1598.2) 은 26년의 짧은 생을 마치고 1598년 2월에 졸(卒) 하셨다
부인 박씨는 28세이었고 큰아드님 타는 6살 두째아드님 위는 3개월된 갓난아기였다
타와 위의 어머니 ( 음성 박씨 할머니 1571~ 1637 )꼐서는 66세를 사셨다.
4.4. 24세 명진.주진 구진의 어머니 죽산 안씨 (족보 기록)
남편 우계공 달원이 1763년 44세로 졸하실때 부인 안씨는 41세였고 명진은 16살 주진은 다섯살
구진은 한살이었고 안씨 할머니(1722~1794)께서는 72세를 사셨다 .
260년전 한 살 애기셨던 구진 할아버지내외 묘소가 이번 종형제 들의 협의와 협조로
2023년 5월7일 부친 달원 할아버지내외 묘소옆으로 이장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옛날 옛적 400여 전에 남편 사후 어린자식들을 훌륭히 키우신
16세 남평 서씨 할머님과 17세 음성 박씨 할머님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終
2023.5.7일 23세 우계공 달원할아버지내외 묘소 오른쪽으로 이장된 24세 구진할아버지 내외 묘소
참관 : 윤영희 (故 임하택 室), 임순택 ,임용택 .임정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