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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우 바이오그라피 13)
[에피소드27]
신용정보를 그만두기 직전 은행 선배인 K에게 전화를 걸었다. K선배는 아내의 주식투자로 인한 손실로 내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자포자기하고 있었을 때 나를 위로해 주고 용기를 준 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는 타조 농장을 하다가 실패하고, 프리 코스닥 투자에 전 재산을 올 인했다. 그런데 그 회사가 상장되기 전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근육 암에 걸렸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는 비록 암을 치료한다 해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러나 만약 치료하지 않는 다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것이다.
전화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는 숨이 몹시 거칠고 떨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당시 나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와 같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 강원도의 버려진 어느 폐가(廢家)를 수리해서 같이 살다가 죽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그의 호흡이 거칠어져 더 이상 말소리를 알아듣기가 곤란했다. 나는 좀 진정(鎭靜)이 되면 한 번 만나자고 제의하고 전화를 놓았다. 그러고서 이틀 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소식이 그의 부인을 통해서 들려왔다.
그는 전화 통화 후 다음 날 그가 살던 아파트 꼭대기에서 투신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참담하고 허망(虛妄)한 최후였다. 그는 내가 삶의 위기에 처했을 때 큰 도움을 주었는데, 나는 그를 위해 도움을 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빈소에 가서 조문하는 것 외에는.... .
[에피소드28]
영재학교에 들어간 수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일반고교와는 달리 선생들은 대부분 석사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분위기는 지성과 덕성, 체력의 전인적(全人的) 함양보다는 오직 공부가 전부인 곳이었다. 숙제도 엄청나게 많이 내주었고 선생들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학생들 상호간, 선생과 학생 간에는 이기적이고 냉랭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수진이는 인간적 따뜻함은 느껴 볼 수가 없었다. 또한 다른 학생들은 주말이면 자기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지만, 수진이는 기숙사에서 외롭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수진이는 학교생활에 점점 흥미를 잃어버리고 고독을 이기지 못해 인터넷 소설에 빠져 들어갔다. 인터넷 소설에 빠져 밤을 샐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아침 수업에 지각하거나 결석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 이런 행동을 반복하자 학교당국에서는 드디어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자세한 상황을 모른 채 사태는 점점 심각해 갔다. 수진이가 다니는 학교는 학생들의 기숙사비나 학비를 연방정부나 주정부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학칙이 굉장히 엄격했다. 따라서 납득할 수 없는 장기 지각이나 결석은 퇴교사유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수진이의 법적인 보호자인 둘째누나도 나에게 이러한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지 않아, 나는 닥쳐온 수진이의 불행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수진이는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태한 행동을 반복하다가 퇴교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다. 수진이가 영재학교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나는 너무나 기뻐하고 자랑스러웠는데, 그러나 결과적으로 일반 공립학교 보다 더 못한 결말을 가져 온 것이다. 부모의 마음도 아프기 짝이 없는데, 본인의 마음이야 얼마나 상처가 크고 깊을 것이겠는가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팠다. 사실 부모도 없는 타국 땅에서 수진이가 어린 나이에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애초에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수진이의 노스 고교(Naperville North High School) 1년 때 친하게 지내던 대만 출신 친구도 타국에서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다시 고국 대만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진이는 그 후 다시 예전에 다니던 네이퍼빌 노스 하이스쿨로 복귀했다.
[에피소드29]
수진이가 여동생 집에서 나와 대만으로 돌아간 고교 친구의 어머니인 대만인 아주머니 집으로 월세로 들어갔다. 그런데 대만인 아주머니는 아주 인색한 사람으로서 조금만 집에 돈이 들어갈 만한 행동을 하면 여지없이 주의를 주었다. 특히 전기와 물을 많이 사용하는 것과 소리를 크게 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마루를 걸어갈 때도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발뒤꿈치를 들고 걸어야 했다. 수진이는 이런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벼룩 신문에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두 사람이 공동으로 월세를 내는 원룸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그런데 여우를 피하면 호랑이를 만난다고 룸메이트가 이상한 언니였다. 그녀는 서울에서 온 기능직(미용사) 이민자였는데 행동이 조심스럽지 않은 여자였다. 그녀는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는 고교생인 수진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집에 백인남자들을 데리고 오는 등 심히 우려할만한 행동을 하였다. 나중에 그녀는 바다가 있는 기후 좋은 곳(샌디에고)으로 떠나면서 수진이를 같이 데려가려고 바람을 넣었다. 외로운 생활에 지친 수진이는 그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 나에게 그 곳에 있는 고교에 전학 가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나는 미국 누나에게서 그와 같은 자초지종을 듣고, 수진이를 어거(馭車)하여 여동생의 집(네이퍼빌 해리티지 아파트)으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에피소드30]
아내는 지인의 소개로 동대문 의류상가에 판매사원으로 취직했다. 내가 놀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에 일하러 나간 것이다. 아내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어 특별히 야간에 일하는 자리를 구했다. 아내는 저녁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와 자기 시작하는데, 어머니의 아침과 점심을 준비하느라 낮에 제대로 잠도 못 자는 것 같았다.
인간은 밤에 자도록 만들어 진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수면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 분비도 빛이 없는 컴컴한 밤 10시 이후에 주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이유로, 햇볕이 들어오고 주위가 시끄러운 낮 시간에는 제대로 수면을 취할 수 없다. 따라서 1년 정도 야간 일을 한 아내는 수면부족으로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다.
[에피소드31]
L이라는 대학 입학 친구가 있었다. L은 연세대 경영학과 71년 입학생 중에서 다단계 인생으로 점철된 S와 더불어 두 명의 천연기념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약간 이국적으로 생긴 모습이었다. 얼굴이 특이하게 터키인이나 파키스탄 인처럼 보였고, 키가 작달막했다. 연대 경영학과를 나와 해병대 장교로 군 복무했고, 제대 후 대우 중공업과 자동차보험회사에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벌과 나이에 비해 진급이 이상하게 늦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술친구이며 목욕파트너가 되었다. 목욕친구라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심심해서 나는 혼자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괴벽이 있다. L은 목욕을 일본인 이상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목욕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L을 불렀고, 그는 선뜻 목욕탕에 동행해 주었다. 우리는 탕 안에서 이런 저런 세상얘기를 나누었고, 목욕이 끝난 후에는 치킨 집에 가서 호프 한잔을 했었다.
대학시절에는 그는 아버지가 대구 중앙통에서 가장 큰 맞춤양복점을 했기 때문에 지방 하숙생 중에서는 여유 있는 생활을 보냈었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게도 대학 신입생 때 소매치기에 몰려 경찰에 고문까지 당하기도 했었다. 나중에 그는 진짜 범인이 잡혀서 무죄로 풀려났지만 사건이 신문에 까지 보도되어 마음의 상처가 컸다. L을 고문한 형사는 L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L은 이를 거부해 결국 파면 조치되었다. L은 고혈압과 당뇨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술을 탐닉했다. 한번은 술에 떡이 되어가지고 거리를 헤매다가 취객을 상대로 전문털이를 하는 깡패에게 머리에 벽돌로 “뻑치기”를 당해 의식을 잃기도 했다. 운이 없었다면 저 세상으로 갈 뻔했던 것이다.
그는 술에 만취해서 집에 가면 마누라를 두들겨 패기도 했다. 그의 처는 다소 정신이 미약한 점이 있어 살림살이가 신통찮았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평소에 쌓여있던 감정이 한 번씩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학교공부를 하지 않아 그의 속을 많이 썩였다. 또한 그는 그가 다니는 보험회사의 실적에 대한 엄청난 강박관념과 스트레스로 인해 술만 먹으면 분노와 괴로움이 화산처럼 분출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와 같이 있을 때는 더없이 선량한데 그의 처와 외아들에게는 이상하게 감정의 통제를 못하고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술을 먹었을 때는 그 강도가 심했다. 마침내 그의 처는 신경이 쇠약해져 친정에 내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는 불광동 산골짜기에 있는 90년 중반 당시 2천만원의 적빈(赤貧)한 전셋집에서 아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의 처가 없다보니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어머니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몸이 반신불수이다 보니 혼자 집에 있을 때 대소변을 아무데나 배설했다. 그가 집에 오면 가장 큰 일이 어머니가 대소변을 배설한 이불을 세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의 병수발 일이 너무 힘들어 동사무소와 다니는 성당에 도움을 요청 했다. 그 후부터 무료 간병인이 가끔 와서 어머니를 돌보아 주곤 했다.
그는 보험회사에 다니다가 퇴직하고는 프리랜서로서 계속 보험영업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주식에 빠져 보험에서 힘들게 벌인 돈을 전부 주식에 쏟아 붓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투자한 주식 가격이 오르면 그는 나를 불러내 술을 사주기도 했다. 주식도 마약처럼 중독증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깊이 중독된 것 같았다. 그는 주식에 대한 특별강의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책을 사다 보는 등 연구도 엄청나게 했다. 낮 2시까지는 주식투자를 하고 그 후에는 보험영업을 하면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무리에 무리를 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아내가 없는 처지라 집안청소며 밥과 반찬 장만, 세탁, 설거지 등을 도맡아 처리해야만 했다.
병 때문인지 그의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등이 가렵다고 긁어 달라” 했다. 그는 잠을 자다가도 어머니가 등이 가렵다고 잠을 깨우면 일어나 등을 긁어 드려야 했다. 그러나 고된 노동에 지쳐 잠이 항상 부족한 L은 등을 긁다가 짜증이 나면, 욕을 하며 어머니의 등을 세차게 때리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술을 자주 같이 마시던 같은 J보험회사의 상관(부장)인 그의 고교동기가 있었다. 보험회사의 실적집계를 하는 가장 중요한 월말 어느 날 둘이서 신세한탄을 하며 술집에서 술을 잔뜩 마셨다. 그러난 그것도 부족해서 가게에서 술을 사가지고 여관에 들어가서 또 술을 먹기 시작했다. 열이 나는지 두 사람은 옷을 다 벗고 술을 먹었다. 그러다가 술만 먹으면 주사(酒邪)가 심한 동기가 L의 머리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머리가 금세 부어올랐다. 주먹이 계속 날아왔다. 해병장교 출신인 L도 화가 치밀어 오르자 주먹으로 상대방의 눈을 강타했다. 상대의 눈이 시커멓게 퉁퉁 부었다. 그리고는 둘 다 블랙아웃(Black out)상태가 되어 치고받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둘의 모습은 마치 외계인 같았다. 평상시 보험실적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끼던 두 사람이 술만 먹으면 이런 모양으로 가끔 폭발했던 것이다. 회사에 일이 있어 출근을 하니 모든 사람의 시선이 L의 얼굴에 집중되었다.
한번은 나와 같이 명동 뒷골목 백반 집에서 술을 먹었는데 그날따라 L이 약하다는 막걸리를 마셨다. 둘이서 대취해서 헤어졌는데 다음날 L에게서 전화가 왔다. 출근하려고 하는데 신발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마 그는 그날 신을 잊어버리고 맨발로 집에 들어갔던 것 같았다. 바지도 찢어지고 엉망이었다고 했다.
그는 아내가 부재한 극심한 외로움과 스트레스 때문에 불광동 그의 집 인근에 있는 호프집에 퇴근하면서 종종 들렸다. 그는 거기서 주점 아주머니와 술잔을 기울이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주점 아주머니는 매상을 올려주는 그를 위해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L은 고기를 무척 좋아했다. 골목을 걷다가 돼지갈비 양념냄새나 삼겹살 굽는 냄새가 솔솔 나면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특히 햄 통조림을 좋아했다. 그만큼 고기를 좋아하더니 어느 날 그의 항문에서 혈변이 나왔다. 검사를 해보니 대장암 말기라고 했다. 그가 암에 걸린 것은 그동안 육체적으로 너무 고달픈 생활을 했고, 정신적으로도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왔으며, 평상시 기름기와 콜레스테롤이 많은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너무 좋아한 데서 기인한 복합적인 결과인 것 같았다.
그는 주식을 하면서 많은 돈을 날리고 괴로워했는데 그 점도 원인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대장암에 걸리고 난 후에 그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불쌍하고, 본인의 투병의지도 강해 항암치료를 위시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회복하려고 애썼다. 그는 집 뒤에 있는 야산에 가서 모기장을 쳐놓고 오랜 시간 단전호흡도 하고, 경락(經絡)을 자극한다고 맨발로 약수터까지 물동이를 가지고 걷는 등 온 정성을 기울였다. 안현필의 안식된장과 다시마등 해조류, 콩으로 만든 음식과 과일, 야채 등을 오랫동안 먹기도 했다. 건강에 관한 책이란 책은 빠짐없이 구입해 읽고 실천했다. “물 따로, 밥 따로 음양요법”이란 건강비법을 읽고 자연치유력을 높이기 위해서 물과 식사를 시간적으로 조절해 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도 허사였다. 그가 죽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자기 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을 아주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반신불수로 불행한 인생을 살고 간 어머니에게 제대로 봉양을 하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난 후에 긴장이 풀렸는지 몸이 극도로 쇠약해 져 갔다. 체중이 50KG이하로 내려갔다. 목욕을 워낙 좋아 한 그가 나와 같이 목욕을 하자고 했을 때, 그의 모습은 마치 해골과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에게 물장난을 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그가 한 마지막 목욕이었다.
그가 죽기 전 그의 머리맡에는 고교생인 그의 철없는 아들이 의자에 앉아 천주교의 임종기도문을 끝없이 읽고 있었다. 그는 혼수상태였는데 간혹 정신이 돌아오면 나에게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마침내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고단했던 이 세상을 마감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들과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재산을 더 남기려고 보험영업을 맹렬하게 시도했다. 그의 죽어가는 모습에 모두가 협조하여 4000만원의 보험수수료가 모였다. 남은 재산은 대구의 집을 포함하여 2억이 넘는 돈이 아내와 아들에게 남겨졌다. 그의 잦은 구타로 정신적인 타격을 받고 친정에서 생활해 왔던 그의 아내는 그가 죽기 전에 그를 만나 죽어가는 그의 쇠약한 모습을 보고 몹시 울었다고 한다. 그의 시립병원 장례식장에는 평소 정이 많았던 사람이었기에 대학동창을 포함해 섭섭지 않게 조문객들이 왔지만, 부의금 때문에 그의 남동생과 처가 식구들 간에 고성이 오고간 다툼이 있었다. 벽제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은 그의 고향 대구 근교 모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납골당까지 끝까지 함께 한 사람은 그의 남동생, 나의 친구인 그의 사촌동생, 그리고 나, 그의 유일한 외동아들 네 사람뿐이었다.
그가 가고 난 후에, 나는 한동안 깊은 상실과 공백감에 한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리고 어디선가 그가 부르는 다정한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제는 나 혼자 목욕을 해야 했고, 외로울 때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며 정담(情談)을 나눌 따뜻한 친구조차 없는 삭막(索漠)한 세상에 살게 되었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