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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회 밀양 답산後記 ( 2009년4월12일)
초여름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오늘 踏山은 忠節의 고장 密陽 부북면 김종직생가 및 묘소를 시작으로 여러 묘소를
답사할 예정이다.
쾌청한 날씨에 회원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8시 30분 출발 !. 드디어 오늘의 踏山은 시작이다. 차내의 공기가 뜨겁다. 특히 강 사장님의 野談 속에 웃고 웃다 보니,
벌써 동대구 새 부산 고속도로를 통해 밀양나들목을 벗어나 부북면 김종직 생가로 달린다.
마을 어구에서 생가와 묘소가 보인다.
연두색으로 변해가는 산과 노란 개나리의 합작은 저절로 삶에 에너지가 생긴다.
<멀리 보이는 마을과 김종직 墓所>
김종직 生家 및 墓所는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 안쪽 背山으로, 꽃잎 속에 자리 잡은 追遠齋는 학자와 충신의 심성을
잘 나타내는 形局으로 좋은 吉地라 하겠다.
이곳은 강호산인 金叔滋(김숙자)가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며,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점필재 金宗直이 생장하고
별세한 곳이기도 하다.
재실 追遠齋는 西坐東向으로 6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고고한 선비의 기풍을 닮아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다. 당시 이 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살림채의 규모로 지어졌다.
점필재의 생가(生家)뿐 아니라 그가 만년에 제자들과 토론하고 강학하던 쌍수정(雙樹亭)도 있었고 뒷산에는 점필재
의 묘소가 있는 성지(聖地)이다.
追遠齋 뒤편에 자리한 유택은 氈脣자리가 허약하여 쏠리는 洩氣를 막고자 돌로 성을 쌓았으니,
세월이 흘려 풀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나무들로 덮이는 좋은 세상을 맞이했으면......
<胸 像>
두 父子는 모두 文科에 及第하여 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吉再의 학통을 이어 性理學을 세우고 뿌리를 내리게 한
歷史的 人物이니 人傑은 地靈이라 했던가?.
항상 " 志操있는 지식인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국가 사회의 운명을 좌우하는 지도자가
가져야 할 美德이고, 眞實을 논하여 올바른 도리를 일깨움으로써 不義를 자행하는 권력자의 오만을 견제하고 사회
정의를 지켜 가는 것은 양심을 가진 지식인의 영원한 責務이다." 라고 강조한 金宗直선생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것은?.
*갑시다!. 무안면으로 출발*****
<점필재 金宗直 묘역>
마을 뒷산을 넘어 길가에 있는 `강호산인 김숙자` 묘역도 보고, 무안면 무안리의 중종 30년 풍천 임씨 집안에서
태어나 13세에 출가한 "사명당 표충비"도 보면서, 마침 "무안면 고추축제"로 쳐놓은 포장 속에서 시원한 칼국수에
쉐주한잔 생각이 절로 나는데, 먼 곳부터 보기로 정하고, 聚遠堂 조광익(曺光益)묘 및 江東邱가 있는
초동면으로 出發이다**
<表忠碑閣>
취원당(聚遠堂) 조광익선생은 본관이 昌寧으로. 벼슬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중종 32년에 경남 청원군
북면 지개동에서 贈 左參贊 魯齋 曺允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그 뒤 형조 정랑으로 승진되어 있으면서 자원하여 평안도 도사가 되었는데 이는 동생인 지산(芝山)
선생이 江東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형제가 자주 만나 한스러운 회포를 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1578년(선조 11) 5월 5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아쉬운가?.
<聚遠堂 曺光益 묘>
평안도 강동의 백성이 선생의 孝友와 도덕 문장에 순화 감복하여 강동의 흙을 밀양으로 옮겨와서 선생의 무덤
같은 봉분을 만들었으니 江東 邱(강동의 언덕)의 내력은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도 남지 않을까?.
五峯山 白虎자락 끝부분의 취원당 묘는 酉坐卯向으로 . 左水到右 . 乙辰破 自旺向, 生氣넘치는 穴場으로 보이나
아쉬운 것은 전순이 없어 餘氣의 洩氣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침 이곳에 도착하니 聚遠堂선생을 모신 五峯書院의 享祀日이라 후손에게 선생에 관한 설명도 잘 듣고,
출출한 차에 풍성한 대접을 받았으니, 금강산 구경도 식후라 했거늘 무엇을 더****.
부디 後孫들 만수무강하시길.
<강동의 언덕 江東邱>
떡과 술과 단술로 시장기를 풀고 나니 절로 흥이 솟는다.
돌아가는 길에 변계량 선생 유적지도 보고, 초동면 봉황리에 있는 선략장군 손유호 묘(宣略將軍孫逾好 墓)로
향했다.
密陽孫氏로 휘(諱)는 유호(攸好)이며 자(字)는 一德이다.
<아름답고 素朴한 孫攸好 묘>
1448年 丙午에 病患으로 돌아가시니 享年 77세 였다.
묘역은 陽谷里의 북쪽산 남향 언덕에 단순하면서도 품위있게 고려 양식의 토대위에 亥坐로 자리하니
鳳凰抱卵形局으로 보여지고, 그 위에는 高祖 密城君 先榮의 墓가 있다.
墓碑는 朱色으로 1450年 조산대부성균사예단양박욱근지(朝散大夫成均司藝丹陽朴彧謹誌)로 수비(竪碑)하였으며,
神道碑는 길가 碑閣 속에 있다.
5분 거리에 있는 무안면 연상리에 있는 어변당 박곤(魚變堂 朴坤) 生家를 찾았다.
호가 어변당인 그는 武臣(무신)으로서 여러 벼슬을 거치다가 40대 중반에 고향으로 돌아와 이 건물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건물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일생에 비추어 볼 때 1430~1440년대쯤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변당과 은행나무>
2칸의 대청과 1칸의 방으로 구성된 건물은 그 건축적 성격으로 볼 때 소박한 조선 후기 별당형 사랑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 앞에 있는 은행나무는 장군께서 직접 심은 나무라고 전해온다.
건물 앞에는 赤龍池라는 네모난 연못이 있는데, 경상남도 기념물 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연못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풍류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魚變(어변)이라는 堂號 역시 이 연못과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魚變堂과 赤龍池>
갑시다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안면에 있는 사명대사의 생가와 유물관을 향해 출발. 그런데 결국 면 소재지에서 늦은 점심 냉면을 들고
쉬는 둥 마는 둥****** 떠나 볼 가요, 한결 부드럽다.
무안면 고라리에는 조선 중기 고승 사명당(1544∼1610)이 태어난 곳이다. 속명은 응규이며 호가 사명당이다.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중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병을 모아 의병장으로서 활약했다.
<사명대사 구택>
이곳은 삼국의 명장이 날 명산이라는 풍수설이 전해오는 괴나리에서 사명대사의 조부 때부터 살았으며,
대사께서는 1544년(중종 30년)에 진사 임수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3세 때 가출하여 직지사 신묵화상에게
가서 승려가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이곳 괴나리에서 보냈으며, 사명대사의 어린시절에 얽힌 많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사명대사가 때로는 고향으로 돌아올 때 괴나리를 바라보면서 쉬던 바위가 아직도 전해
오고 있다.
(구택 전경>
舊宅의 坐向은 정확히 알수 없으나 去水나 龍脈의 형세로 보아 癸坐丁向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子坐午向으로 볼수도 있으나 이 경우 巽巳破에 子坐午向은 殺人大黃泉이되어 극히 凶한 반면에
癸坐丁向은 右水하여 혈을 감싸주니 正養向은 吉向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家相法으로 복원한 현재의 가옥은 기두가 子方에 있어 東舍宅에 해당하고 부엌은 壬方에 있고 대문은
午方에 있어 陽宅의 3要素가 전부 같은 方位에 위치하고 있어 吉한 舍宅이라 하겠다.
松雲大師舊宅이라는 큰 현판을 달아 놓은 출입문을 들어서면 대사께서 거처하던 곳으로 대사의 호를 그대로
당호로 사용한 단순하면서도 아담한 사랑채 四溟堂을 볼 수 있으며, 그 뒤로는 대사께서 태어나서 자란
육영당(毓英堂)이 소박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 찾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바깥 왼쪽에 사당의 출입문에 奮忠舒難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三門 안에 엄숙함을 상징하는 肅淸祠가 있다.
<유적지 全景>
멀리 바라보이는 영축산 골짜기를 이용하여 사명대사의 유적지를 조성하였다.
사명대사 기념관은 忠義門을 통해 중앙광장, 사명대사기념관, 마지막으로 사명당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할
추모공간으로 추모광장을 조성하였다.
<추모광장>
끝으로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악산 자락에 있는 松隱 朴翊 묘소로 향했다.
송은 박익(松隱 朴翊)은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자 밀성대군의 15세손으로 태사공 휘 언부의 7세손 銀山府院君
文憲公 永均의 아들로 1332, 고려 충숙왕후 1년에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묘소는 艮寅坐로 화악산의 정기받은 主山과 靑龍. 白虎. 案山. 朝山이 잘 交俠 되고 강한 生氣 혈장으로 음택의
氣運은 後孫들에게 넘치는 기백을 주어 그 여세는 歲歲로 暢達하리라
<멀리보이는 화악산 끝자락 박익 묘소>
처음 이름은 박천익(朴天翊)으로 공민왕 때에 관직에 나아가 少監을 거쳐 禮部侍郞, 세자 이부(世子貳傅)에
임명되어 中書令을 겸했으며, 翰林文學에 천거되어 공양왕 때에 이르기까지 盡忠報國하였다.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남으로 왜구와 북의 호적을 평정하여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쇠퇴하여 포은이 피살당하는 날에 선생은『나 역시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이니 조선
이씨(李氏)의 곡식을 먹지 않겠다.』하니 제현들이 눈물을 흘리며「박익은 진의사(眞義士)」라 말하고,
고죽군(孤竹君)의 절개와 같다고 하였다.
<松隱 박익 묘>
그 후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아우 密城君 天卿과 함께 밀양 고향으로 내려와 사포의 시냇가에 솔을 심고 내의
이름을 松溪라 부르며 스스로 松隱이라 하니, 그것은 모두 舊都 松都를 잊지 못하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1395년에 태조가 한양으로 왕도를 옮기고 나서 선생에게 공판·형판·예판·이판 등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불응하였고, 2년 후에 다시 左相으로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이에 松隱 선생을 세칭 杜門洞 72 賢이라 부르고, 당시의 포은·목은·야은·도은 등과 도의교(道義交)하여
고려 八隱 ((8隱-포은 정몽주·목은 이색·야은 길재·도은 이숭인 혹은 성은 김대윤·송은 박천익·동은 이재홍·만은
홍재·휴은 이석주))의 한 분으로 칭한다.
<案山과 朝山>
1398년(조선 태조 7)에 서거하니 조정에서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의 증직을 내렸고,
장례 후 정종이 제문을 내려 제사토록 하였으며, 춘정 변계량이 諡號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 忠肅이란 시호가
내렸다.
2000년 9월 묘를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 태조 왕건 묘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고려시대 양식의 채색(彩色)
풍속벽화가 朝鮮初期 무덤에서 출토됨으로써 화려한 벽화는 소중한 분묘 연구의 史料가 될것이다.
오늘도 무사히 답산을 마치신 회원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끝내고 내려오니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 있다. 목도 마르고 컬컬한데 한잔 술 맛은 꿀 맛이다.
서로 위로하고 회포도 풀며, 다음 踏山地를 걱정한다.
오늘도 산을 찾아 山所를 보고 돌아간다. 그 길은 내일도 계속 될 것이다.
한국인에 있어서 죽음은 영원한 단절이 아니라 죽어서도 후손과 화합하는 길이므로 내일도 모래도 산속의
山所를 찾아 가야 한다.
생각 나는 대로 적어보는 것도 나의 日常이니까 ?. 諒解 하시길.
200. 4. 淸虛堂
첫댓글 감사합니다.
태극회는 하늘이 도와서 맛있는 음식도 잘도 얻어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