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주암서원(舟巖書院)
1. 주암사우봉안추록(舟巖祠宇奉安追錄)
(1) 문헌에 관하여.
이 문헌은 전주최씨 중랑장공파 남원종회 감찰공(엄조)파 25세 최낙도(崔洛道)씨가 소장(所藏)하고 있는데, 1774년(영조 50) 5월 10일, 다시 말해 주암서원(舟巖書院)의 전신 주암사(舟巖祠)가 건립될 당시에 만든 기록으로, 당시의 정황이 매우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일부 문헌에는 주암서원이 1630년, 혹은 1654년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특히 이 문헌은 주암사 건립 당시에 만든 이른바 일차문헌이기 때문에 그 어떤 기록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우 신뢰도 높은 문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암서원은 5세 연촌공(烟村公) 휘 덕지(德之)의 초상화를 봉안(奉安)하기 위한 영당(影堂)으로 1774년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지사초등학교 뒤편에 건립되었다.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봉안하는 행사 자리에서 남원 지역 유림들이 “단순한 영당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사당으로 바꾸자.”고 제안하여 주암사가 되었으며,
1777년(정조 1) 8세 암계공(巖溪公) 휘 연손(連孫) 그리고 율계공(栗溪公) 장급(張伋)과 아들 사촌공(沙村公) 장경세(張經世)를 추가로 배향하여 주암서원으로 되었다.
연촌공을 주벽(主壁)으로 배향한 사액서원인 녹동서원이 있었으므로, 한 사람을 여러 서원에 배향할 수 없다는 법률로 인하여 사액은 받지 못하고, 주암서원 또는 주암사로 불리어 왔다.
- 주암서원 배치도 (연촌유사속편) -
1868년(고종 5)년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자 1870년 영당을 지어 초상화를 봉안하다가, 1907년(순종 1) 원래 자리에 복원하였다.
한편 주암촌(舟巖村)에는 암계공 생가(生家) 터가 전해오고 있었으나 1808년(순조 8) 일가 한 사람이 팔아버려 타성인(他姓人) 소유가 되어버린 것을 1935년(을해) 종중에서 성금을 모아 다시 사들여 그 자리에 주암서원을 복원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옛날 주암서원 자리에는 철폐될 때 봉안되어 있었던 위패(位牌)를 매봉(埋封)한 위패매봉비를 비롯하여 당시의 주춧돌 등 흔적이 남아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 주암서원 위패 매봉비 -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연촌공은 1451년(문종 1) 10월 29일 문종과 조정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하였는데, 문종은 어진 신하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의 표현으로 어진화사(御眞畵師)를 시켜 초상화를 그려서 하사하였다.
연촌공 초상화는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촌(永保村) 존양루(存養樓)에 봉안되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일본군의 공격 목표가 호남을 향하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영암이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 의령공(지성)파 11세 몽은공(蒙恩公) 휘 응룡(應龍)께서 초상화와 유지초본을 기름종이 여러 겹으로 싸서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 가적동 묘산(墓山)에 묻었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다음 파내어 보니 아무 손상 없이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었는데, 그 때 존양루를 비롯한 영암에 전해오고 있었던 많은 문헌과 문화재는 모두 일본군에 의하여 약탈되거나 또는 소실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초상화는 1610년(광해 2) 의령공파 12세 기정공(棄井公) 휘 정(珽)께서 서울 용산에서 개장(改裝)하고, 1625년(인조 3) 다시 한 번 개장하여 영암에 영당(影堂) 독락당(獨樂堂)을 지어서 봉안하였는데, 개장 과정에서 약간의 덧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덧칠로 인하여 초상화가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사라져가던 예술품으로서 작품성이 다시 되살아난 것으로 평가되어, 개장 작업을 담당했던 화사(畵師) 또한 매우 수준이 높은 화사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630년(인조 8) 녹동서원(鹿洞書院)의 전신인 존양사(存養祠)가 건립되면서 초상화를 존양사에 봉안하자는 여론이 일었으나, 기정공이 고집하여 초상화는 영보촌(永保村)을 떠나지 않았다.
1695년(숙종 21) 존양사에 문곡 김수항(金壽恒)을 배향하면서 김수항은 초상화가 있어서 봉안하게 되었는데, 주벽 연촌공은 초상화를 봉안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여론이 일었으나, 원본은 영보촌을 떠날 수 없다고 고집하므로 원본을 복사하여 사본을 만들어서 존양사에 봉안하게 되었다.
영암에는 연촌공 초상화가 두 곳에나 봉안되어 있었으나, 남원 주암촌(舟巖村)에는 초상화가 없었기 때문에 후손들이 초상화를 참배하고 싶어도, 주암촌에서 영보촌까지 300여 리(里)나 되는 먼 거리로 인하여 찾아가서 참배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참의공(준립)파 17세 첨추공(僉樞公) 휘 처익(處翼)이 영암에 있는 초상화를 개인적으로 복사하여 그려서 자기 집 사랑방에다 봉안하려고 생각했으나 비용 문제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침 1769년(영조 45) 봄, 녹동서원에 봉안된 김수항(金壽恒)의 초상화가 낡아서 다시 그려야 하므로, 기왕 복사하는 김에 연촌공 초상화도 함께 복사하여 그리기로 했다는 소문을 듣고,
새로 그린 초상화를 녹동서원에 봉안하게 된다면, 남게 되는 옛날 초상화를 얻어다가 자기 집에 봉안하기 위하여 초상화를 복사하고 있는 서울로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였으나, 영암 측에서 “개인의 가정집에 초상화를 봉안하도록 제공할 수는 없다.”고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첨추공은 남원으로 내려와서 일가들을 설득하여 자금을 마련하기 시작한지 6년 만에 주암촌에다 초상화를 봉안할 수 있도록 영당을 지은 다음, 삼종동생 휘 처렴(處濂)에게, 전주에 사는 같은 일가(一家)인 화공(畵工)을 한 사람 딸려서 영암으로 보내 초상화를 받아오라고 시켰는데,
영암에서는 “초상화를 전주에 있는 완동구제(1)로 보내고 지금 영암에는 없으니 완동구제에 가서 초상화를 받아다가 봉안하라.”라고 말하여 되돌아오고 말았다.
첨추공이 다시 전주로 찾아가서 전주종회(2)의 양해를 구한 다음, 완동구제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가져다가 새로 지은 영당에 봉안하게 되었고, 초상화 봉안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남원에서 살고 있는 여러 선비들 사이에, “영당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연촌공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나 주암사(舟巖祠)라는 이름으로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영당은 초상화를 봉안한 건물이고, 사당은 날짜를 정하여 제사를 모시는 건물이며, 서원은 사당(祠) 앞에 후학들이 공부하는 강당(齋)이 추가된 교육 시설이다.
대개 사당은 한 가문의 선현만을 모시고 있지만, 서원은 두 가문 이상의 선현을 모신다.
이 문헌에 수록된 글은 아직 주암사가 건립되기 전에 영당을 지어 놓고 초상화를 봉안하는 자리에서 영당 건립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사람들이 지은 글들인데, 앞에 서문(序文)과 기문(記文)이 수록되어 있고, 이어서 43수(首)의 시(詩)가 수록되어 있다.
시는 모두 영(營), 성(誠), 영(塋), 생(生)을 운(韻)으로 하는 칠언율시(七言律詩)로 각각의 시마다 주덕산(周德山)에 있는 연촌공 묘소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 때 주덕산 연촌공 묘소도 함께 손을 보았는지 여부는 검증할 수 없다.
지은이 중에 기언정(奇彦鼎)은 <연촌최선생화상기(烟村崔先生畵像記)>라는 제목으로 기문을 지었으며, 또 시(詩)도 한 수(首)를 지었는데, 기언정은 <연촌유사(烟村遺事)>에 수록되어 있는 <존양루 차운(存養樓次韻)>을 지은 기건(奇虔)의 후손이다. 또 책의 앞쪽 속표지 뒷면에는 생육신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생육신
경은 이맹전 본관은 벽진, 매월당 김시습 본관은 강릉, 연촌공, 관란 원호 본관은 원주, 어계 조려 본관은 파산, 문두 성담수 본관은 창녕, 모두 사육신과 함께 강원도 영월에 있는 녹운서원에 배향되었다.
사액서원으로서 단종 릉 왼편에 있다.
生六臣耕隱李孟專本碧珍梅月堂金時習本江陵烟村觀瀾元昊本原州漁溪趙旅本巴山文斗成聃壽本昌寧與死六臣幷享于江原道寧越綠雲書院賜額在端廟陵左.
위의 기록에는 현재 알려진 생육신 중에서 남효온(南孝溫)이 빠지고 연촌공이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연촌공을 생육신 중 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촌공은 병자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으므로 생육신에 포함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만, 남효온 역시 병자사화가 일어난 1456년(세조 2)에는 겨우 3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역시 생육신에 포함하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녹운서원(綠雲書院)은 충남 홍성에 있는 성삼문(成三問) 생가 터에 지은 서원이며, 강원도 영월에는 창절서원(彰節書院)이 있었으나, 녹운서원과 창절서원 모두 연촌공을 배향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어서 기록의 사실여부에 의심이 남는다.
다만, 생육신에 관하여 처음 거론되던 숙종 이전의 기록에는 연촌공이 함께 거론되었으나, 병자사화 이전에 이미 돌아가신 것이 확인되어 제외되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 각주 ---------------------------
(1) 完東舊第. 연촌공이 살았던 옛집. 연촌공이 말년에 거처하다 돌아가신 집으로 지금의 풍남동 36번지 전주최씨 종대인데, 1800년경 전주최씨 종대로 용도가 변경되기 전 까지는 “완동구제” 혹은 “연촌공 완동구제”라고 불렀다.
(2) 당시에는 교도공파가 완동구제를 중심으로 전주종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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