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싱코 데 마요 (Cinco De Mayo스페인어)
멕시코의 5월 5일은 프랑스軍 무찌른 '승리의 축제일'
입력 : 2023.05.17 03:30 조선일보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
▲ 지난 5일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멕시코군과 프랑스군 간 전투를 재현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우리나라에서 5월 5일은 어린이날입니다. 그런데 매년 이날 멕시코에서는 '싱코 데 마요(Cinco de Mayo)'라고 하는 축제가 열려요. '싱코 데 마요'는 스페인어로 '5월 5일'이라는 뜻입니다. 1862년 5월 5일 멕시코 군대가 푸에블라라는 곳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군대를 상대로 거둔 대승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멕시코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이 축제를 즐기죠. 그렇다면 멕시코와 프랑스는 왜 전쟁을 벌였을까요?
3개월 만에 끝난 제1차 프랑스-멕시코 전쟁
오랜 기간 스페인의 식민 지배를 받은 멕시코는 전쟁을 치른 후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1821년 8월 24일 스페인은 멕시코의 코르도바(현재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는 협정에 도장을 찍었죠. 그러나 독립 후 멕시코는 혼란 그 자체였어요. 오랜 기간 전쟁으로 도시와 공장이 파괴돼 멕시코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사회적으로 치안은 불안했고 외국과 교역이 중단되고 세금 수입마저 거의 없어 국가 재정은 바닥나 있었죠. 유럽 국가들은 호시탐탐 멕시코에 간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1838년 멕시코에서 살던 한 프랑스 제빵사가 자기 가게가 약탈당했다며 멕시코 정부에 배상금 6만페소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제빵사는 멕시코 정부가 요구를 거절하자 프랑스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총리는 멕시코에 손해배상금으로 무려 60만페소를 요구했어요. 당시 멕시코시티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페소였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였죠. 멕시코 정부가 거부하자 그해 11월 프랑스는 멕시코의 항구를 봉쇄하고 포격을 시작했어요.
사실 그전부터 프랑스는 멕시코에 불만이 있었어요. 프랑스와 멕시코 간 무역은 멕시코 독립 전부터 시작됐어요.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엔 멕시코의 무역에서 프랑스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부가 프랑스 상품에 높은 세금을 물려 프랑스의 불만이 컸어요.
프랑스가 멕시코를 공격하면서 제1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이 시작됐어요. 프랑스의 군사력을 당해내지 못했던 멕시코는 3개월 만에 전쟁에서 졌어요. 1839년 영국이 중재한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죠. 멕시코 정부는 프랑스에 손해배상금 60만페소를 지불하기로 했습니다.
열세 이겨낸 '싱코 데 마요'의 승리
프랑스의 침략은 1차로 끝나지 않았어요. 멕시코에서는 자유주의 바람이 불며 1854년 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의 중심은 베니토 후아레스라는 인물이었어요. 멕시코 원주민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후아레스는 장관직을 맡아 여러 개혁 조치를 했어요. 그 첫 번째가 교회의 재판권을 제한하고 법률에 따른 사법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는 일련의 조치를 했어요. 하지만 보수파는 개혁에 불만을 갖고 교회의 특권을 인정하자고 주장했죠. 1858년 보수파는 개혁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때부터 약 3년 동안 두 세력 간 전쟁이 일어났어요. 당시 수도 멕시코시티는 보수파가 장악했고 자유주의 세력은 베라크루스에 거점을 뒀어요. 하지만 결국 자유주의 세력이 우위를 점했고 후아레스는 1861년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었어요. 3년간 내전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 있었거든요. 결국 1861년 7월 후아레스는 모든 외채 상환을 2년 동안 중단한다는 내용의 모라토리엄(한 국가가 정치·경제적 이유로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에 대해 일시적으로 상환을 연기하는 것)을 선언했어요. 그러자 멕시코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프랑스·스페인·영국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고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베라크루스에 해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어요. 영국과 스페인은 멕시코와 별도로 협상해 평화롭게 철수했어요. 하지만 프랑스는 달랐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멕시코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있었거든요.
1861년 말 프랑스 함대가 베라크루스를 공격해 프랑스군이 대규모로 상륙합니다. 제2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의 시작이었죠. 프랑스군은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이동하는 길에 멕시코 군대의 강렬한 저항에 부딪힙니다. 1862년 5월 5일 멕시코군은 푸에블라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결정적 승리를 거둬요.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형편에 거둔 승리였기에, 이 전투는 멕시코 군대와 멕시코 국민의 사기를 높였어요. 후아레스 대통령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프랑스가 증원군을 파견하면서 물러서지 않았거든요. 결국 1년 후 프랑스는 병력 3만명으로 멕시코군을 무찌르고 멕시코시티를 점령했습니다. 후아레스는 대통령직에서 쫓겨났고, 나폴레옹 3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 자리에 앉혔어요.
그러나 프랑스가 멕시코에 세운 제국은 3년 만에 끝났습니다. 당시 남북 전쟁 중이어서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던 미국이 전쟁이 끝나자 먼로주의(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 상호 불간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외교 정책)를 내세우며 프랑스에 철군을 요구했거든요. 후아레스의 아내 마가리타 마자가 프랑스 침략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몇 차례 링컨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멕시코에 무기를 공급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멕시코 게릴라군의 끈질긴 저항, 프로이센의 전쟁 위협 등 프랑스가 전쟁을 지속하기에는 매우 부담이 큰 상황이 이어졌어요. 결국 1866년 프랑스군은 멕시코에서 퇴각하기 시작했고 후아레스는 1867년 프랑스를 몰아내며 자리를 되찾았어요. 막시밀리안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했고요.
▲ 지난 5일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열린 ‘싱코 데마요’기념 행진. /EPA 연합뉴스
▲ 푸에블라 전투 장면을 그린 작자 미상의 그림. /브리태니커
▲ 베니토 후아레스 전 멕시코 대통령. /위키피디아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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