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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동사범 11 회 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에브노말
영덕 영해지역 유적답사 - 무안박씨(務安朴氏) 무의공(務毅公) 종택 2013. 5. 4 영덕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영덕대게로 유명하다. 그 뿐만 아니라 영덕블루로드 걷기길, 고래불해수욕장, 풍력발전단지와 해맞이공원, 지품면 삼화리의 복사꽃 마을 등 명소가 많이 있어 4계절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 뿐만 아니라 훌륭한 조상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유서 깊은 전통마을과 선비 정신을 잘 보존하고 있는 역사 유적이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들이 즐비하고 있어 조상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영덕군 지도
오늘도 전과 마찬가지로 소요유적답사회(逍遙遺蹟踏査會)의 일원으로 권오규, 류진환, 나 셋이서 영덕(盈德) 영해(寧海)지역에 있는 무안박씨(務安朴氏) 무의공(務毅公) 종택, 신돌석(申乭石)장군 유적, 괴시리(槐市里) 선비마을, 도해단(蹈海壇), 안동권씨 송천자(松川子)와 칠우정(七友亭), 인량리(仁良里) 재령(載寧)이씨 종택, 원구리 영양남씨(英陽南氏)씨 종택, 무안박씨(務安朴氏) 경수당(慶壽堂) 유적답사 탐방에 참가한 것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무안박씨무의공파종택 위치도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慶尙北道 盈德郡 丑山面 陶谷里)의 북방에 있는 야산을 뒤로 하고 앞들을 내려다보며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고, 정침(正寢)의 우측 후방에는 무의공의 불천위(不遷位) 사당(祠堂)이 있다. 전체적인 건물 구성은 대문채, 사랑채, 정침, 내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ㅁ자형으로 정면 10칸, 측면 7칸에, 사랑채는 팔작지붕 안채는 맞배지붕이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변형된 부분도 있으나 안채의 창문 중간 선주 흔적이나 사랑 대청의 파련대공 등에서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무안박씨무의공파 종택전경
안채로 들어가는 내삽문
사랑채 천정 내부
사랑채의 계자 난간
이 고택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선무훈일등공신(宣武勳一等功臣)에 녹훈된 박의장(朴毅長)의 넷째아들 박선(朴璿)이 맏형 박유(朴鍮)를 위하여 1644년경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선은 경학에 집중하여 도학자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평소 과업에는 뜻이 없고 오직 수신제가와 후학양성에만 힘써 오히려 그 명성이 더욱 높았던 것으로 전한다. 사랑채의 원기둥형의 기둥이 하나 서 있다
청신구택
전체적인 배치를 보면 야산기슭에 자리하면서 지형의 고저차를 그대로 활용하여 안채와 사당, 사랑채, 대문채 등을 배치하였다. 다만 각 채마다 그 높낮이의 차이가 너무 크지 않도록 기단을 높이거나 낮추는 방법으로 균형을 맞추었다. 대체적으로 자연석 기단을 높이 쌓아 올렸으며, 자연석 주초에 사당을 제외하곤 모두 홑처마이고, 채 별로 3량 혹은 5량으로 가구하였다.
안채의 모습 -1 안채의 모습 -2
전면 6칸, 측면 1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비교적 넓은 사랑채와 중문채가 있으며, 이를 사이에 두고 ‘ㅁ’자형의 정침이 배치되어 있다. 대지를 얕은 경사지에 조성한 까닭에 사랑마당과 안마당은 단을 달리 하고 있다. 정침 우측후면에 무의공 불천위사당과 우측전면에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방 배면에는 출입문을 두어 정침과 연락을 도모케 하였다. 안채의 모습 -3
중문의 좌측에는 작은 부엌 1칸과 2칸의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통하는 중문을 두고 이어서 사랑방과 사랑마루가 연접되어 있는데, 사랑방과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1칸을 돌출시키고, 하부에는 기둥을 세웠으며, 난간을 달아 누와 같은 느낌을 들게 하였다. 중문채에 비해 돌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을 높임으로써 중문채와 구별했다.
안채의 바깥 옆 모습
사랑채 대청 주위의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는데, 대량위에 포대공을 세워 종량을 받게 하고, 그 위에는 파련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5량가이다. 사랑마루 측면의 문틀에는 중간 설주를 세웠던 장부 구멍이 상하틀에 남아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간채의 자연석 기단이 멋있다
안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우물마루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2통칸의 안방과 부엌을 두고 우측에는 상방을 배치하였다. 대청상부가구는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비교적 소박한 모습을 한 5량가인데, 대량을 받는 양봉(보를 받치려고 기둥에 가로 끼운 조각한 나무)에는 초각장식을 하였다. 대청 후면의 양개널문 문얼굴의 윗틀에는 중간설주를 세웠던 장부 구멍이 있다.
안채의 내부의 5량가의 형태
대문채는 맞배지붕으로 솟을 대문의 좌측에 문간방, 부엌, 마구간이 달려 있고, 마구간 옆에는 화장실, 대문채 우측에는 문간방, 창고가 놓였다. 사당과 내삼문은 모두 목조 맞배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초익공계 건물로 전면은 원주를 세웠으며,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사당의 전경- 여기에도 어김없이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사당의 출입문
사당의 전면
선비가 살던 옛집에는 학자나무로 통하는 화화나무가 반드시 심어져 있다
사당 앞면
사당 뒷면
한두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 부분적으로 구조 변경은 있었으나, 가운데 설주의 유구와 사랑대청의 대들보 상부의 파련대공은 조선 중기의 건축기법을 보여주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
무의공 박의장(朴毅長, 155~1615)은 1577년(선조 10)무과에 급제해 주부(主簿 -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관아(官衙)에 딸린 종6품(從六品)의 낭관(郎官) 벼슬)가 되었고, 1558년 진해 현감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경주판관이 되었다. 이 때 소속 군사를 이끌고 장기군수 이수일(李守一)과 함께 적에게 빼앗긴 경주성의 탈환작전에서 화차(火車)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장거리포의 한 가지)를 사용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93년 4월에는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대구 파잠(巴岑-현재 파동)에서 왜적 2000여명과 맞서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는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울산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당상관으로 특진되면서 경주 부윤(府尹-조선시대 지방관청인 부(府)의 우두머리)이 되었다. 초산군과 안강, 언양현, 기장, 그리고 경주에서 많은 왜병을 물리치고 1595년에 그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조선시대 종이품(從二品)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로 품계가 오르고, 1597년 영천과 안강의 적을 무찌르고, 1598년 박도산(薄島山)의 적을 쳐서 전승을 올림으로써 가의대부(嘉義大夫-조선시대 종이품 동서반(東西班) 문무관(文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에 오르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조선시대 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은 종2품 무관직), 인동부사(府使-조선시대 지방(地方) 관직(官職)의 하나)를 지내다가 경상좌병사 및 공홍도수사(公洪道水使)를 거쳐 경상수사가 되었다. 다섯 차례의 병사를 지내는 동안 한결같이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나중에 호조판서(戶曹判書-조선시대 6판서(六判書) 중 하나이고, 호조(戶曹)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正二品))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무의(武毅)이고 영해의 정충사(貞忠祠)와 구봉정사(九峯精舍)에 제향 되었다. 참고한 자료 : 주택저널과 소요유적답사자료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