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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과 다윗 Ⅷ (삼상 23:1-14)
영적적용 : 마음론
요약
본문은 다윗이 그일라를 구원하고 사울이 두려워 그일라를 떠나는 장면이다.
그일라의 지정학적 특징은 이는 마음의 상징을, 그들이 다윗을 지지함은 영에 속한 사람의 예표를, 그러나 그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사울을 도움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예표가 된다.
설명
본문은 성도의 마음관리법을 나타내준다.
☆ 그럼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1. 마음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터이다.
1절 상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2. 마음은 보화 창고이다.
1절 하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3. 마음은 자행자지하는 곳이 아니다.
2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4. 마음은 치열한 토론의 마당이다.
3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5. 마음은 확신이 거하는 곳이다.
4절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6. 마음은 감정이 머무는 곳이다.
5절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7. 마음에는 양심의 법이 있다.
6절 "아비아달이 ‥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8. 마음에는 문이 있어 열리거나 봉쇄된다.
7절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9. 마음은 그 어떤 것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8절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했습니다.
10. 마음은 육신의 주관을 받기도 한다.
11절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11. 마음은 양심을 벗어나 변덕을 부린다.
12절 "그일라 사람들이 ‥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12.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13절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13. 마음은 쓰시기에 합당하게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14절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강해
오늘도 사울과 다윗에 관한 말씀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울의 어전회의와 놉의 제사장들을 죽인 사건을 통하여 육신 혹은 육신에 속한 사람의 정체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블레셋이 그일라 침공하자 다윗이 가서 그일라를 구원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할 때 다윗이 하나님의 인도로 그일라를 피해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사건입니다.
이 본문에서 감명 깊은 교훈은 다윗이 철저히 하나님께 물음으로 승리함입니다. 이것은 묻지 않고 행하다가 큰 낭패를 당한 다음 얻은 교훈입니다. 우리는 나아가 이 본문을 통해서 마음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육체였는데 이제는 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음이란 인격의 중심부로서 대단히 중요한 곳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마음 관리에서 승리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그럼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1. 마음은 끊임없는 영적 전쟁터입니다.
1절 상반절에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일라는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유다 지파의 땅이면서도 블레셋의 특수한 거점으로 인해 블레셋의 변경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허리에 영토를 정하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이 번에도 그들은 사울이 국가의 안전을 소홀하는 틈을 타서 쳐들어 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특수하게도 유혹의 최일선에 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뱀이 하와를 꾈 때도 영혼을 직접 침범하지 않고 마음을 그 침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성경에서 블레셋은 대부분 사단의 상징으로 자주 쓰이는데 사단은 마치 사울이 안전을 소홀히 하는 틈을 탄 것
처럼 믿음을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공격해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마귀로 틈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7) 고 교훈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그일라의 상태는 시험에 드는 상태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은 늘 영적 전쟁터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장성유무와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다른 것은 영적으로 성장한 자는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기록하기를 히 4:15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는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 했습니다.
시험에 드는 것과 시험을 받는 것은 다릅니다. 시험은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어서는 인됩니다.
그런데 이 시험받는 현상조차도 용납지 않는 완전주의자가 되어 날마다 죄책 속에서 살면 그 때는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험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영적인 전쟁터입니다.
2. 마음에는 온갖 보화가 모여 있습니다.
1절 하반절에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했습니다.
여기 타작 마당이란 당시 근동지역에서 추수한 곡식을 떠는 장소입니다. 이 타작 마당은 평평한 곳으로 바람으로 쭉정이를 분리하기 위기 용이한 바람이 잘 부는언덕에 위치했습니다. 이 곳에서 곡식을 떨고 저장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이 곳은 추수 때가 되면 곡식이 가득히 쌓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타작 마당은 무력충돌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룻기를 보면 보아스가 밤 새워 지킨 이유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마당은 당시 백성들의 부가 모인 곳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습니다. 마음 속에 기쁨의 보화가 있습니다. 믿음의 보화도 있습니다. 평안의 보화도 있습니다. 겸손의 보화도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받으면 쌓이는 타작 마당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 4:7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하니이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수없이 이 마음의 타작 마당의 보화를 도적 맞았는지 살펴봅시다. 사단의 블레셋이 침투하지 않도록 보아스처럼 타작 마당을 떠나지 않고 밤을 새워 지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음은 결코 자행자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2절에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고 이에 여호와께서는 응답하셨으며 그 결과는 승리였습니다. 전쟁처럼 중하고 다급한 것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다급해도 혹은 다급할수록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백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들을 사랑하는 다윗의 심정은 이와 같은 기도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물은 것은 결코 내 뜻대로 자행자지하지 않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는 구원하라 하셨습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을 수호해야 할 책임은 사울 왕에게 있었고, 다윗은 쫓기는 처지로서 그들을 구원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마음대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신앙훈련을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맘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란 주인이라는 소유적인 의미 뿐 아니라 당시 왕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눅 6:46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경을 통한 객관적인 주의 뜻과 기도로 물음을 통한 주관적인 주의 뜻대로 행해야 합니다.
4. 마음은 치열한 토론의 마당입니다.
3절에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사울 군대의 그 파상적이고 열악한 군대조차 피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블레셋 군대를 칠 수 있겠느냐는 반문입니다. 당연한 반문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군대"란 '마아라카'로서 '배열하다' 라는 뜻으로 아주 잘 훈련되고 정비된 군대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현상이 바로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치열한 토론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따지고 들춰보고 들어보고 비교해 보고 이모로 저모로 따저보고 갑론을박 토론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열려 있는 작은 재판소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는 재판장들이 뇌물을 받고 잘못 재판하고 서기관들이 잘못 기록한 때문입니다(사10:1). 이처럼 마음이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론 상으로 맞아도 더 중요한 것은 신앙 안에서 주의 뜻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영성화된 사람은 토론이 적어지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성령의 법만 기록되어 성령으로 행해져야 합니다(고후 3:3). 만약 마음 속에 죄의 법이 기록되어 있으면 성령과 피로 깨끗이 씻어 내야 합니다.
5. 마음은 확신이 거하는 곳입니다.
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군대 내부의 불일치로 인해 또 다시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아께서는 다시 동일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덧붙여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시리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붙이신다"는 용어는 하나님의 보증수표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나오면 그것은 완전한 승리밖에는 더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이 다윗 군대처럼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으나 더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강력한 생각이 대두되면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때는 고민만 하지 마시고 다시 여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동일한 내용의 두세 번의 나타남은 확증을 뜻합니다. 둘 셋은 증거의 수이기 때문입니다. 3수가 고유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사역 혹은 하나님의 완전 수이지만 둘과 함께 쓰일 때는 둘보다 더욱 확실한 증거의 수가 됩니다. 이처럼 마음은 혼란도 있고 확신도 거하는 장소임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확신 속에 거해야 하겠습니다.
6. 마음은 감정이 머무는 곳입니다.
5절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했습니다.
여기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블레셋을 추격하여 그들을 크게 죽이고 빼앗긴 곡식은 물론 블레셋 사람들의 가축까지 되레 빼앗아 왔습니다. 즉 사울의 직무 유기로 감당하지 못한 국방의 의무를 다윗이 훌륭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가축을 끌어왔다는 것은 신령한 의미에서 짐승은 대개 본능과 감정의 상징으로 사단의 미혹으로 세상에게 빼앗긴 감정을 회복함의 예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보다 가축은 더 좋은 의미로서 성령의 열매의 예표가 됩니다.
시 144:13에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했는데 이를 영성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초장을 의로서 가득하게 입혀 주시는 은총입니다.
혹시 다윗이 블레셋에서 가축을 끌어 왔다고 해서 마귀에게서 우리의 의를 빼앗아 왔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이것은 비유를 잘못 적용한 것입니다. 비유란 어떤 때는 반드시 과학적이라기 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통하여 적용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비유적으로는 사단으로 인해 세상에 빼앗긴 마음을 믿음 안에서 회복함을 가리킨다고 적용해야 옳습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를 회복하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7. 마음 속에는 양심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6절에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했습니다.
여기 제사장 아비아달이 도엑의 칼날을 피하여 그일라 다윗에게 올 때 가져온 에봇 이야기입니다. 에봇이란 '신탁의' 란 뜻으로 하나님께 부탁하여 뜻을 묻는 가슴에 찬 사각 주머니입니다. 이 에봇은 대제사장이 입는 소매 없는 조끼 위에 띱니다. 이 에봇은 열 두 보석 달린 금색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졌고 그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 우림이란 "빛" 둠밈은 "어두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우림과 둠밈은 주사위 비슷한 보석으로 기도하고 던지므로 옳고 그름 혹은 허락과 불허 등의 양자택일하는 등의 하나님의 뜻을 묻는데 쓰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 빛과 어둠 즉 옳고 그름을 나타내 주는 우림과 둠밈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율법인 양심입니다. 이제 이 말씀 듣고 우림과 둠밈이 나와 관계 없다 마시고 그 번지수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향에서 뜻을 나타내 주시지만 양심을 통해서도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기억할 점은 양심이란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여부나 차이에 따라 양심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양심은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함에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법이지만 양심은 가차 없이 자기 법대로 집행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양심의 법정에서 정죄되면 정죄만이 아니라 죄의 값은 사망이라 사형을 집행합니다. 그래서 양심이 가책되면 심령이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마다 자기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며 용서를 구하고 평안함을 얻어야 합니다. 양심은 이렇게 재판만 하는 곳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문에 서서 부정한 것에서 지켜줍니다. 그러다가도 우리 마음에 부정이 침투하면 그 때는 우리 영혼을 지켜주어야 할 양심이 가차없이 우리 심령까지 죽입니다(에 2:21).
그런데 여기 죽는다란 멸절을 의미하는 뜻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양심이 거하는 곳이 마음입니다.
8. 마음에는 문이 있어 열리거나 봉쇄됩니다.
7절에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했습니다.
여기 나타나 있는 대로 그일라는 문과 문빗장이 있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폐쇄하면 완전히 갇히게 됩니다. 여기 열리기도 하고 봉쇄되기도 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계 3:22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고, 사도 바울도 고린도 성도들이게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6:11-13) 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육신적인 미혹을 받아 마음의 문을 닫아선 심령이 죽습니다. 이 얼마나 사울이 그일라 성의 특성을 이용려는 것과 흡사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는 산 자요 세상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문은 하나님을 향해서만 열려야 합니다. 이 문이 닫히면 신앙은 죽습니다. 거기다 빗장까지 질러 버리면 문제가 생깁니다. 빗장이란 바로 냉정한 결심을 말합니다. 그 때는 누구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손해는 내가 본다는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9. 마음은 그 어떤 것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8절에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했습니다.
성경에서 백성은 신령한 의미에서 생각이나 마음의 분량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따를 때는 한 마음 한 뜻이 된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경우처럼 압살롬이 반란하여 소수만 따를 때는 믿음이 나약하여 악이 주도하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았으니 대단히 육이 주도하는 악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일라는 내려가서라는 말처럼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일라를 에워싸면 그 군대의 형태가 마치 왕관을 씌우는 형태가 됩니다. 그래서 여기 '에워싸고' 란 '아타르'로서 '(관을)씌우다, 호위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악이 마음 속에 왕노릇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심령에는 하나님과 의와 생명이 왕노릇해야지 사단과 죄와 사망이 왕노릇해서는 안됩니다. 롬 5:17-18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왕노릇하시어 의가 우리를 사로잡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마음은 육신의 주관을 받기도 합니다.
11절에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했습니다.
여기 사울이 내려온다는 것은 사울이 위에 위치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그일라 장악은 곧 육신에 속한 사람의 예표가 됩니다. 그런데 여기 다윗이 다른 곳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던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관계성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주의 종이란 신본주의적인 주님 주권중심을 잘 부각시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육신 중심과 다윗의 하나님 중심이 잘 대조가 되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아 철저히 육신의 중심을 배제하고 영 중심을 따라야 합니다(롬 12:1-2).
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변화될 때 영 중심의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 마음은 양심을 버리고 변하기도 합니다.
12절에 "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했습니다.
아무리 사울의 군대가 그일라를 에워싸도 그일라 사람들이 협조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민들이 차후의 후환이 두려워서 배반하여 내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을 통해 생명을 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저버린다면 그야말로 배은망덕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다윗을 행한 지지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 때 인간의 생각은 사람을 믿어 버리기 쉽습니
다. 그러나 다윗은 다시 여호와께 묻습니다. 다윗의 훌륭한 점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합당해도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그일라 사람들이 너를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일라 거민들을 믿지 않고 피신 길에 오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마음의 역할은 양심을 벗어나 배반하기도 하고 어기기도 하며 결심을 파하기도 하고 대단히 변덕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변치 않지만 인간의 마음은 조석변입니다. 민 23:19-20에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했는데 여기 식언(食言)이란 말을 먹어버린다는 뜻으로 한 말을 지키지 않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육신에 속한 인생입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자기 생명의 은인인 다윗을 배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 그 순간에는 제자들처럼 주님과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함께 가겠다는 결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은혜로서 굳게 되지 않으면 상황이 오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은혜 속에서 변치 않는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히 13:9).
12. 마음은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3절에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그일라를 떠납니다. 그런데 어느새 400명의 사람들이 600명으로 증강되었습니다. 여기 600이란 사람과 세상의 수인 6에 전체의 수 10을 제곱한 것인데 제곱이란 영육간 등 전 인격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마음과 뜻과 정성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 다윗이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위험을 피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최선이라고 합니다. 즉 내가 최선을 다해야 하나님께서도 더욱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는지 살펴 봅시다. 골 1:29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백합니다.
13. 마음은 쓰시기에 합당한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14절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살아남기 위한 온갖 노력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 황무지 요새는 전략적으로 뛰어난 장소요 산골은 인적이 없는 숨기 위한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다른 특징을 가진 대조되는 장소입니다.
다윗이 요새를 택한 것은 싸움을 대비한 것이요 산골을 택한 것은 자기를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략적인 유연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사울이 매일같이 다윗을 찾아다녔어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자기 주관 고장관념 선지식 세상적 가치관 개성 부정적인 제도 계산 자기 계획 등에 묶여 있으면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생으로 새 생명을 가졌으나 이러한 것들로 생각이 묶여 있습니다.
마치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났으나 꽁꽁 묶여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요 11:44) 하셨습니다. 즉 묶인 것을 풀지 않으면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깨
뜨리는 작업이 곧 신앙훈련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생각을 상상할 수 없이 전환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이제 마음의 원리를 함께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증언합니다. 믿음도 마음에 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이 마음 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다운 믿음 소망 사랑이 깃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참으로 복된 성도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