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 10 온전한 것이 올 때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
여기에 ‘온전한 것’은 무엇이며,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언제인가? 물론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완성되는 때이지만, ‘온전한 것이 올 때’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에 관한 한 신약 성경의 완성의 때를 가리킨다고 본다.
신약성경 27권은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한 ‘온전한 것’이다. 사도 시대에 신약성경 27권이 다 기록되었다. 거기에 하나님의 진리와 뜻에 관한 충족한 지식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부분적인 지식의 은사, 부분적인 예언의 은사 등 사도시대 교회에 있었던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그 후 시대에 불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중지되고 폐지되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1]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내세가 완전히 나타나는 때를 말한다. 하나님에게 속한 높은 지식은 도리어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 밝음 때문에 가려져 있다.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하였다.
* 딤전 6: 16 -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어찌 불완전하고 죄 많은 인생이 내세의 전체적 나타남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나, 그 사랑의 어떤 방면은 지금 땅 위의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병아리가 바깥세상의 공기에 견딜만치 털이 자라나기 전에는 달걀 껍데기에서 나오지 못한다. 그것이 바깥세상에 나온 때엔 물론 바깥세상이 그에게 유익하고 편리하다.
인생은 현세에서는 믿음을 연습하기 위하여 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하고 움직인다. 롬 8: 24에 말하기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영원토록 믿음의 관계니(고전 13: 13), 성도로서는 땅 위에서 믿는 일을 전무(專務)하여야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로 믿음의 연습과 연단은 생긴다. 벧전 1: 7에 말하기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다.
고전 13: 11 어린 아이와 같다.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
이 구절은 위에 관설된 "부분적" 지식이 어떤 것임을 밝혀 준다.
그것은 비유컨대 "어린 아이"의 지식과 같다.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의 지식은, 비판적(批判的)이 못되며, 사색적(思索的)이 못 된다.
그들은 감각적(感覺的)이다. 이것은 사람이 현세 생활에서 가지는 지식 방법을 표본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중심(自己中心)이며 주관적(主觀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무관심(無關心)하다.
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사도 바울은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의 초보적 성격을 말한다. 그는 초자연적 은사들이 마치 사람의 어린 시절과 같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어리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이 폐지될 때는 교회가 장성한 사람이 될 때이며 그 이유는 그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장성한 사람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 어린아이에게는 젖병과 장난감이 필수품이지만 크고 나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교회의 창설시기의 것들이며 후시대에는 필요치 않은 것들이었다.
여기 우리 본문에 "장성한 사람"은 비교적 판단력이 많아서 주관적 지각(主觀的知覺)보다 객관적 지식을 귀하게 여김이 아이들보다 많다. 이것은 내세에 사는 사람들의 지식 방법을 어느 정도 표본적으로 비유한다.
내세에 들어간 사람은 주관주의(主觀主義)를 전연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한 지식을 실체화(實體化)하여 거기서 움직인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어떠한가?
(1) 그것은 참으로 어린아이들의 놀음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너무도 주관적이고 감각적(感覺的)이다. 과학적 지식(科學的知識)이란 것은, 감각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2) 이 세상 사람들은 권세자를 따른다.
현대인들은 당면한 세계 문제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를 생각하지 않고 모스크바와 워싱톤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볼 뿐이다. 계시록 4-5장에 하나님의 "보좌"란 말이 16번이나 나타난다.
(3)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역사를 모두 상대적 가치(相對的價値)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역사적 원리로만 표준 삼아 모든 것의 시비(是非)를 논하고, 역사를 초월한 이적은 부인한다.
(4) 이 세상 사람들은 과학 만능을 주장한다.
이 세상 사람의 과학은 다른 것은 다 행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인간의 심령을 통솔하지는 못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솔하는 것만이 세계 평화의 해결책이다. 그것을 통솔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 말씀을 가장 낮추며 업신여긴다. 이것이 유치한 지혜이다. 요컨데 어린아이는 현재(現在)만 느낄 줄 아나 미래(未來)를 예비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현재의 고통을 느껴 울 뿐이고 장래의 고통을 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실유(實有)에 대하여 생각할 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령한 이치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 어른들도 이 세상에선 아이들과 같다. 그들도 신령한 것을 업신여기는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