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고무신
재잘거리는 햇살이 지나간 자리에
입을 꼭 다문 하늘과 가을바람을 쫓는
개들로 시끄러운 한 시골 마을,
영자네 집에는 가을걷이를 하러 온 친척들로
시끌벅적 합니다
마당에서 심술이 났는지
누렁이를 못살게 굴던 영자는
살금살금 기어가더니
마루 밑에 놓인 친척들의 신발을
몽땅 들고 누렁이 집에다 감춰버립니다
고슬고슬 갓 지은 밥과 술 한잔으로
얼큰하게 취한 친척들이 돌아가기 위해
신발을 찾는 순간,
“어.. 내 신발 어디 갔노”
“내 신발도 안보이구먼”
놀란 엄마는 온 집안을 뒤져보다
누렁이 집에 있는 신발을 찾아
앞치마로 묻은 흙먼지를 닦으며
댓돌 위에 올려놓습니다
겨울을 지난 봄, 여름과 함께
엄마 마음에 있는 기적의 씨앗으로
만들어 놓은 들녘의 곡식들을
가을이면 말없이 와서
엄마의 땀방울을 가져가 버리는
친척들에게 화가 난 영자의 마음을 아는 엄마는
노꺽인 배처럼 지킬 뿌리 하나 없는
들녘을 바라보고 있는 영자에게 다가갔을 때
엄마에게 눈물을 보이며 안기더니
“엄마가 고생해서
농사 지은걸 다 주면 어짜노”
“개안타...
서로서로 나눠 먹으라꼬 지은 농사 아이가”
점이 된 저 들녘을 오고가며
길을 만든 엄마의 눈에서도
다독거리며 지는 석양을 바라보는
영자와 똑같은 빨간 눈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각또각 시간이 걸어간 다음 날,
학교를 가기 위해 신발을 찾던 영자는
소리쳤습니다
“엄마! 내 고무신 한 짝이 없어졌데이”
부엌에서 밥을 푸다 놀란 엄마가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
환한 신의 미소와 함께 손에
들려 나온 고무신 한 짝,
“누렁이가
배고파서 가져갔나 보네”
마음을 들켜버려서 인지
심드렁한 말투로
방문을 닫고 도로 들어가 버리는 영자를
엄마와 누렁이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마주보고 섰습니다
“영자야!
학교 안 가고 도로 들어가면 우짜노‘
“내만 고무신 신고 다닌다
창피해서 학교 안 갈란다... “
줄기 없는 뿌리처럼
꼬질꼬질한 가난이 배어든 고무신이
영자는 창피했었나 봅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멀뚱 거리며 서있던 아침이 뛰어 오더니
곤한 잠에 취해 자고 있는 영자를 깨웁니다
엄마가 차려준 그렇게도 좋아하는
콩비지 찌개도 쳐다보지 않고
가방에 매달려 걸어가고 있는
영자의 뒷모습이 사라져 갈 때 쯤,
“문둥이 가스나....
어제부터 기분이 뚱해 가지고
천으로 된 신발이 뭐가 좋타꼬 ,... “
꿀럭꿀럭 지는 해를 매달고
나타난 영자를 보고
“영자야! 니 와이카노,
먹고 죽을 약 살 돈도 없는 집에서
팅팅 불은 보리처럼 그카지 말고
소여물이나 퍼떡 끓이거래이 “
빗금 친 가슴으로
해가 넘어간 빈자리를 쳐다보던 영자는
“엄마! 나도 운동화 사주면 안 되나?
고무신 신고 다니는 아이는 내빡에 없다“
한바탕 너스레를 떨고 난 뒤,
누렁이에게 돌을 던지며
심술을 부리고 있는 영자를
멈춰있던 시계처럼 바라보던 엄마는
어디론가 말없이 걸어 나갔습니다
세 번은 먹물로 덧칠해 놓은 듯한
까만 어둠이 내려앉은 들길을 돌아
어둑어둑한 모습으로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기다림의 길목에서 애가 타던 영자는
“엄만 말없이 어디 갔다 오는데....
혼자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
“문둥이 가스나,
누렁이도 있고 황소도 있는데
뭐가 무섭다꼬
이리 와 쬐매 앉아 보거래이 “
가난한 혼 뿐인
엄마 손에 들려있는 검정 비닐 안에서
내어놓은 하얀 운동화 한 켤레,
“와...이게 뭐꼬?
엄마 참말로 내꺼 맞제?”
하얀 운동화를 신고
하늘을 날고 있는 영자는
밤새 누가 운동화를 훔쳐갈까
이불속에 꼭꼭 숨겨 두더니
아침이 깨우기도 전에 눈을 뜨고는
“엄마! 나 학교 간데이...”
“와이리 일찍 가는데
그리고 운동화는 와 안 신고 가노“
“비가 오는데 젖으면 우짜노,
그래서 가방 안에 넣고 간데이 “
골목 어귀를 돌아 도착한 정류장엔
빗방울과 토닥거리며 앉아 있는
이장 딸 미숙이를 보고 영자는
다가갔습니다
“영자야!
너희 이제 누렁이 안 키우나 “
“아니, 키우는데..”
“어젯밤에 너희 오메가
울 아버지한테 오천 원에 팔았다 카든데”
“참말이가?
거짓부렁이면 니 내 손에 죽는데이”
화가 난 들소처럼 씩씩거리며
나타난 영자를 보고는
“니 학교 안 가고 와 도부 돌아오노”
“엄마! 우리 집 누렁이
미숙이 아버지한테 참말로 팔았나..”
그 말에
소금에 숨죽은 배추처럼 고개를 숙이든 엄마는
말없이 부뚜막 아궁이에 장작개비만
털어 넣고 있었습니다
“사람 묵을 양식도 없는데
개까지 어찌 키우겠노.. “
“내 밥하고 나눠먹으면 된다 아이가”
돌팔매질하듯 내던져진 말과 함께
가방에서 신발을 꺼내들고
대문을 박차고 뛰어나간 영자는
“미숙이 아부지요~~
이 신발 드릴탱께 울 누렁이 도로 돌려주이소 “
마루청에 운동화를 내던져 놓고는
묶여있는 누렁이 목줄을 풀고
데려온 영자는
“고무신 평생 신어도 좋으니께
난 누렁이 없이는 못 산다“
다음 날 아침
꼴때기를 내며 대문을 박차고 나온 영자가
점심시간에 열어본 가방 안에는
이장댁에 갔다드린
그 운동화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학교에서 시간만 쫒아다니다
내리는 비를뚫고 들어선 마당에서
누렁이가 방긋이 웃고 있는걸 본 그제서야
"휴...누렁이 갔다 준줄 알았네..."
한숨을 돌린 뒤
바람결에 흩어지는 엄마의 숨소리를 찾아
디딘 댓돌위에는
아침 이슬로 세수를 하고
지는 별빛을 찬으로 밥술 떠는
엄마의 흰고무신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란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기어놓은 고무신 뒤꿈치 실밥 사이로
새어나오는 빗물을 바라보다
그 흔한
빗물조차 담아두지 못하는 다른 짝 고무신에
난 동전보다 더 큰 구멍으로
영자의 눈물도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새벽과 다투다 걸어 나온
아침이 데리고 온 햇살 한 줌이
다소곳이 앉아있는 댓돌 위에 다
운동화를 가져다주고
행복 한 장과 바꾸어 온
엄마의 새 고무신을
가지런히 놓아두고선
학교로 걸어가고 있는 영자는
한가롭게 하늘에서 놀고있는 뭉개구름이랑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요
“엄마의
구멍 난 고무신은 어쨌냐구예”
“지 가방에 넣어 가져갑니데이
오다가 읍에 들러 엿장수 할아버지가
주는 엿과 바꿀라꼬예
검정 고무신은 안 산다는데
흰 고무신이라 다행이지예.... “
" 혼자 다 먹을꺼냐고예.."
"언지예...
지 쪼매 먹고
고생하시는 우리 엄마 입안에도
쏙 넣어 들릴라꼬예''
시리도록 등이 푸른 이 행복은
늘 걸어 다니는 이 길 위에도
길가에 핀 저 들꽃에도
엄마의 구멍 난 고무신 안에도
머물러 있었습니다
노자규의 골목이야.
첫댓글 구멍난 고무신이 생각난다 먼옛날 검정 고무신 질경이 신발 꿈 같은 세월 아이고 내 팔자야 맛깔나는 글 그리웠어유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