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윤의 실학으로 읽는, 지금」(21) 2024년 12월 3일-4일 계엄령 내린 날, 어느 선생의 일기 “윤석열을!” “탄핵하라!”
나이가 들었나보다. 하기야 내 나이도 60대 중반을 지난다. 학기말에 여러 일이 겹쳐서인지 몸이 피곤하다. 내일 수업도 있고 하여 일찌감치 자리에 들었으나 잠은 오지 않는다. “카톡!” 지인 대여섯 명이 가끔씩 함께하는 카톡방이다. 핸드폰을 열었다. 덤덤한 “비상계엄입니다.”라는 문자다. 시간을 보니 10시 31분, ‘평소에 농담을 하지 않는 분인데-’ 하지만 그 사람의 저간 행적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에 네이버를 켰다. 사실이었다.
그는 늘 술에 취한 듯한 불콰한 얼굴로 ‘계엄령 전문’을 읽어 내려갔다. 글줄 마디마디마다 광기가 서렸다, 계엄사령관 이란 자의 ‘포고령 1호’를 읽을 무렵 제자에게 전화가 왔다. 늘 나라와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제자였다. “선생님! 이 일을 어떻게 하지요.” 그 뒤 이야기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이 멍했다.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1980년 5월, 그때의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탱크, 소총, …그날 한강 중간쯤 버스가 멈췄다. 계엄군 완장을 찬 군인과 경찰이 버스에 올라왔다. 난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계엄군은 내 서너 앞자리 청년 보고 내리라 했다. “왜-”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M1 소총 개머리판이 청년의 머리를 가격했다. 계엄군은 정신을 잃은 청년을 끌어 버스 밖에 내동댕이쳤다. 대항하는 사람도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노량진을 지날 즈음 승객들은 숨죽이며 “머리가 길어서인가 봐.”라며 소근 거렸다. 그날 그 군인의 철모 아래 살기 어린 눈매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내 머리도 그 청년만 했었다.
11시 13분, “국민께 부탁드리는 말씀”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국회로 와달라는 한 정치인의 다급한 육성이었다. 정치인의 다급한 육성과 내 신분이 대학 선생이고 고전을 읽고 글을 쓰는 고전독작가라는 사실이 뒤섞였다. 늘 ‘진실’과 ‘정의’를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양심이 아니다’라 하지 않았던가. 내가 연구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 선생은 ‘사이비(似而非) 향원(鄕愿)은 되지 마라’하지 않았던가. 글 쓰는 이로서 늘 ‘글은 곧 그 사람’이라 하지 않았던가.
서둘러 옷을 갖춰 입었다. 모자도 뒤집어쓰고 장갑도 챙겼다. 당황한 아내가 ‘지금 뭐하느냐고, 어디 가려 하느냐’고 놀라 물었다. 옷깃을 잡는 아내를 뿌리치고 나왔다. “지금, 내가 …국회의사당…” 뭐라 했는데,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문을 나서는 내 뒤로 “당신이 가서 무엇을 하려는데” 하는 아내의 말이 따라 온 듯도하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창문을 잠시 쳐다봤다. 자정이 가까워서 인지 거리는 고요했다. 하지만 30년 운전 경력인데도 내 차는 몹시 흔들렸고 길도 잘못 들었다. 경인고속도로를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른다. 의외로 영등포 거리에 경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영등포는 내 십 대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지만 너무 낯설었다. 저만치 국회의사당 정문 쪽에 사람들이 보였다. 이미 시계는 자정을 넘었다. 200~300명 정도, 시민들과 경찰이 뒤섞여 있었다.
급히 차를 도로에 세우고 정문 앞 시민들과 합류했다. 먼저 온 이들의 후미에서 그들을 따라 구호를 외쳤다. 누군가 “계엄령을” 선창하면, “해제하라” 후창이 이어졌다. 의사당 쪽으로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목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경찰을 태운 버스가 몇 대 더 오고 공중에서 헬리콥터가 굉음을 냈지만 시민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시민들 목소리가 커졌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그 소리는 의사당 앞 공터를 건너 의사당 안까지 들릴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내 뒤로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누군가 애국가를 선창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또 누군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꿈틀하더니 목이 메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제야 찬찬히 주변을 돌아봤다. 내 또래의 사내가, 손을 꼭 잡은 젊은 연인이, 허름한 옷을 걸친 아주머니가, 손확성기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 또래의 여학생들 그룹도 보였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확신이 들었다. 비록 계엄군이 총칼을 들이대도 제 아무리 탱크가 와도, 이들은 겁먹지 않을 것임을.
1시쯤, ‘비상계엄령 해제 가결’이란 소식이 들렸다. 옆에 있던 내 또래의 사내가 손을 불끈 쥐고 흔들며 나에게 웃음을 건넸다. 돌아오는 길, 영등포 가로등 불빛이 참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