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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20장 19-23절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후 첫날 일찍, 아직 어두울 때 여자들이 무덤을 찾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 누워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을 보고 여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지만, 무덤에 왔다가 돌아갈 뿐 누구도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은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또한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무덤을 찾았던 여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만 기록하고 있는데, 눈 여겨 볼만한 것은 천사들이 전한 소식을 듣고 난 뒤 예수님께서 실제로 마리아 앞에 서 계셨지만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는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인가? 물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부활체의 모습은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죽은 자들이 다른 그 누구의 몸도 아니 자기 자신의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님도 죽으시기 이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시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모습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누가복음 24장 15절과 16절에 의하면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그러나 인간은 타락 이후 오류투성이인 존재들입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지향성의 오류, 판명성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 한곳에 집중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요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 앞에 서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이신 줄을 알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가려진 눈을 열어 주시면 보게 하십니다. 알게 하십니다.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심으로 그의 눈을 열어주셨는데, 인간은 늘 오류투성이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자들을 깨우치셔서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또 다른 여자들에게도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후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과 부족함 등을 볼 수 있고, 그런 제자들을 일으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9절을 보시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보면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보이시고 난 뒤 여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그 소식을 전했습니다. 천사들의 증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어도 믿지 않았습니다(막16:10-11). 허탄한 말로 여겼습니다(눅24:11). 이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나타내셨고, 그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부활 소식을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막16:12-13).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십니다. 마가복음 16장 14절입니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요한복음은 이런 꾸짖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을 기록합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많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주를 따르게 하신 자들이 그들이었고, 그런 만큼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면 많은 제자 중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들 또한 죽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그들까지 죽여서 다른 많은 제자들에게 본보기를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 입장에서는 부활을 믿지 않는 상태에 있었고, 그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어진 것처럼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은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빌라도도 들었을 것이고, 일부 유대인들도 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의심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모든 문을 굳게 닫았다는 것입니다. 문을 걸어 잠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가 없어진 것 때문에 급하게, 비밀스럽게 모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됨으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제자가 모인 것은 아닙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어쨌든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모였는데,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서 루터파와 칼빈파 사이에 큰 논쟁이 된 문제가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느냐에 대한 문제입니다(이하 매튜 풀 주석 참고). 먼저 루터파는 주님이 닫혀 있는 문들을 통과하셔서 들어오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대하여 칼빈파에서 제기하는 반론은, 부활하신 몸이라 할지라고 물질을 통과하는 것이 우리가 지닌 몸에 대한 개념과 일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그리고 지지난주에도 언급했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체는 질적으로 분명 다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그러나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성격과 다르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문을 통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현실의 몸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루터파에서는 이러한 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데, 첫째, 본문에서 문들이 다 닫혀 있다고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언급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본문에서 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었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 부활하신 주님은 사람들이 집으로 들어올 때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 즉 문이나 창문을 열거나, 지붕을 걷어 올리거나, 벽을 뚫는 것 같은 방법들을 사용해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 만일 주님께서 그런 방법으로 오셨다면, 거기에 모여 있던 제자들은 자신들 가운데 서 계신 주님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인데, 누가복음 24장 37절에 의하면 ‘영’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칼빈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첫째,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닫힌 문들을 통과해서 들어오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둘째, 만일 주님께서 닫힌 문들을 통과해서 들어오신 것이었다면,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상처들을 보이시고 만져 보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상처들을 보이시고 만져 보라고 하신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이 우리와 동일한 차원의 몸이었고, 따라서 닫힌 문들을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자신의 이적적인 능력을 사용하셔서 얼마든지 닫힌 문을 여시고 들어와 그들 가운데 서 계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활 이전,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도 나타내 보이셨던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바다 위를 걸어올 수 있겠습니까? 누가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내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비록 죽었다가 부활 할 때 부활체는 다른 질적 특성을 지닌 몸일지라도, 그리고 다른 질적 특성이라고 할 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몸이요, 욕된 것이 아니라 영광된 몸이요,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한 몸이요, 육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의 몸과 전혀 다른 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닫힌 문을 통과해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으로 닫힌 문을 여시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제자들 앞에 보이시되 두려워하고 있는 저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의 인사법으로 ‘샬롬’이라는 평강을 말하긴 하지만, 단순히 유대인들의 인사법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전 자신의 제자들에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적인 것과 관련된 그런 평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었을 때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엡2:1).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즉 우리는 죄로 말미암은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평강,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래는 하나님과 평강, 평안 가운데 있었지만, 죄가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불화한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평강과 평안 가운데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단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자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고, 불화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평강과 평안으로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지금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여 저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리고 그들에게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죽으시기에 앞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그 평강을 친히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평강은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평강을 만들어 내는데, 에베소서 2장 12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2:12-18)
결국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것은 그의 죽음과 부활이 헛되지 않음을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죽으시기에 앞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셨고, 유언자의 유언이 그의 죽으심으로 효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효력을 확증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살아나셨고, 실제로 그 효력을 그의 말씀을 통해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기 전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그리고 그 가운데 평안을 준다는 말씀까지 들었지만 그들 마음 가운데는 평안이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지만,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잠식된 것처럼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려워서 그들이 모일 때는 문을 잠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은 주고 계신 겁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미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셨습니다. 나타나셔서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9절에서는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손과 옆구리만이 아니라 발까지도 보여주셨고, 또한 만져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였는데, 그제야 죽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 이후에도 상처를 지난 것은 그의 영광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이하 칼빈 주석 참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주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연약한 우리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될 우리를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은 우리 구원에 유익을 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결코 그의 영광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익을 위한 상처이므로 그것 자체가 영광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 편지할 때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여기서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받은 고난의 흔적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인해 고난 받은 것 자체를 자랑으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몸 된 교회 지체조차 예수의 흔적, 고난의 흔적이 영광이라면, 몸 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흔적은 더더욱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고난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남아 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흔적들을 가지고 계시길 원하셨고, 그것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자신이 결코 헛되게 죽지 않았음을, 또한 죽음과 함께 부활하셨음을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알고 기뻐하였습니다. 기뻐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했다는 것이고, 거기에 참된 믿음이 다시금 살아나는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내용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지만 보지 못한 자처럼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눈을 뜨게 하실 때 그들은 비로소 보게 됩니다. 확신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7절에 의하면 처음에는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육신이 부활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단지 손과 옆구리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이런 행위들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까지 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한 것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는데,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 자체로 기뻐할 수 있지만 이 기쁨의 본질은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우리 역시 주님과 같은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즉 신자의 참된 기쁨은 새 생명과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평강, 평안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것과 관련해 근심하고 기뻐하지만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 그리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가 새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 진정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하기도 하는 것입니다(빌3:1).
이런 기쁨은 결코 우리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지난 시간 막달라 마리아와 관련해서 살폈지만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나셨지만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하심으로 그의 마음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영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다고 해서 다 믿는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방식으로 그들의 마음을 여신 것입니다. 결국 이런 내용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께서 열어 보이시지 않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이고, 주께서 열어 보이셔서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늘 주로부터 출발하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부활하신 주께서 저들을 찾아오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까지 달려갔지만 주를 찾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갔을 뿐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찾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차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두려워하고 있는 저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고 난 뒤 다시금 평강을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고자 하는 일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사역을 위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역이 아니라 특별히 사도로서의 사역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사역입니다(마28:19-20). 지금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때 그들을 유대 지역으로 파송하셨고, 그들은 파송을 받아 천국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더 이상 육체적으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사도들은 온 유대 지역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십니다(행1:8).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위임을 받고 사도로서 사역을 하게 될 때 어떤 일들이 있는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박해한 것처럼 그런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사도들이 늘 환대만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으로 인하 박해도 받게 됩니다. 이런 저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말씀하심으로 저들의 마음을 붙잡고 위로하고 계신 겁니다.
이 평강의 주체는 누구십니까? 두려워하고 있는 저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시고, 또한 복음 사역의 위임에서 평강을 말씀하실 때 이 평강은 누가 주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약간 구분하여 말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십니다. 본래 하나님과 불화했던 우리를 화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놓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지 않는 이상 우리 스스로가 평강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곳에서 가지고 올 수는 없습니다. 참된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 사역을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지만,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시지만, 보내신다고 해서 주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 감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그들 앞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움에 대한 인간의 자세는 그 어려움을 감당하기보다는 포기하는 쪽으로 나아가기가 쉽습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한한 인간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 같은 그러한 어려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께서 잡히실 때 누구도 예외 없이 주를 버린 것처럼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런 결과밖에 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신 후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면서 이르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이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라’가 아닙니다.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성령이 너희로 하여금 증인이 되도록 할 것이다. 누가 주체냐? 성령 하나님이요, 성령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위임하시기 때문에 사도들이 주체인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백이면 백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성령이 없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참된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 이미 그들 안에는 성령이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영인 성령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성령의 특별한 은사도 나타날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모든 사역이 성령을 통한 사역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지만 너희가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내가 너희를 통해 일한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특별히 여기서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데, 숨을 내쉬신 것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성령이 성부의 영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성자의 영으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숨을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의미하는 숨을 내쉬시면서 그들에게 성령을 친히 주고 있는 겁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고, 사도들의 사역은 이런 성령의 함께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결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성령을 그들에게 주어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주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임하고 계시지만 실제적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5-16)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지만 그 일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동일한 차원에서 성경은 교회요 신자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말씀하기도 하시는데, 이것은 성령의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으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되지만, 그 말씀을 사용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기에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철저히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야지만 완성 가운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성화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언제 완전성화가 이루어지는가? 더 이상 죄가 아닌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는가? 죽을 때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철저히 우리가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완전성화가 있다는 것은 역으로 하나님께서 철저히 우리를 완성시킨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 충만은 우리가 죽을 때 경험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철저히 내가 아닌 성령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기에는 성령 충만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주께 맡기는 데 있습니다.
죽을 때 비로소 완전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런 교훈을 줍니다. 내가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성화로 만드시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할 때, 내 소견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더 나은 성화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소견, 내 자아, 나는 할 수 있다고 하는 등 내가 중심이 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죽여야 합니다.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조금만 도우시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버려야 합니다. 결코 거기에는 성령 충만이 없습니다. 철저히 나 자신을 부인하는 것,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하는 것은 다 죄 밖에 없다, 거기에 성령 충만이 있고, 주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있는 겁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위임하시지만, 그들이 주체가 아니란 것입니다.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얼핏 잘못 이해하면 사도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주어진 것처럼 이해하기 쉽지만,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가톨릭은 이런 구절을 통해 사제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사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죄를 사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사도들에게 위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주시는데, 그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말씀 안에서 가야 함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사역을 감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이런 복음의 내용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23절 보시면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진다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 할 것이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 선포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요,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일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은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복음에 대하여 멸시할 때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멸시하는데 어떻게 죄 사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죄를 그대로 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도들이 죄를 사할 수 있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맡겨진 직무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고린도교회를 향한 말씀이지만,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하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19-20) 하나님과 화목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죄 사함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목하지 않는다면 죄 사함의 은혜는 선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 사도라는 직분은 없지만, 동일한 복음을 그의 말씀 사역자들을 통해 증거 하게 하십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강이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은 평강이 있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로서 살아갈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평강으로 채우십니다. 물론 근심 걱정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셨지만 외적으로 어려운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도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 어려움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빌4:7).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땅한 바는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이고, 또한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늘 우리를 살피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으로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과의 평강이 이웃에게로까지 확대시키도록 만드십니다. 전에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주어지면 원수 같이 여기던 자들과도 평강을 나누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줄 수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하여 다른 누구도 아닌 하나님과 평강 가운데 있도록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