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과학] 좀비 화재
겨우내 숨어있던 불씨, 죽지 않고 살아나 숲을 태워요
입력 : 2024.03.26 03:30 조선일보
좀비 화재
▲ /그래픽=진봉기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좀비 숲 화재' 발생 위험이 커지고 있어요. '좀비 화재(Zombie Fires)'는 미국 알래스카, 캐나다 등 추운 북반구 지역에서 잘 일어나요. 겨우내 땅속에 숨어 있던 불씨가 살아나 초록빛 숲을 잿빛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공포의 아이콘인 좀비가 어떻게 화재에까지 이름이 붙었을까요? 또 일반적인 화재와는 어떻게 다른 걸까요?
북반구 화재의 38%에 달할 때도 있어
좀비는 움직이는 시체를 말해요. 과학계 등에선 전년도 화재의 불씨가 겨울 동안 눈 밑 땅속에 있다가 이듬해 봄에 다시 발화하는 걸 '좀비 화재'라고 불러요. 불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뜻이죠. '잔존 산불'이라고도 해요. 2020년 북극 시베리아 지역에서 발생한 300여 건의 산불·들불의 절반이 좀비 화재에 의해 일어났어요.
북반구 숲의 화재는 대부분 5~6월쯤 번개에 의해 일어나요. 좀비 화재는 이보다 이른 4월 무렵부터 발생하죠. 일반적인 산불에 비해 발생률은 낮지만 한번 발생했다 하면 대형 화재로 이어집니다. 봄에 눈이 녹으면서 큰불로 번지는 게 특징이에요.
최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의 산데르 베라베르베케 교수팀은 미국 알래스카와 캐나다 숲에서 발생한 좀비 화재를 분석했어요. 2002~2018년까지 인공위성이 촬영한 이미지, 연구팀이 현장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이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화재를 분석한 거예요. 그 결과 전체 화재 중 좀비 화재의 비율이 약 1%를 차지했어요. 하지만 연도별로 차이가 커서 어떤 해에는 북반구 화재의 38%에 달할 때도 있었어요.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2021년 5월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되었어요.
땅속 토탄이 좀비 화재의 불쏘시개 역할
좀비 화재의 원인은 영구동토층(땅속이 2년 이상 1년 내내 얼어붙은 곳) 지하에 존재하는 '토탄'으로 알려져 있어요. 토탄은 땅속에 매몰된 기간이 오래되지 않아 탄소 함유량이 60% 미만인 초기 단계 석탄을 말해요.
연구팀이 조사한 인공위성 이미지에서는 이전에 화재로 소실된 지역 수백 미터 내에서 좀비 숲 화재가 다시 발생했어요. 전년도에 있었던 대형 화재의 불씨가 땅속으로 파고들어가 겨울 동안 토탄을 연료 삼아 버틴 거예요. 불씨가 토탄층 상부를 태우면 영구동토층 깊이가 깊어지고, 산소가 더 공급되면서 아래 토탄층을 태우는 방식이죠. 탄소가 풍부한 토탄 토양이 좀비 화재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토양 속 불씨를 유지하는 데는 땅 위를 뒤덮은 눈도 한몫해요. 눈이 열이 빠져나가는 걸 차단하는 절연체 역할을 하거든요. 땅 위 눈과 땅속 토탄이 좀비 화재의 불씨를 살려내고 있는 셈입니다. 세계 곳곳에는 자연적으로 탄소를 다량으로 머금고 있는 곳이 많아요.
특히 지하는 천연 탄소 저장고나 마찬가지예요. 북반구 북극 지역의 영구동토층과 각종 퇴적물이 쌓인 해안 습지는 대표적인 지하 탄소 저장고예요. 영구동토층에 저장된 탄소량은 최대 1조6000억t(톤)으로 추정돼요. 이는 현재 대기 중 탄소량의 두 배 가까운 양이에요. 그런데 좀비 화재가 발생하면 영구동토층의 탄소 저장 능력이 훼손되게 됩니다.
기후변화로 좀비 화재 더욱 가속화
연구팀은 여름철 기온이 높았을 때 좀비 화재의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발견했어요. 기온 상승으로 불씨가 깊은 토탄층까지 태울 수 있기 때문이래요. 베라베르베케 교수는 북반구에서 좀비 화재가 늘고 있는 것은 기후변화로 기온이 점점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요. 비정상적일 만큼 뜨겁고 건조한 북반구 기후가 지중해에서 북극에 이르는 지역의 화재 발생에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지금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북극권의 온난화가 멈추지 않고 가속화된다면 좀비 화재도 다른 지역으로 계속 확산될 거래요. 특히 북반구 고위도 숲의 화재는 영구동토층을 녹여 대량으로 탄소를 배출시켜 더욱 위험해요. 북반구 고위도 숲에서 좀비 화재로 배출되는 탄소의 90%는 영구동토층 토양에서 나온 것이죠.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는 공기 속 산소와 반응해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로 변해요.
국제 대기오염 감시기구인 '코페르니쿠스'에 따르면 2020년 1~8월까지 북극권에서 들불과 산불로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양은 2억4400만t(톤)으로 역대 최대였습니다. 극심한 이상기후를 동반하는 기후변화가 초대형 산불을 일으키고, 초대형 산불은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며 기후변화를 가속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예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좀비 화재가 결국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는 셈입니다.
베라베르베케 교수는 땅속 탄소가 밖으로 배출되는 것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좀비 화재를 조기에 발견해 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요. 좀비 화재가 발생할 지역은 전년도 화재가 있었던 곳을 감시하면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초기에 막을 수 있대요. 숲은 지구에 사는 생물의 생존과 가장 밀접한 장소예요. 그렇기에 우리는 반드시 숲을 지켜야 합니다.
김형자 과학 칼럼니스트 기획·구성=오주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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