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시(還鄕詩)
遠別鄕關四十秋원별향관사십추 仄仄平平仄仄平
歸來不覺雪盈頭귀래불각성영두 平平仄仄仄平平
新基草沒家安在신기초몰가안재 平平仄仄平平仄
古墓笞荒履跡愁고기태황리적수 仄仄平平仄仄平
心死恨從何處起심사한종하처기 平仄仄仄平仄仄
血乾淚亦不能流혈건루역불응류 仄平仄仄仄平平
孤筇更欲髓雲去고공갱욕수운거 平平仄仄仄平仄
已矣人生傀首邱이의인생괴수구 仄仄平平仄仄平
<艸衣禪師>
고향을 떠난지 사십년 만에
돌아 와보니, 희어진 머리를 깨닫지 못했네.
새터의 마을은 풀에 묻혀 집은 간데 온데 없고,
옛 묘는 이끼만 끼어 발자국 마다 시름만 젖네.
마음은 이미 잃었는데, 한은 어디로 부터 일어나는가.
피도 눈물도 말라 흐르지 않네.
이 외로운 중(僧) 다시 구름 따라 떠나노니,
아서라 고향 찾는(首邱) 다는 말 참으로 부끄럽구나.
이 칠언율시(七言律詩) 측기식(仄起式) 시(詩)는 초의선사(艸衣禪師)가 출가해서 사십년만에 고향을 찾아가서 성묘하면서 읊은 시(詩)다. 압운(押韻)은 추(秋), 두(頭), 수(愁), 류(流) 구(邱), 모두 하평성(下平聲) 우통(尤統) 한 운통(韻統)으로 작시(作詩)를 해서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 맞다. 칠언율시(七言律詩) 사련(四聯) 평측(平仄)은 함련(頷聯) 이구(二句) 평측(平仄)이 맞지 않은 것이 흠(欠)이다. 전체적으로 스님들 작시법으로 보면 압운(押韻) 율시(律詩) 평측운(平仄韻)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근체시 칠언율시(七言律詩) 평측(平仄) 잣대로 보면 함련(頷聯) 이구(二句)가 평측(平仄)이 흠(欠)으로 남는 시(詩)다. 역대 문장가 100여 분의 시를 근체시로 맞추어 보아서 다시는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을 논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초의선사(艸衣禪師)만 빼놓을 수가 없어서 맞추어 보았다. 이 칠언율시(七言律詩)는 초의선사께서 15세에 출가해서 58세(1834) 사십년 만에 고향 부모님 묘소를 찾아가서 읊은 시라고 전한다. 초의선사(艸衣禪師)는 다산(茶山)에게 주역(周易)과 유서 경전과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을 배웠다고 전한다. 다도(茶道)도 배웠다고 하나 논쟁(論爭)이 될 문제(問題)다. 다산(茶山)과 초의선사(艸衣禪師)는 24살 나이 차이가 난다. 그런 측면에서 일부 학자들이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초의(艸衣)는 다산(茶山)의 손때 묻은 제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대부 유자(儒者)들과 한시(漢詩)로 교류(交流)할 만큼 근체시(近體詩) 운통작법(韻統作法)을 기본적으로 익혀서 한시(漢詩)로 교류(交流)하였다고 한다. 초의선사(艸衣禪師)는 정조대왕(正祖大王) 사위 홍현주(洪顯周) 부마(駙馬) 권유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지어서 오늘날 우리나라 다서(茶書)로 각광(脚光)을 받고 있다. 화옹이 근래선지식중(近來善知識中)에 무불통달(無不通達) 백과사전(百科事典)이라고 칭송받았던 박한영(朴漢永) 강백(講伯) 강통(講統) 받은 운기강백(雲起講伯)을 모시고 대흥사(大興寺)에서 경전(經典)을 볼 때 대흥사(大興寺) 사찰 주변과 일지암(一枝庵) 주변에는 자생차(自生茶) 밭이 널려 있었다.
사찰(寺刹)에서는 마시는 것이 작설(雀舌) 녹차(綠茶)다. 봄에 여린 차싹을 따서 천불전(千佛殿) 가마솥에서 운기강백(雲起講伯) 스님 지도하에 차(茶)를 만들어 마셨다. 절에서는 다반사(茶飯事)로 차를 마시는 것이 일상사(日常事)다. 누구한테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수행(修行) 연륜(年輪) 따라 자연(自然)스럽게 습득(習得)하는 것이 절집 수행(修行) 다법(茶法)이다. 그래서 용상방(龍象榜)에는 다객(茶客) 소임(所任)이 있다. 대중스님들에게 차만 끓여 올리는 소임이다. 수행과 차는 땔 래야 땔 수 없는 수행의 일부(一部)가 차(茶)다. 조주선사(趙州禪師) 끽다거(喫茶去) 화두(話頭)가 있을 정도이다. 밥 먹고 나면 마시는 것이 절집 차(茶)다. 초의선사(艸衣禪師)의 시고(詩稿) 자료를 보니,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장행시(五言長行詩)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장시(長詩)가 많다. 작품(作品) 유시(遺詩) 전부를 근체시(近體詩) 작법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살펴보기에는 시간 소요가 많이 든 만큼 고향을 찾아가서 지은 칠언율시(七言律詩) 하나를 선택하여 운통평측(韻統平仄)을 맞추어 보았다. 중국 당송팔대(唐宋八大) 문장(文章)가들의 시도 운통평측(韻統平仄)을 당풍(唐風)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으로 맞추어 보면 맞지 않는 명시가 많다. 절집에 스님들 시 게송은 거의 가 다 근체시 작법으로 보면 맞지 않는 것이, 거의 다이다. 스님들 중에는 근체시(近體詩) 작법(作法)에 맞게 시를 지은 분으로는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대사(四溟大師), 소요태능(逍遙太能) 선사(禪師) 벽송지엄(碧松智儼) 선사(禪師), 초의선사(艸衣禪師) 등이다. 전체(全體) 시가 다 운통에 맞추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운통작법(韻統作法)에 맞추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유생(儒生) 유자(儒者)들과 시우(詩友)로 교류(交流)하였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에게 작시법을 배웠다고 해서 맞추어 본 것이다. 40년만에 고향을 찾아 읊은 이 칠언율시(七言律詩)도 압운(押韻) 다섯 운(韻)이 하평성(下平聲) 우통(尤統) 한 운족(韻族)으로 작시(作詩)한 것은 당풍(唐風) 근체시(近體詩)를 익힌 작시(作詩)인 것을 알수가 있다.
마구잡이 아무렇게나 지은 시가 아니다. 그만큼 시안(詩眼)이 열린 선사(禪師)이다. 옥경산방에서 자면서 주인에게 드리는 30운(韻)의 장시(長詩)를 보면 초의선사(艸衣禪師) 내공(內功)이 옅보인 시(詩)다. 오언(五言) 삼십운(三十韻) 육십행(六十行) 장행시(長行詩)다. 시구(詩句)를 보면 옛적에 남쪽 귀퉁이에 살면서 그대의 명성을 익히 들었거니, 젊은 나이에 문단에 나서 우뚝한 재주는 비견할 일이 없었지, 태산북두와 같이 높고 높아서 해와 달과 함께 높이 걸려 있었네, 천하의 뭇 호걸 중에 나라의 보배요 명현이 되었다. 항시 한번 뵙고자 했더니, 아득히 멀리 있어 가슴만 아팠네, 마침내 안개가 맑게 개여서 널찍이 비루함도 넓게 열리네, 촛대 잡고 밤늦게까지 노니노라니, 소매자락은 연신 나부끼는구나, 높은 정취는 허현도(許玄度) 청아한 시품은 음자견(陰子堅)이로다. 고아한 논설은 번거롭지 않으니, 마음속에 충만하여 조용하고 그윽하구나. 이미 인연이 닿아 서로 버릴 수 없는 몸, 가슴속 품은 말도 이야기 할 수 있겠네, 오호라 개울의 물줄기 끊겨 버렸으니, 세상이 일찍 버려 버렸구나. 바람같은 떠돌이 신세 정처 없으니, 처량한 모양새를 누가 가여워하리오. 교리 밖에다 몸을 풀어 놓고 마갈 앞에서 명을 받았네, 궁벽한 산야에 자취를 남기고, 애오라지 헛된 인연 보내 버려야지, 공방에는 잡초들만 무성하니, 슬프다 공연히 설연(雪蓮)만 매 만진다. 아련아련 고승들의 유적을 찾았지만 어쩔꼬 빈 통발만 거둬 올렸구나, 이미 말로도 받을 수 없으니, 하물며 마음으로 전할 길 있겠는가?
텅빈 넓은 황금의 보전에 야호선(野狐禪)의 무리만 오가는구나. 용과 코끼리들 울음소리 들리듯 하니, 바람결에 눈물만 잔잔히 흐르네, 참된 의지처가 이렇게 적막하니, 어떻게 지난 허물을 씻어 낼거나, 다시 청운의 선비 힘써 쫓아서 고루한 심지를 깨끗이 닦아내고 싶어라. 세간에서야 승속을 나눈다지만 도에서는 한도 중간도 두 끝이 없는 법이지, 깊이 궁구하여 오묘한 이치 깨우치면 바르고 치우침이 또한 없다네, 군자가 항상 실천하는 바는 원래 깨끗이 씻어 버림을 귀하게 여기나니, 욕심 없이 홀로 편히 지내고 맑은 길 걸으니 옮길일 없으리라. 벼슬받어 조정에서 노니는 일이 어찌 주렴 아래서 잠자는 것과 같으리오. 마음 비우고 골짜기에서 노닐고 여유 있게 놀면서 자연에 누으리라. 내 오묘한 가르침 맛보지 못했으니,힘써야 할 바를 이해도 못한 다네, 실낱같은 티끌도 살펴 맑게 관찰하고 동떨어져 말하지 않길 바라노라. 서로 즐겨 노니는 이곳에서만 만고의 한유(韓愈)와 태전(太顚)처럼 되게 마소. 이 장시는 옥경산방주인(玉磬山房主人) 하룻밤 자면서 이로영(李魯榮)에게 주는 시다. 시 말미에 한퇴지(韓退之)와 태전선사(太顚禪師) 선화(禪話)까지 들면서 그런 인연이 되지 말자고 한다. 전체 시정(詩情)이 잔잔한 물 흐르듯이 정(情)에 치우치지 않는 담백(淡白)한 맛이 나는 시다. 원문 한시는 너무 긴 시라 채록하지 않았다. 삼십운(三十韻)으로 장시(長詩)를 짓는 것도 쉽지않는 일이다. 평생을 작시(作詩)로 보낸 사람도 시(詩) 한 구절 얻고 대구(對句) 못찾아 몇 년을 끙끙대는 선비들이 많았는데 말이다. 오늘은 초의선사(艸衣禪師) 시(詩)로 반추(反芻) 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