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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證言) 박봉애( 朴奉愛) - 세상 것 돌아보지 않고 6. 전국 순회부흥사로 1 1964년 10월 1일 제1차 전국 순회부흥이 시작되었다. 나는 안창성(安昌成) 강사와 같이 도청소재지에서 순회강연회를 가졌다. 맨 처음 경기도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수원에 도착하여 먼저 경찰국장을 찾았다. 2 할 수 없이 명함을 내놓았다. 그는 놀라는 표정으로 “정당에 계시던 박 선생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선교운동을 하신다니 기쁩니다” 하고 반겨주었다. 3 나는 농을 하면서 “내가 야당 시절에는 당신들 욕을 제일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는 맘을 고치고 선한 말만을 하려고 종교운동을 하오” 하면서 우리가 이번 경기도 내에서 내일부터 각 시·군에 일제히 부흥회를 시작하는데 협조해 주어야겠다고 하니 도와주겠다고 쾌히 승락한다. 4 “두 가지 선전을 위해 마이크를 사용해야 하겠는데 돈이 없어 자동차는 사용할 수 없고 도보로 마이크 선전을 해야겠으니 허락해 주시오” 하고 부탁했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했으나 결국 협조해 주지 않을 수 없어 곧바로 경비전화를 걸어 각 시·군에 일제히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 지시를 내렸다. 5 우리 일행은 지금까지 통일교인들의 울분을 터뜨리기라도 하듯 생명의 말씀을 마이크를 통하여 전국 각지에서 전했다. 부흥회 도중에 간혹 어떤 시·군에서 마이크 사용을 못 하게 한다는 소식을 받으면 또 경찰국을 찾아가 떼를 썼다. 그리하여 제2차 전국 부흥회는 예정대로 잘 진행이 되었다. 6 1964년 12월 25일은 제3차 전국 순회 부흥회가 시작되어 또다시 안창성 강사와 같이 도청 소재지를 순회했다. 이번의 내 사명은 각 지방신문사를 찾아가 부흥회하는 내용을 신문에 실리는 일이었다. 먼저 사장을 찾고 편집국장을 찾으면 거의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7 그래서 사장이나 국장이 꼭 와서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만일 시간이 허락 안 되면 기자라도 보내어 듣고 그 내용을 크게 보도해 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어떤 신문사에서는 한 마디로 거부해 버린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언론인의 자세를 강조하곤 했다. 8 “당신들은 국민의 기수로서 사회상을 숨김없이 보도하는 책임자들인데 죄악상을 늘어놓는 데는 과감하게 지면(紙面)을 아끼지 않으면서 이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과 보람된 일을 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될 것 아니겠소. 국민을 올바르게 선도하는데 언론인이 좀 더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라고 부탁을 하면 마지못해 기사 취급을 해주는 신문도 있었다. 9 대전의 중도일보, 강원도의 강원일보는 대대적으로 연일 기재해 주었고, 충북일보, 전남일보, 전북일보, 경남일보, 경북일보 등은 통일 교회 부흥전도 기사를 처음으로 다루어 주었다. 이렇게 전국을 순회하면서 언제나 우리의 힘은 하늘을 앞세우고 믿고 용기 있게 나가면 이루어 주신다는 평범한 진리를 체험하게 되었다. 일이 힘들고 어렵고 심각해져야 싸울 맛이 나는 법이라는 것을……. 10 그다음부터는 개별적으로 경상남북도와 강원도를 두 번 돌았는데 경남 울산에서 일어났던 기억 한 토막은 빼놓을 수가 없다. 태풍 ‘사라호’가 지나가던 그 시간에 나는 울산에서 강동면(江東面)에 나간 여학생 두 명이 방도 못 얻고 잠잘 곳이 없어 바닷가에서 자다가 밤중에 폭우를 만나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아갔다가 11 떠나고 없어 면소(面所)와 지서에 가서 계몽 나온 어린 여학생들을 돌봐주지 않았다고 항의하고 돌아오려는데 버스가 하루 한 번밖에 운행을 안 한다니 하는 수 없어 50리쯤 못 걸어가겠느냐 생각하고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데도 그냥 떠났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갑자기 태풍 ‘사라호’가 불어오는 것이다. 12 길바닥은 주먹만큼 한 돌을 깔아 놓았고 바람은 심하여 눈을 뜰 수 없다. 언덕 밑으로 바싹 붙어서 간다고 하면 어느새 내 몸은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자지러지게 놀라 다시 언덕 밑으로 걸어가면 눈 깜박할 사이에 내 몸은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 있다. 13 이렇게 태풍과 사투(死聞)를 하면서 주저앉을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어 기진맥진하여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하는데 앞길은 고개 또 고개 첩첩산중이요, 천지를 분간키 어려웠다. 14 나는 길 한복판에 서서 빗발치는 허공을 응시하며 바람과 비를 꾸짖었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바람과 비가 나를 이다지도 괴롭힐 수 있는가? 나는 간다” 내 여기서 쓰러질 수 없다. 바람아 잔잔하라. 썩 물러가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렇게 사납던 태풍이 멈추고 비도 그치고 산봉우리 너머로 시커먼 구름이 쫓겨가고 있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5 과학을 배우고 이성이 있는 내가 내 눈앞에 나타난 기적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연의 일치일는지는 모르나 내 말이 끝나자 나타난 기적은 현실이었으니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다시 기도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린 딸의 기도를 응낙해 주셔서 죽음의 위기를 면했습니다” 16 한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 그러나 통쾌했다. 나도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었구나. 누가 안 믿어 주어도 상관없다. 나는 믿으니까. 돌부리에 채여 신바닥은 다 터져 나가고 내 몸뚱이는 물귀신 같고 양산도 달아나고 핸드백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17 동리에 내려오니 우물가의 여인들이 물을 긷고 있기에 “여기서 울산이 몇 리 남았소” 하고 물으니 그들은 대답 대신 내 꼴을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대관절 어디서 오십니까?” 하고 되묻는다. 강동면에서 온다고 하니 멍하게 입만 벌리고 대답을 않는다. 18 아니 그 태풍을 만나면서 어떻게 걸어왔느냐고. 지금은 아무리 농촌 사람이라도 그 고개를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산고개가 몇 고개나 되오?” 하고 물은즉 아흔아홉 고개라고 하는데 나는 놀랐다. 백여 고개를 내가 태풍 사라호와 싸우면서 넘었다니? 10리 밖에 안 남은 울산 길, 큰 길에 나와서 버스를 보니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이 다리가 무겁다. 19 버스를 타고 울산교회에 도착하니 두 여학생이 깜짝 놀라면서 “순회사님, 어떻게 오셨어요” 한다. “내 자가용으로 왔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연방 내 꼴만 쳐다보고 있다. 모든 식구들이 거짓말 같다고 믿어 주지를 않으나 나는 확실히 아침에 버스를 타고 강동면을 다녀왔으니까 말이다. 20 시계를 보니 한 시간에 10리를 걸은 셈이니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늘은 결코 사랑하는 딸을 버리지 않고 보호해 주신다는 자신이 더욱 나를 흐뭇하게 해주었다. |
証言 朴奉愛 - 世間のものには目もくれずに 6. 全国巡回師として 一九六四年一〇月一日、第一回全国巡回復興が始まった。私は安昌成講師とともに道庁所在地で巡回講演会を開いた。 最初は京畿道から始まるので水原に到着し、まず警察局長を訪ねた。仕方なく名刺を出した。彼は驚いた表情で「政党にいらっしゃった朴先生ですか。」と聞いた。そうだと言うと「宣教運動をされるとは嬉しいことてす。」と喜んでくれた。私は冗談を言いながら「私が野党時代にあなた方の悪口をずいぶん言ったのでこれからは心を入れ替えて善なることだけを話そうと宗教運動をするのです。」と言った。私たちが今度京畿道内で明日から各市郡で一斉に復興会を始めるのですが協助してもらわなければと言うと快く承諾してくれた。 「宣伝を二つするためにマイクを使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が、お金がなくて車は使えないので、歩いてマイク宣伝することを許可してください。」とお願いした。彼は困った表情をしながらも結局協力せざるをえず、すぐに警備電話をかけ各市郡に一斉に使えるよう許可指示を下した。 我々一行は今までの統一教会の鬱憤を晴らすかのように命の御言をマイクを通して全国各地で伝えた。復興会の途中で、時折、ある場所でマイク使用が禁止になったという知らせを聞くと、再び警察局を訪ねお願いした。そうして第二次全国復興会は予定通り進んだ。 一九六四年一二月二五日は、第三次全国復興会が始まり、安昌成講師とともに道庁所在地を巡回した。今回の私の使命は各地新聞社を訪ね、復興会の内容を新聞に載せてもらうことだった。まず社長を訪ね、編集局長を訪ねて行くと、殆どが私の名前を知っていた。それで社長や局長が必ず来て聞くようにと強調し、万が一時間がなければ記者だけでも送って、内容を大きく報道するようにお願いした。しかし、ある新聞社では一言で拒否されたこともあった。そんなとき、私は言論人の姿勢を強調したりした。「あなた方は国民の旗手として、社会の様子を隠さず報道する責任者たちなのに、罪悪を並べ立てることには果敢に紙面を使うのに、この民族に新しい希望を与え、ためになることをしようとすることに対しては、けちなことを言ってはいけ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国民を正しく先導していくことに、言論人たちがもう少し関心を持って頂くことを望みます。」とお願いすると、やむを得ず記事として扱ってくれる新聞社もあった。 大田の中道日報、江原道の江原日報は大々的に連日記載してくれたし、忠北日報、全南日報、慶南日報、慶北日報などは、統一教会の復興伝道の記事を初めて扱ってくれた。このように全国を巡回しながら、いつも私たちの力となったのは、天をまず最初に考え、信じ、勇気を持って行くならば導いてくださるという平凡な真理を体験することだった。物事は大変で難しく深刻であるほど闘い甲斐があるということを。 その次からは個人別に慶尚南北道を二回ずつ回ったのだが慶南蔚山で起こったひとコマは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 台風「サラ号」が過ぎ去った頃、私は蔚山から江東面に出かけて行った女学生二人が泊まる所も見つからず寝る所もないので海辺で寝ていたところ、夜中暴風雨に遭い苦労しているというのを聞いてそこを訪ねたのだが既にいなかったので、面所と支署に行って啓蒙に出た幼い女学生の面倒を見てくれなかったことを抗議して帰ろうとしたところ、バスが一日に一回しかなく仕方ないので五十里くらい歩けなくもないと思い雨雫がぽとぽと落ちてきていたがそのまま出発した。一時間も歩いただろうか。突然、台風「サラ号」が吹いてくるのだった。 道端は拳骨ぐらいの石が敷かれ、風はひどく、目を開けていられない。丘の下にピッタリ張り付いていたところ、いつの間にか私は崖の端に立っていたのだ。びっくりしてまた丘の下へと歩いていくとあっと言う間に私の身体はぎりぎりの崖っぷちにあった。こうして台風と死闘を続けながら座り込むこともできず振り返ることもてきず疲労困憊になって一歩も踏み出すことができないのに先は峠また峠の連なる山ばかりで天地を見分けるのが難しかった。私は道の真ん中に立って容赦なく吹きつける虚空を見つめながら風と雨を叱った。「私は神の娘だ。風と雨が私をこんなにも苦しめねばならないのか。私は行く。」私はここで倒れ込むわけにはいかない。風よ、おさまれ。さっさと引き下がれ。私の言葉に恐れをなしたのか、あんなに激しかった台風が止み、雨も上がり峰越しに黒い雲が追い払われて行った。私はただ驚くばかりだった。 科学を学び理性を持った私が自分の目の前で起こった奇跡をどうやって解釈すればいいのか分からなかった。偶然の一致かもしれないが私の言葉が終わってすぐに起こった現実だったので驚かざるをえなかった。私はもう一度祈祷した。「お父さま、感謝します。幼い娘の祈祷を聞いてくださいまして、私は死の危機から逃れられました。」 峠を越えるとまた峠、でも痛快だった。私も奇跡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だ。誰も信じてくれなくてもいい。私は信じているから。 石の角で靴の底は破れ、ハンドバッグからは水がぽたぽた流れ落ちた。村に下りていくと井戸端で女たちが水を汲んでいたので「ここから蔚山まであと何里ですか。」と聞くと彼女らは答えの代わりに私の姿を上から下まで眺め回しながら「一体全体、何処から来られたのですか。」と聞き返してきた。江東面から来たと言うと唖然として答えてくれなかった。あの台風の中どうやって歩いて来たのかと。今では農村の者でもあの峠を歩いて通る人はいないというのだ。「一体、あの山の峠がいくつなんですか。」と聞くとすぐに九九個だと言うので私は驚いた。一〇〇余りの峠を台風サラ号と闘いながら越えたとは。 あと十里となった蔚山への道のり、大きな道に出てバスを見つけると一歩も動けなくなるほど足が重い。バスに乗り蔚山教会に到着すると二人の女学生がびっくりして「巡回師様、どうやって来られたのですか。」と言う。「私の自家用車で来たのよ。」何のことか分からず、私の姿だけを眺めていた。食□全員が嘘だといって信じてくれないが私は確実に朝バスに乗り江東面に行って来たのだ。 時計を見ると一時間に十里を歩いたことになりこれが奇跡でなくて何だろう。天は決して愛する娘を捨てられず保護してくださるという自信が更に私の心を温かくしてくれた。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