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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탕자의 터닝 포인트, 절대 궁핍>의 줄거리:
흔히들 회개는 유턴이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메타노이아'라는 헬라어의 의미가' 마음을 바꿈'의 뜻이 있습니다.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마음 쓰는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모든 유턴은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이 터닝 포인트를 모르면 결코 회개가 실제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가 말만 무성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탕자의 터닝 포인트, 절대 궁핍
(누가복음 15장 11절~20a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탕자의 터닝 포인트 절대 궁핍>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탕자의 터닝 포인트 절대 궁핍’
본문에 나타난 탕자는 터닝 포인트를 아는 탕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탕자들은 터닝 포인트를 모른 채 살아갑니다.
흔히 “회개는 유턴”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대로 유턴이라는 표현은 회개에 잘 들어맞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써 “마음의 목적이나 의도를 바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어떤 행동에 대한 단순한 뉘우침이 아니라 그 행동이 나오게 된 마음 상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회개의 목적은 그러한 행동이 더는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 단지 행동 자체를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회개는 유턴이라는 표현과 잘 어울린다는 것입니다. 다만 유턴이 이루어지는 지점인 터닝 포인트를 알아야 합니다. 아무 곳에서 유턴을 하다가는 사고가 나기 마련입니다. 이 터닝 포인트를 모른다면 실제 돌아섬의 회개는 일어나지 않고 말만 무성해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17절에서 회개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헬라어로 직역하자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라는 의미입니다. 탕자는 마음의 방향을 전환하여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이 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되는 것일까요? 탕자는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께 등을 돌린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먼 타국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 마음을 따라서 타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행복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돌이켜 등졌던 아버지를 목적지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의미입니다. 탕자는 타국에서 번영하는 자기 모습을 기대하고 집을 나왔지만 허랑방탕하여 궁핍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신을 목적지로 찾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라는 내용의 의미입니다.
인간의 모든 관계는 나와 너라는 입장에서 이루어집니다. 너의 자리에 있는 대상들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어 한 남자가 있습니다. 너의 자리에 아내가 있을 때는 남편으로서 행동합니다. 너의 자리에 자녀가 있을 때는 아빠로서 행동합니다. 또 너의 자리에 학생이 들어서면 선생님으로서 행동합니다. 이렇게 너의 자리에 있는 대상에 의해 나의 정체성은 결정됩니다. 탕자의 경우에는 너의 자리에 타국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동물의 대표인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이방인의 종살이를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는 모습에서 풍족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던 탕자는 너의 자리에 아버지를 떠올림으로써 자신의 모습을 되찾고자 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나님께 적용해보자면 너의 자리에 하나님을 놓지 못하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 앞에서 남편으로서의 모습도 가짜이며, 자녀 앞에서 아빠로서의 모습도 가짜입니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하나님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였듯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의 나를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한편 탕자를 보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계기가 의심스럽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이나 효심 때문에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탕자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계기입니다. 자기 배가 고파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진정한 회개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탕자의 굶주림은 절대 굶주림입니다. 상대적 굶주림이라면 다른 사람은 세끼 먹을 때에 한 끼밖에 못 먹는다거나, 다른 사람은 여러 가지 반찬을 놓고 먹을 때 한 가지 반찬만 놓고 먹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가 타국에서 처한 굶주림의 상황이란 애초에 먹을 것 자체가 없는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절대 굶주림의 상태와 절대 궁핍의 상태가 신앙적 회개가 이루어지는 터닝 포인트로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절대 굶주림은 탕자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되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나쁘게 보시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회개의 터닝 포인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정리해봅니다. 회개는 마음의 목적지를 바꾸는 일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너의 자리에 있는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은 만들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두 가지 이해를 놓고 본다면 너의 자리에 세상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를 두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뀌게 되는 계기 즉 터닝 포인트가 바로 절대 굶주림이고 절대 궁핍입니다.
회개와 관련된 큰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잘해보겠다고 애를 쓰다가 원하는 만큼 일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에 가고자 할 때 장애물이 생기고 방해를 받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내가 혹시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게 장애물을 주셨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 고쳐야겠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세상일이 안 될 때 잘되기를 원하여 장애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회개라고 생각해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본문에 나오는 탕자와 비교해봅니다. 공통점은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안 풀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차이점은 탕자는 삶의 현장에서 절대 궁핍을 느낍니다. 이래도 저래도 결코 채워짐이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리라 믿고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원하는 목적지에 가는 일에 방해와 위기가 발생했으므로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뉘우칩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삶의 현장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여전히 기쁨과 만족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고 있으면 터닝 포인트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온전한 회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회개는 바로 삶의 현장에서 절대 궁핍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마음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 사업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탕자와 같이 절대 궁핍을 느낀다면 사업으로는 결코 마음이 채워질 수 없음을 느끼고 사업현장에서 마음을 떠나보내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해 온 회개에서는 이와는 반대의 경향이 발견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업현장에 마음을 붙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서라도 사업의 성공을 위한 회개를 해왔습니다. 장애물 제거 전략으로 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회개는 하나님의 마음 달래기의 형태를 띠게 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드림으로써 사업의 장애물을 제거하여 성공이라는 지점에 도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개는 터닝 포인트를 모르고 도달할 수도 없기에 잘못된 것입니다. 돌이킴 없이 말만 무성하게 되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원래 목적했던 대상들을 향한 마음의 방향이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놓고 보면 문제는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의 자리에 갈 수 있느냐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우리의 생각과는 상반되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공에 도달하여 마음을 채우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를 위해서는 성공이 아닌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안 되기에 진정한 회개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은 계기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을 느낄 수 없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떠올릴 수도 없습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경위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탕자는 타국에서 절대 굶주림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타국에서는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난 뒤에야 풍족함이 있는 아버지의 집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기 배가 굶주렸다고 아버지를 떠올렸으니 효심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오히려 괘씸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러한 회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을 느끼고 마음의 방향을 바꾸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목적지로 삼을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본문에 등장한 허랑방탕이라는 개념입니다. 이와 연관하여 떠오르는 단어들을 나열해보자면 사치, 과소비, 음주가무, 주색, 마약, 탈선 등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허랑방탕이라는 표현은 비유적인 것으로서 이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앞에 두고 이러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12절을 보면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살림을 나눠주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에 해당될까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재산입니다. 예를 들어 돈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돈으로 마음 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해 마음을 쓰고, 사업을 해도 마음을 씁니다. 사람은 모든 일에 마음을 쓰며 살아갑니다. 마음을 쓰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채움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과 허랑방탕을 연관 지어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재산이 마음이기에 사람들은 마음을 써서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났다는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는 마음을 채우고자 하지 않는 모습을 상징합니다. 아버지 이외의 다른 대상을 통해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허랑방탕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대통령은 나랏일을 잘해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근면하고 정직하고 부정부패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국민들이 잘사는 것이 대통령의 꿈이고 만족과 기쁨의 기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이러한 모습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신앙적 기준에서는 하나님 대신 국민들에게 마음을 쓴 것이기에 허랑방탕하게 마음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대통령의 할 일이란 하늘 아버지로만 마음 채우기를 바라고 실제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리면 나랏일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대통령의 일상이 될 수 없다면 그 대통령은 하나님 앞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가 아닌 타국에서 마음을 채우려고 했던 모든 일이 허랑방탕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목사님도 허랑방탕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현장에 대해 절대 궁핍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목회로 기쁨과 채움은 주어질 수 없음을 알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목회현장에서 마음 채움을 시도하며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교인을 늘리기 위하여 근면하고 정직하게 열심을 다해 목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이 늘면 웃고 교인이 줄면 걱정하고 슬퍼합니다. 이것이 바로 허랑방탕한 탕자입니다.
가정에서도 허랑방탕할 수 있습니다. 주부가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 양육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성공과 자녀의 형통으로 마음 채움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크고 작은 일들로 일희일비하지만 이 또한 지독한 허랑방탕한 탕자입니다. 가정에서도 절대 궁핍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가정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회개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삶의 현장을 떠나는 회개를 할 수 있고 마음은 하늘 아버지를 향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 가정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장소가 됩니다. 이러한 신비가 일상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현모양처일지라도 허랑방탕한 탕자가 됩니다.
모든 회개는 땅을 떠나 하늘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땅에서 마음 채움의 기대를 유지하면서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방해를 제거하는 용도로서의 회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한 회개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내가 처해 있는 삶의 현장이 절대 굶주림과 절대 궁핍의 장소임을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으로도 마음 채움이 없는 장소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아버지를 향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회개의 중요한 포인트는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7절을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품꾼조차 양식이 풍족하다는 그림 그리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절대 궁핍에 이어지는 회개의 필수과정이 됩니다.
이 세상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재산인 마음을 써서 만족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일이 허랑방탕한 삶입니다. 아무리 근면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일지라도 마음의 방향이 세상을 향해 있는 한 허랑방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 때 절대 궁핍만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를 떠올렸다면 이제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 아버지의 풍족함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을 보면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쉽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순간을 묘사하며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이미 아버지 집의 풍족함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육체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의 평강이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회사에 출근을 합니다. 회사는 승진과 월급으로 만족하려는 허랑방탕한 장소입니다. 그럴 때 나는 허랑방탕한 회사라는 장소에서 절대 궁핍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승진을 백 번 해도, 월급인상이 백배가 될지라도 진정한 기쁨과 만족은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사건을 되새기며 회사라는 상황을 뒤집어 생각해보자면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되었다면 승진이나 월급인상은 돼도 안 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스스로에게 깨우쳐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번에 대학입시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는 대학입시를 통과해야 하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풍족함을 그려낼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거나 못 들어가는 것은 마음 채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자녀가 대학입시에 통과하여 기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할 수 없이 더러운 허랑방탕임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단계로 내가 아버지로 채워졌다면 자녀가 대학을 들어가도 기쁨이 될 수 없으며,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도 슬픔이 되지 않음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아버지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잘못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자녀가 대학입시에 실패했다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우리 아들과 딸이 이렇게 안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아버지께서 아들과 딸에게 지혜를 주셔서 다음에는 합격하게 해주시겠습니까? 헌금을 더 해야 합니까? 충성을 더 해야 합니까?”라고 하며 이것을 회개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는 허랑방탕에 목적지를 둔 것이고, 허랑방탕을 지속하는 것이며, 허랑방탕의 모양을 바꾸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끝내 삶의 현장에서 채워짐을 기대하고, 삶의 채워짐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회개하였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돌이킴의 문제는 자기부인과 일치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을 쓴 만큼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 무서운 허랑방탕임을 깨닫고 그러한 나를 부인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서 근면하고 성실해 보여도 허랑방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려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아버지 집의 풍족함이 내 안에 들어왔다면 세상일의 성취를 간절히 바랄 수는 없습니다. 세상일은 이루어져도 조금도 기쁨이 되지 않으며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조금도 슬픔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면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때 죄적 체질이 자꾸만 마음을 삶의 현장에 묶어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 아버지께로 갈래?”라고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 때에 우리는 “네! 갈래요.”라고 응답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품꾼까지도 풍족한 아버지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군천사를 품꾼처럼 여기시며 풍족함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세상을 탈출할 것이니 나를 따라오면 삶의 현장을 떠나게 될 것이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러서 아버지의 풍족함을 그림 그리고 아버지를 소원하게 될 것이다. 마음의 방향을 세상이 아닌 아버지를 향해 고정시킬 때에 아버지께서 너를 불러들이실 것이고 아버지께로 가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절대 궁핍을 터닝 포인트로 삼아 허랑방탕한 세상에 마음 붙이기는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리며 아버지께로 가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의식으로 꼭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삶의 현장에서 절대 궁핍을 인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론으로라도 내가 얼마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는가를 깨닫게 하여 주심으로써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그림 그리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주셔서 기어코 아버지께 도달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