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당나라 가담(賈耽, 730-805)이 저술한 『도리기』(道里記, ·신당서· 권 43 지리지)에 보면 중국에서 신라로 가는 해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이야기 하는 ‘북방해로’인 것이다. 이에 의하면 등주(登州, 산동성 봉래 山東省 蓬來)를 출발하여 동으로 대사도 (大謝島, 장산도)· 구험도(구기도)· 동도(대·소험도)· 조호도(남황성도)를 거쳐 300리를 나아간다. 그리고 북으로 노철산 수로를 지나 마석산(馬石山, 노철산)의 도리진(都里津, 여순만)까지 200리를 가서 동으로 청니포(대련 부근)·도화포(금현 청수하구)·은화포(장하현 화원구)·석인왕(석성도)과 대양하구를 지나 오골강(烏骨江, 압록강)까지 800리 길을 간다.
여기서 다시 남쪽 해안, 즉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오목도(평북 선천군)·패강구(대동강 하구)·숙도를 지나 장구진(황해도 풍천군)에 이른다. 다시 곡도(백령도)· 진왕석교와 마전도·고사도(강화도)· 덕물도(덕적도)를 거쳐 당은포에 이른다. 이곳은 『도리기』의 종점으로 신라 시대에 대중국 대륙 교통의 요지 가운데의 하나였다. 당은포에서 ‘육로로 700리’ 길을 가서 신라의 서울 경주에 도착한다.
이 해로는 곧 중국의 산동반도 등주를 출발하여 동북쪽으로 발해만의 노철산하구를 거쳐 대련만의 동쪽을 지나 압록강 하구에 이른다. 여기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대동강 하구와 초도를 지나 옹진만과 강화도·덕적도를 거쳐 남양만에 이르는 항로를 말한다. 이 뱃길은 552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유한 뒤로 때로는 고구려·백제의 방해로 막히고 위협을 받기로 하였으나 멸망할 때까지 중단 없이 이용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의 이 행로는 근해연안 혹은 섬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였다. 비록 항해거리가 멀고 시간이 걸린다고는 하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로 이른바 ‘사신을 보내 헌공한다’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의례적인 교빈관계가 이 항로를 통하여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그래서 이 곳에는 일찍부터 신라관·발해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신라 말 경애왕 4년(927)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등주 신라관에 지후관(知後官) 이언모(李彦謀)를 파송하여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적산포는 신라와 당 그리고 일본을 이어주는 가장 안전하고도 중요한 항로의 종착지이며 중원과 일본으로 아나가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장보고의 ‘대당매물사’ 선박이 오고가던 곳이며 일본으로 교관선(交關船)이 출발하던 항포였다. 장보고의 통제 하에 있던 국제무역항이던 셈이다. 법화원의 승려들까지도 일본으로 쉽게 갈 수 있었던 곳이며 청주병마사 오자진(吳子陳) 등이 신무왕의 즉위를 위문하는 사신이 되어 수행원 30여 명과 함께 법화원을 방문하고 신라로 출발했던 곳도 바로 이 적산포였다. 앞서 초주에서 9척의 신라선을 구입하여 귀국하던 일본의 조공사 선박도 이곳에서 출항하였고 후일 일본의 엔닌도 적산포에서 귀국하였다. 장보고의 무역선단을 이끌고 온 청해진의 병마사 최훈이 다시 이곳에서 양주로 유산포로 왕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선박들이 국제 무역선이건 연해안 운항선이건 적산포를 기점으로 남북을 멀다 않고 오고 가고 하였다고 한다.
4. 중국의 동쪽 끝 –봉래시- 등주(登州, 山東省 蓬來, Penglai )
장보고의 고향 같은 등주(登州)는 산동성의 동북쪽 해안에 있는 펑라이(봉래시, 蓬來市)시의 옛 지명이다. 지금의 봉래수성의 동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다. 춘추 이래 그 이름이 사서에 나타나지만, 수당 시대에 와서 우리나라의 삼국을 비롯하여 발해·일본 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더욱 번성하였다. 봉래라는 이름은 옛날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 속의 바다 가운데 있는 산의 이름으로 중국 한조 때 한 무제가 이곳에 와서 신선산을 보려고 했으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신선산이 보이지 않으니 경치가 수려한 이곳을 '봉래(蓬萊)'라 명하였다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당조 때에는 봉래진으로 불리우다 후에는 등주라 불렀다 한다.
이 봉래(펑라이)시는 필자와는 인연이 깊은 도시인데 처음 북경 청화대학 연구교수로 부임해 왔을 때 첫번째 프로젝트로 이곳 펑라이 신도시 개발 계획을 맡았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청화대학의 리더샹교수와 같이 이일에 참여하여 이곳 펑라이의 역사정과 발전성에 대해 많은 토론을 하고 이곳 관계자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곳의 봉래시의 관리는 연변과학기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가르쳤던 제자 김광춘인데 처음 이곳 봉래로 발령 받아 와서는 무척 고생이 심하였지만 지금은 서른둘의 젊은 나이로 대한국 기업의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봉래시 초상국 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중국 각지에서 성실하고도 능력이 출중하게 일하는 우리 한민족 동포들을 볼때마다 장보고의 후예로서의 자부심과 한민족 깊은 곳의 동질감을 느낀다.
이 등주수성은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할 때, 수·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수군을 발진시킨 곳으로, 아름답다라기 보다는 전재의 냉기가 스며 있는 곳이고 이곳에서 발견된 고대 선박들을 모아 고선박물관이라고 하는 곳에 전시하여 놓았는데 이 박물관은1988년 7월부터 건축하여 1990년에 완공되었으며 통석선조각과 봉래 원나라 전선이 전시되어 있었다.
등주는 도교·신선사상과 매우 관계가 깊은 곳이다. 그래서 봉래각을 중심으로 한 전각들, 삼청전·천후궁·용왕궁 등에 모셔져 있는 상(像)들을 보면 짐작할 수 있고 등주 앞바다에는 예부터 신기루가 자주 일어나서 중국 사람들은 ‘해시신루’ (海市蜃樓)라고 하여 신선이 살고 있는 성시라 생각했다.
진시황의 신하인 서복(徐福)이 불로초를 구하고자 배를 타고 떠난 곳도 산동성 성산각(成山角)으로 이곳 산동은 중국 도교·신선사상의 고장이다. 그래서 8신선이 바닷가에 큰 동상으로 자리잡고 이곳 봉래시에 오는 이들을 반긴다. 중국인들에게는 8신선이 살던 곳으로 이곳 펑라이시가 잘 알려져 있다.
이곳은 북쪽이 바다이기에 겨울 바람이 유난히 차다. 그 찬바람 몰아치는 등주수성.. 그러나 해변가에 위치한 등주수성은 침입자들이 스스로 무기를 버리고 붓을 들어 시를 지었다고 할 만큼 주변의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해안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되 거만하지 않으며, 성벽을 두르되 고집스럽지 않은 등주수성. 이곳이 여러 차례 전쟁에 휩싸인 접전지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도시들을 이동하면서 보면 중국의 도로들은 앞으로 50년 이상을 내다보고 설계한 도로여서 한산하다 못해 텅 비어 있는 도로와, 물류가 늘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차도만큼 넓은 자전거 도로, 가로수 외에 가로수 옆에 묘목 밭을 둠으로써 이중의 방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한 점을 보면 넓은 중국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진다.
봉래각이 있는 이곳 등주지역은 장보고 시대에 장보고 선단이 들렀던 곳인데 역사를 배우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며,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역사를 보고 오늘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현재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보다 역사적인 사실에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가 ?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실 이 말은 앞으로 역사 공부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기준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위기의 순간들은 과거 장보고가 좁은 한반도를 떠나 드넓은 해상을 호령하던 시대를 거울삼아 동북아 시대를 꿈꾸는 한민족 공동체의 앞길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5. 위해시 석도진 적산법화원 (赤山法華院) – 장보고님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영성시 석도진은 한반도와 중국을 1차로 연결하는 항구로서 1,200년 전 장보고 대륙진출의 거점이었다. 석도진항 부근에는 신라인들의 자치기관, 신라인들이 만든 조선소와 선박수리소가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흔적은 찾을수 없고 포구는 해수욕장으로 변했다. 문등현 청녕향 적산촌(산동성 영성시 석도진)은 산동반도 일대를 중심으로 한 신라인 사회의 심장부일 뿐만 아니라 당 내륙이나 연해안으로 이르는 교통과 나·당·일 삼국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서기 820년대 초반 장보고 대사가 세운 적산법화원이 있어 당시 중국에 살던 신라인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석도만에는 모야도(島)라는 섬이 있다. 통일신라 때 일본승려인 옌닌(圓仁)은 입당구법순례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장보고 선단의 배를 타고 이곳을 정오에 출발하였는데 그 다음날 오전에 신라의 땅을 보았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과는 가까운 곳이다.
적산법화원은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石島鎭) 적산(赤山)기슭에 자리잡고 있는데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은 것으로 우리 전통의 사찰의 형식과는 다른 중국식의 형태로 볼 수 있다. 당조(唐朝)시기,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지은 것으로 창립 초기에 법화경(法華經)을 읽었다 하여, 유래된 것인데 당시 산동에서 규모가 제일 큰 불교사원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먼 옛날에 적산은 온통 붉은 것으로 뒤덮혀 있었는데 여기에 사는 적산신(赤山神)이 오가는 선박들의 안전을 가져다준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불공을 드렸다. 중국 역사서에는 당조(唐朝) 전성시기에 신라인 장보고가 출세를 위해 당(唐)으로 불법이민을 하였고.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중·일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중·일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무역왕으로 불리웠다.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읽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기원 838년 일본스님 옌닌대사 일행은 견당사로 입당하여 법화원에서 3년 가까이 묵으면서 법화원의 많은 신세를 졌다. 옌닌은 당조의 정치, 문화, 경제 등 여러방면의 지식을 배우면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란 여행기를 썼는데 여행기에 법화원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귀국한 뒤에도 옌닌은 적산법화원의 은혜를 잊지 못해 일본 교또의 소야산에 적산 이름으로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웠으며 일본 불교 중종의 3세 좌주에 까지 올랐다 . 1988년 영성시(榮成市)에서는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고 선조들의 위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하여 원래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법화원은 북쪽으로는 적산(赤山)이 우뚝 솟아 진산을 이루고 서남쪽은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동쪽은 활짝 열려 바로 아래 산동 제일의 어항 석도만(石島彎)과 오(吳)나라 철공인 간장(干將)의 전설이 전해오는 막야도(莫耶島)가 보이는 아름다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더욱이 절 마당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물이 이 절의 운치를 한껏 더해 준다.
연간 5백 섬의 알곡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을 소유하였던 법화원은 장보고 휘하의 구당신라소의 압아인 장영과 임대사(林大使), 그리고 왕훈 등 3명에 의하여 경영되었다. 상주승 24명, 니 2명, 노파 3명 등 29명이 있었고 5백석 수확의 장전은 아마도 가까운 척산(斥山)의 광대한 전지와 유산포 소촌 등의 땅이 그 일부였을 가능성이 크다. 법화원이 타국에서 이와 같은 넒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사원의 크기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일부 기록만 보아도 법화원에는 법당과 장경각을 비롯하여 승방, 니방, 그리고 수개의 객사, 식당, 창고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당의 크기는 당시 거행된 겨울철 법화경 강의에 모였던 스님과 신도들의 수로 추측이 가능하다.
장보고가 1200백년 전에 세웠다는 적산 법화원 그리고 그 지역이 모두 온통 붉은 돌로 이루어져있어서 적산(赤山)이라고 한다. 그곳의 초가집 민가들도 모두 이 붉은 돌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 산동사람들이 중국에서 돌공사를 잘 하기로 이름이 나있다. 중국 각도시의 공사장에서 주요한 돌공사의 일은 거의 산동사람들이 도맡아 하고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닌듯 했다.
장보고의 마음이 서려 있는 곳, 천 이 백 년을 넘어 이곳에서 나에게 역사적인 의미로 다시 살아난 미래인 장보고가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한 곳 적산법화원! 한․중․일간의 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한 해상 무역왕 장보고의 영정을 보았다. 그는 지금 내게 무엇을 원하는가?
1200년 전에 이 곳에 세웠다는 뜻의 글이 새겨진 기다랗고 커다란 돌 앞에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의 무역과 장보고의 활동, 일본의 승려 옌닌. 신라방 등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었다.
장보고(張保皐)는 무예가 능하고 전쟁에 용감하였기에 그는 당시 산동성 서주 절도사 휘하 주력부대 무령군의 군중 소장(1000명 병사를 지휘하는 장교)으로 있었다고 한다. 그는 흥덕왕 3년에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을 창설하고 대사를 봉해 받음으로써 한·중·일 삼국의 해상무역을 독점하고 한·중·일간의'해상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해상 무역왕으로 불리웠다고. 그는 해상운송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적산에 불교사찰을 지어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읽어 <적산법화원 (赤山法華院)> 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987년 일본학계의 저명한 한 인사가 영성시정부의 협조아래, 200만 인민폐를 투자해 이곳을 중건했고, 중건사업을 거쳐 국제적인 투자와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아직도 장보고가 일본인의 후손이라고까지 한다고 한다.
산동지역 ‘장보고 역사연구회’의 장샤(張峽·중국 향토사학자) 회장은 “장보고는 아버지가 석도(스다오 . shidao)출신이며 신라에 귀화한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고구려사 왜곡도 모자라 장보고까지 ...... 절 한쪽의 ‘장보고 기념관’은 한 중국인 기업가가 34억원의 거금을 쾌척해 건립 중이고, 현재의 절 건물도 스러진 옛터에 1988년 중국측이 재건한 것이라니…지금도 대대적으로 복원작업 및 조성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거대한 장보고상을 산 위에 짓고 장보고 기념관을 짓는 등 이곳 지방정부에서 한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공들이는 모습에 비해 1991년 한 대학 교수의 노력으로 장보고 기념탑이 세워진 게 전부인 우리의 현실과 노력은 너무나 미약하고 비교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은 적산법화원의 북쪽에 있는데 1991년 한국성신여대 교수, 세계한민족연합회(世界韓民族聯合會)회장 최민자(崔珉子)교수가 적산법화원에 왔다가, 한민족의 선각자 장보고대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인데 1994년 7월 24일에 준공되었으며, 탑의 설계가 특이할 뿐 만 아니라 그 의미가 한·중 양국의 친선이 영원함이라고 하여 더욱 깊다고 하겠다. <장보고기념탑(張保皐紀念塔)> 여섯 글자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친필휘호이어서 적산법화원은 역사가 유구할 뿐 만 아니라 한·중 양국 국민의 친선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어있다. 재 중국정부로부터 4A급(AAAA),으로 인정받아 인민폐 2억위엔(한화 2백필십억원정도)의 정부 지원을 받아 거대하게 장보고 기념공원을 가꾸고 있다.
마치 우리의 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아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었다. 이제서야 드라마 제작을 위해 완도에 청해진 세트작업을 하고 그 흔한 동상하나 없고 만화나 게임 마져 이순신이 판을 치고 장보고는 한낮 지방호족 정도로 배워왔으니…많은 이들이 장보고 이름 석자와 청해진, 신라말기 해상무역을 하며 해적을 물리친 장수, 혼란기에 권력다툼으로 희생된 사람 정도의 얄팍한 상식만을 알고 있었음이 송구한 마음으로 해상왕 장보고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적산법화원을 뒤로 하며 아쉽게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 중국의 3대 명산인 태산. –공자의 고향 곡부
산동성의 수도(성도)는 제남이지만 우리가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 태산과 곡부이다. 곡부는 공자의 묘와 사당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특히 유교를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제남에 내리자마자 태산으로 가는 차를 예약한 후에 시내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아시안 컵 축구 경기가 이곳 제남에서 열리고 있는 터라 산동 여러 지역의 한국인들이 한국과의 경기를 응원하러 이곳 제남에 숙박하고 있다.
아침일찍 새벽 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태산은 높이는 1,545m로 이름처럼 거대한 규모에 장엄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은 아니었으나, 곳곳에서 명승고적과 비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골의 생김생김이 아름다워 가히 태산이라 불릴 만한 산이었다. 태산의 경관은 계곡, 폭포 등 우리나라의 산과 비슷하였으나 아름다움과 규모가 금강산이나 설악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중국의 많은 높고 아름다운 산보다 태산이 유명한 것은 태산을 한 번 오르면 10년 젊어진다는 말이 있고 또 많은 황제들(20여 명)이 제를 지내러 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산의 꼭대기에는 진시황이 제사를 지냈다는 조그만 절이 있고 이름처럼 거대한 규모에 장엄한 경관을 자랑하는 산은 아니었으나, 곳곳에서 명승고적과 비문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고, 골골의 생김생김이 아름다워 가히 태산이라 불릴 만한 산이었다.
태산은 옛부터 중국의 5대 명산이 아닌가. 그리고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시조로만 읇조리던 바로 그 태산. 태산은 옛 부터 황제가 봉선이란 의식을 통해 만민 앞에 공식적인 그리고 정통성의 계보를 잇는 통치를 공표하는 예식을 이어왔다. 지금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그 옛날 숱한 백성이 피땀 흘려 이곳까지 황제를 모시고 와서 치뤘을 의식을 떠올리니 백성의 통한과 한(恨)을 어렵잖게 떠올릴 수 있었다.
중국은 대부분 화장을 한다. 그래서 산이 많은 이곳 들판을 아무리 지나가도 무덤이 없다.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는 죽은후에 3무를 남겼다고 하는데 첫째가 무덤을 남기지 않았고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재산을 남기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처럼 산새가 수려하지 않지만 태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계단을 걸어 올라 정상에 오르니 구름아래 비껴 보이는 세상이 모두가 나의 발 아래에 펼쳐져 있고 구름에 끼인 아래의 절경들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모습들은 가히 신선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부리나케 태산을 내려와 다시 차를 돌려 공자의 고향인 곡부로 향하니 이미 오후를 넘긴 시간이지만 운전 기사의 빠른 운전솜씨(?)로 무사히 공자의 족적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항상 이렇게 시간을 촉박하게 다니는냐는 안내자의 힐책이 귓가에 멤돌지만 어찌하겠는가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내의 습성을 우린들 어찌하겠냐고…
7. 청도 노산 – 아름다운 해변
산동성의 최고의 경제도시로 성장한 청도는 중국에서 아름다운 항구로 4위인 경제중심 도시이자 연해개방 도시이며 휴양지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많이 진출한 도시로 5만여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으며, 주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기업으로는 공예품회사, 문방구 관련사업, 전자제품사업, 프라스틱 사업이라고 하는데 한국 간판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이 열릴 때 해상 경기는 청도 바다에서 열릴 예정인데 중국인들도 청도를 가장 살기 좋은 휴양지로 손 꼽는다.
그리고 청도와 북경이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도시인데 각각 5만 명 가량 있는데 이는 중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여 살고 있는 한국인이 30만 명으로 볼 때 거의 3분의 1정도의 인원이다. 북경은 중국의 수도 이므로 중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주재원들이 주로 있고 좋은 학교가 밀집된 곳이어서 유학생이나 비교적 안정적인 봉급생활자인 주재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청도는 중소기업이 많이 진출하고 있고 조선족의 숫자도 동북 삼성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곳이다.
청도는 명승지인 노산에서 나는 샘물로 만들어진 청도맥주가 유명한데, 독일이 점령했을 때 이곳에 독일맥주공장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가 224만이나 되는 큰 도시답게 사람들로 북적대는 5.4광장(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이 일어난)은 비가 오는데도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어서 버스 속에서 안개속에 희미한 잔교를 보고 가노라니 아름다운 해변에서는 비를 맞으면서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해안을 따라 지어진 집들이 아름답고 서양의 도시처럼 아기자기한 도시이다.
청도를 대표하는 명소인 노산(Lao Shan : 라오샨) 은 "태산이 아무리 높다 해도 동해의 노산만 못하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내에서 노산은 명산으로 꼽힌다. 산동 반도의 동서부에 위치해 있고, 청도시 동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으며 황해에 바로 인접해 있다. 옛날에는 도교의 본거지라고 여겨질 만큼 노산의 도교 사원은 매우 유명하다. 노산은 중국 정부에 의해 가장 아름다운 관광지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세 개의 등산로가 있다. 1,113m 높이의 정상 코스를 등반하는 데에는 약간의 체력과 지구력이 요구되지만, 청도의 경관과 정상으로부터 외곽 지역을 둘러싼 곳의 경치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며, 특히 이곳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너머로 일출, 일몰 등의 장관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청도 바닷가의 수려한 경관들 독일풍의 산기슭 별장과 서구 풍의 해변 휴양 별장들은 그 동안 내륙과 동북에 익숙했던 필자에게는 이곳이 중국인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했다.
8. 중국 이야기(45)-중국의 한민족 거주지역 판도가 바뀌고 있다
중국과의 수교 13년째를 맞아 동북지역 특히 연변을 중심으로한 교역과 관광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동북삼성지역인 길림성지역의 장춘시 길림시 교하시 통화시와 흑룡강성지역의 하얼빈시 목단강시 그리고 요녕성의 심양시 대련시지역의 교역과 북경 청도 상해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족의 판도 역시 중국 개혁개방 20년간 기존의 동북지역 농촌 지역에서 벗어나 점차 경제가 발달한 지역인 연해도시로 확산되면서 심양 대련을 중심으로한 동북시역과 북경 천진을 중심으로 한 경진지역 청도 위해 연태를 아우르는 산동지역, 난징 이우 푸동 소주 항주를 포함하는 상해지역 심천 광주의 광동지역등 새로운 5개 지역으로 퍼져 가고 있는데 이는 처음 중국의 경제가 홍콩을 중심으로 남쪽 연안에서부터 동부 연안까지 이어졌다가 다시 내륙과 동북으로 발달하는 경제흐름의 지도를 반대로 닮아 가고 있는 형상이다.
동북삼성을 제외하고 인구 십만 이상의 조선족 도시는 북경과 산동지역이고 5만 이상의 도시는 상해 광동 천진등 3개지역, 1만명이상은 강소성 절강성 해남도등 3개 지역이다. 이 지역의 조선족 인구는 현지 조선족 기업협회와 조선족학교, 정부 해당부문을 통한 자료와 동북 3성 12개 현(시)를 상대로 실질적인 조선족 거주 이주상황을 표본 조사한 자료를 통합 분석한 결과 중국 전국적으로 동북삼성을 제외할 때 무려 60만에 이른다. 그리고 한국을 비록한 외국에 진출한 인구가 20만명으로 추정되고(현재 한국에서는 한국에 거주하는 한족을 포함한 중국인의 숫자를 대략 30만명으로 보고 있슴), 그리고 동북삼성의 도시에 거주하는 40만의 조선족을 합하면 조선족의 도시화율은 총 조선족 200만명중 120만명으로 60%를 넘는다,
그리고 한국인의 중국 진출을 보면 더욱 그 증가는 놀라운데 차이나드림을 안고 연평균 150여만명의 한국인이 중국을 다녀가는데(2003년 156만명) 구체적으로 중국에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구는 북경에 5만 5천명, 천진에 3만 명, 산동지역에 8만 명, 화남지역에 1만 8천명, 동북에 4만 2천명, 상해에 4만 3천명 그리고 기타지역에 2만 5천명으로 총 29만 3천명으로 집계되었다. 또한 한국 기업체 숫자도 산동에 1만 5천여 개 북경과 상해에 각각 8천여 개, 화남지역에 7천 100여 개 동북에 6천여 개 천진에 1천 900여 개, 기타지역에 6천여 개 등 총 5만 2천 여 개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추세로 간다면 2010년에 이르면 재중 한국인의 인구는 100만 명에 이르리라 생각된다.
이는 최근 중국 사회과학원이 발표한 ‘중국 도시경쟁력 보고서’에서 중국 9대 경제 구역중 5위까지의 지역으로 1.홍콩 마카오 심천 광주를 중심으로 한 화남 지역, 2.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장강하류지역, 3. 베이징 천진을 중심으로 한 화북지역, 4. 대련 할빈 장춘 심양 길림을 중심으로 한 동북지역, 5. 청도와 제남을 중심으로 한 황하 중하류 지역으로 이는 한국인과 조선족이 자리잡고 있는 5대 지역과 일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북쪽인 흑룡강 성부터 남단의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중국 연해를 따라 에스(S)을자 형태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인 한국인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그리고 북한과 재일 동포,와 재미동포등 재외의 한민족은 지난 1200여 년전의 장보고의 해상 루트를 따라 발전하고 있슴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