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佛性)과 영혼
‘불성(佛性)’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속성’ ‘자질’ ‘바탕’ 등을 뜻한다. 또한 여래(부처님, 깨달은 분)가 될 수 있는 씨앗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에서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불성사상’ 혹은 ‘여래장사상’이라고 하는데, 다만 전제 조건은 공부(수행)를 했을 때만 그 가능성(씨앗)이 발아할 수 있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발아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만의 특성이다.
불성사상이 처음 등장하는 경전은 〈대승열반경〉이다. 〈열반경〉에서는 처음으로 “불신(佛身)은 입멸하지 않고 법신은 영원하다(佛身不滅=法身常住)”는 학설과 함께 “일체중생은 다 불성을 갖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선언했다. 중생도 수행을 하면 깨달을 수 있고,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 것은 불교사상사의 일대 전기(轉機)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성의 정의에 대하여 대승열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1)공(空)의 이치가 불성이다. (空佛性說). 즉 일체개공의 이치를 깨닫는 것
( 열반경〉 대정장, 12권, p.523b).
(2)연기(緣起)의 이치가 불성이다(緣起佛性說). 즉 연기의 이치를 깨닫는 것(p.524a).
(3)중도의 이치가 불성이다(中道佛性說). 즉 중도의 이치를 깨닫는 것(p.523b).
이상은 최초로 불성에 대하여 언급한 〈열반경〉의 정의이므로 그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선에서는 앞의 세 가지 외에 불성이란 ‘본래청정심(本來淸淨心)’ 즉 ‘본래 청정한 마음이 불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에서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또는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다(心外無佛).’ 등은 모두 ‘본래 청정한 마음(本來淸淨心)’이 곧 불성임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본래 깨끗한 마음이란 번뇌에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상당수의 불교인들이 불성에 대한 〈열반경〉의 정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혼과 불성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영혼을 곧 불성으로 보고 있는데, 심지어는 무아, 무집착, 공, 중도, 확철대오, 살불살조 등을 외치고 있는 선승 중에도 그와 같이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런 오류는 불성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각성(覺性)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추상적으로 “내 안에 있는 불성을 찾아라.” “무엇이 보고 듣고 아는지 그놈을 찾아라.” 또는 “불성은 모양도 색깔도 없고,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 않는다.” 등의 표현이 영혼과 혼동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불성을 우리의 육체 속에 어떤 하나의 무형의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는 것도 옳지 않다.
만일 영혼과 불성을 동일시하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결론적으로 영혼의 존재, 영혼의 세계를 깨닫자는 것이 된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영혼의 세계는 어떤 것인지, 그런 것을 깨닫자는 것밖에 안 된다. 영혼의 존재여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은 영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설사 영혼이 있다고 해도 깨달을 수 있는 자질이나 속성을 뜻하는 불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만일 영혼을 불성과 동일시한다면 부처님을 비롯하여 달마, 혜능, 마조, 임제, 원효 등 역사상 위대한 고승들은 모두 다 영혼의 세계를 깨달은 것에 불과하게 된다.
사실 영혼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무속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부처님 말씀이나 경전을 읽을 필요도, 화두를 들고 참선할 필요도 없이 무당을 찾아가 영혼의 세계에 대하여 묻는 것이 깨달음의 첩경이 될 것이다. 불성과 영혼을 동일시하는 것은 불교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ggbn@gg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