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로마서 6:15~23
제목: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신앙입니다.
롬6: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기독교의 일원이 되는 것에는 익숙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믿음을 갖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와 연합을 했는데 자신이 왜 죄를 짓는가? 의아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인이 죄를 짓고 여러 가지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를 믿으면 모두가 중생했지만 남아 있는 죄성(罪性)이 있음을 알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인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갑자기 안중근•윤봉길 의사나 유관순 열사 같은 애국자•순국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은연 중 일상생활에서 한국을 침략하고 우리 조상들을 죽인 일본말을 쓰고(예: 사시미) 일본 노래(J-pop)를 듣거나 일본 자동차를 타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효화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국인답지는 못하다는 비판 정도는 받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한 성도는 성령의 중생케 하심으로 죄의 지배(통치권)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의 몸과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모두 자유로워진 것은 아닙니다(현실).
●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유효한 부르심(effectual calling)으로 불러내셔서 실제로 구원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성도의 현실적 상태가 완전해지고 하나님의 은혜 공급의 필요성이 중단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유효한 부르심은 성도의 견인으로 연결됩니다. 신자가 이미 완전해졌다고 섣부른 착각을 하면 구원파 식의 잘못된 종교가 됩니다. 참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성도로서 견인을 합니다(Perseverance of the Saints). 견인은 한문으로 牽引(차량을 견인)이 아니고 堅忍(견고히 믿으며 인내함)입니다. 성도“를” 견인(牽引)해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견인(堅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효과적으로 부르신 성도는 그리스도와의 교제 안으로 들어가 성화합니다.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이 되는데요.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교제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고전1:1.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성도는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고 성령에 의해 중생한 자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은혜를 계속 공급받음으로써 성도의 견인을 합니다. 점진적 성화는 성도의 견인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됩니다.
● 성령께서 유효한 역사로 중생하게 하신 목적은 죄로부터의 해방되어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롬6: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20.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
위 말씀에서 구원의 서정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파와 고전적 세대주의는 과거 시제의 구원 확신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칭의의 결과인) 성화가 현재형으로 계속 되어야 함을 모릅니다. 17~18절만 읽고 성급히 오판하면 안 됩니다. 19절은 육신이 연약하므로 지금(now) “거룩함에 이르라”고 현재 시제의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so “now” offer them in slavery to righteousness leading to holiness). 22절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마지막은 영생이라고 말씀합니다(the benefit you reap leads to holiness, and the result is eternal life). 따라서 중생한 자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롬6:1). 중생•칭의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대속(代贖)으로 인해 죄의 종이 된 신분에서 해방되었지만, 그가 처한 현실은 죄성에 여전히 노출되어 있어 죄를 짓고 회개하고 합니다. 점진적인 성화는 가능하지만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서 가능합니다(롬8:30). 그러나 중생한 자는 분명히 성화의 길을 걸으며 죄와 투쟁을 하기 때문에 죄를 고의적으로•습관적으로 짓지는 못합니다. 완전 성화가 불가능한 것을 핑계로 삼아서 아예 성화 그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점진적 성화를 계속합니다.
요일3:7.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
중생한 성도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을 압니다. 바로 빨리 알지는 못해도 실패를 반복하며 성화의 과정 속에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인도하심은 성령의 유효한 역사와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롬8: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 위에 내용들을 요약합니다. 자녀가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 있습니다. 날마다 죄와 싸우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지만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아직도 육신에 남아 있는 죄성과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래도 회개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이 땅에서 죄에 대해 계속 싸우게 됩니다(고전15:31~34). 이렇게 죄와 투쟁하고 의를 향해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육신의 연약함을 더욱 뼈저리게 절감하게 됩니다.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자기 부인)고 말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성숙한 의미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눅9:23)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를 의지하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자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이 강조하는 진리입니다.
첫댓글 이미와 아직의 표현이 생각나고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종교개혁 격언이 생각나는 좋은 묵상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케이 하실만큼 잘 파악하신 갓 같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5대 요목으로 보면 성도의 견인입니다.
@장코뱅 잘 알겠습니다.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몇 번을 읽었습니다.
공감과 격려에 감사합니다. 기쁜 주일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Daum 국어사전
견인1 [牽引]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당김 (x) / 견인2 [堅忍] 굳게 참고 견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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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성도의 견인은 견인2 [堅忍] 입니다.
이 한자를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더라고요. 견인차의 견인이 아니고 굳게 침고 견디는 것인데요.
성경을 보든 신앙서적을 보든 국어사전을 보는 게 편합니다.
@천이다 공감합니다. 사전으로 국어 이해가 먼저 확실히 돼야 하겠더라고요.
<칼빈주석: 공관복음>이 말하는 "자기 부정"
1.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떤 주요한 점들에서 그를 닮기를 그가 원하시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주시려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관련한 규범을 짤막하게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두 부분,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아주 광범위한 것으로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생각이나 궁리들(proprium ingenium)을 버리고, 모든 육정(肉情, carnis affectus)과 결별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통치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얼마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는 베드로의 권면처럼 먼저 바로 그렇게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우리의 모든 육정
묵상자님의 이전 글을 보면 자기 부인이 죄 죽이기와 연결된다고 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천이다 아래 글이지요.
https://cafe.daum.net/1107/YY6J/10
@장코뱅 잘 읽고 왔습니다.
2.다음으로는 우리의 모든 육정(肉情)들을 다스리고 굴복시켜야 한다.
<칼빈주석: 공관복음>, p.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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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코뱅의 소박한 사견
위에서 칼빈이 주석한 내용은 상당히 어렵다고 느끼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내용 중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면서 통치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에 주안점을 두시면 되겠습니다.
결론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위격은 성령이시므로, 더 쉽게 설명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가 되자! 는 것입니다.
묵상자님의 사견에 공감합니다. 저도 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칼빈의 주석 내용을 현실에 맞게 설명해 주셔서 이해가 더 됩니다. 칼빈 등 믿음의 선진들은 현대인과 다른 치열한 믿음 생활을 하신 것 같습니다. 존경합니다.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자기 부정
1.칼빈은 자기부정(self-denial)을 말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기를 부인하여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남의 소유권과 지배권을 명확히 하여야 한다. 신자는 그 안에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셔서 지배하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주인행세를 하지 않고 새 주인인 그리스도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3.7.1.)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인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을 말한다. 자기 부인은 이웃에 대한 신자의 태도를 바르게 해주며 겸손함으로 인간의 이기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사랑으로 섬기게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3.7.4-10.) 자기부인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자의 내면적 복종에 초점을 둔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신자의 외면적 삶이 그리스도를 닮은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인간의 감정을 배제한 스토아학파의 숙명론과는 확실하게 다른 것이다. 그와 반대로
시간과 능력이 되명 기독교강요도 찾아서 읽어 볼게요.
불교의 수행법을 가지고와서 무아(無我)나 무념무상을 기독교의 '자기부정'인냥 착각하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기도하며 자기를 비워낸다는데 ...칼빈의 이 글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근래에 스토아의 아파테이아(무정념)를 기독교의 것을 착각하는 사람도 안타깝구요..
2.그와 반대로 신자에게 고난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에 거하게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3.8.2-11.)
https://cafe.daum.net/1107/YY6J/10
고난 가운데에서도 즐거움에 거하는 믿음, 그런 순전하고 큰 믿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묵상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단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의 성숙한 의미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일'이라는 문장이 특히 마음에 와 닿습니다. 죄로부터 속함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일 뿐으로 우리 몸을 의의 종으로 드려서 거룩한 열매를 맺어서 영생에 이르는 성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말씀해주셨네요. 우리가 이렇게 성령께 순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육체의 정욕, 본성, 죄성이 우리를 사로 잡아가려고 하는 것을 절감하고 탄식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성령님께 맡기고 도우심을 갈구하게 된다는 것이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풍성한 댓글로 공감을 해주셔서 감사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