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 가문은 시리아의 정세를 적극 활용하여 협정을 맺음으로써 명맥을 이어나갔다. 유다가 전사한 후에 그의 형제들이 뒤를 이어 나갔다. 유다의 막내 동생 요나단은 공석으로 남아 있는 대제사장직을 겸직하였으므로 경건한 유대인들의 비판에 직면하였다. 요나단이 살해된 후에 시몬이 자리를 물려받아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를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하스몬 왕조를 세웠다(기원전 140년). 에드워드 로제 지음, 박창건 옮김의 『신약성서배경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를 타자 쳐서 올린다.
그렇지만 시리아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의 성을 점유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작은 전투를 한 후 유다는 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결국 시리아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파르테르인과의 전쟁 중에 사망한 안티오쿠스 왕을 대신하여 사령관 리시아스가 아직 미성년자인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그리고 나라의 섭정으로서 시리아를 다스렸다. 그는 무장이 잘된 군대를 보내서 유대인들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봉쇄하였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서 유다와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에서 일어난 왕위 쟁탈전의 도움을 받았다. 한 다른 사령관이 리시아스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리시아스는 본격적으로 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협정을 맺었다. 즉 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종교를 아무런 간섭 없이 신봉하도록 허용했고 유대인들은 시리아의 최고 지배권을 승인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협정은 계속되었다. 왕위 쟁탈을 위해 시리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분규 동안 어떠한 시리아 군주도 이 협정을 문제 삼지 않았다.
막카베어 독립 전쟁의 이러한 성과에 많은 유대인들은 만족했다. 특히 얼마 후에 공석이던 대제사장의 직위도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대제사장의 직위를 근본적으로 오용했던 메네라우스는 막카베어 개혁으로 제거되었다. 기원전 162년에 권력을 장악한 시리아 왕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예루살렘의 헬라주의화 된 사람들이 청원하여 그들이 유다의 억압을 받고 있다고 호소하였다. 왕은 이들의 청원을 들어 알키무스라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사람은 헬라주의화의 옹호자이기는 하였으나 아론 지파 출신이었다. 이제는 의식(儀式)이 다시 율법의 규정에 상응하게 거행될 수 있었으며 신실한 유대인들로서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의 폭력 정치에 항거하였던 경건한 사람들(히브리어: 하시딤)은 그들의 봉기의 목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시리아에 의하여 임명된 대제사장을 합법적인 직무의 소유자로 인정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다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를 불신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올바른 예배를 다시 회복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를 넘어서 정치적인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 정치적인 독립을 통해서만 시리아적-헬라주의적 영향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유다는 대제사장 알키무스에 항거하였으며 알키무스는 시리아에 도움을 청했다.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 중에 유다가 기원전 160년에 죽었다. 체포된 그의 추종자들은 시리아인들로부터 참혹한 박해를 받았다. 전사들은 광야로 후퇴했고 유다 대신에 그의 동생 요나단(Jonathan)이 지도자가 되었다. 비록 그의 병력은 적고 상황은 극도로 어려웠지만 시리아에서 계속되는 왕위 쟁탈전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서로 싸우는 당파에 때로는 이쪽에 때로는 다른 쪽에 가담하면서 스스로를 지켜 갈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당파로부터 특정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을 확대하여 갈 수 있었다. 즉 그 주민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고수하던 사마리아 남부가 그의 통치권 아래 들어왔다. 기원전 160년 말 알키무스가 죽은 이후 대제사장의 직위는 공석이었다. 그 후 요나단은 이 공석이 된 직위를 그가 넘겨받도록 시리아의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기원전 153년). 시골 제사장 혈통의 출신이기는 하지만 사독의 혈통 출신은 아니며, 전쟁 중에 더럽혀진 사람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되었다. 한때 막카베어 봉기에 가담한 적이 있었던 경건한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깊이 충격을 받았다.
기원전 143년에 시리아인들의 음모로 요나단이 살해되자 둘째인 시몬(Simon)이 전투의 지휘권을 이어 받았다. 요나단이 힘써 얻었던 같은 지위를 그도 역시 갖게 되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사령관과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이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그의 통치 영역을 확대할 수 있었고 시몬은 이제 예루살렘 성의 시리아 수비대와 싸워 승리하여 그들을 끝내 몰아냈다. 이제 예루살렘은 이방 지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시몬은 밖으로도 독립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시리아인들의 과세를 유대인의 권한에 귀속시켰으며(기원전 142년) 처음으로 자신의 화폐를 주조하게 되었다. 대제사장과 유대인의 사령관, 그리고 유대인들의 영도자의 직위가 기원전 140년에 국민들에 의하여 그에게 세습되도록 주어졌고, 그럼으로써 하스모네어 왕조가 세워졌다. 그리고 이것은 로마로부터도 승인되었다. 유대 국가는 계속하여 독립을 갖게 되었고 시몬의 통치하에 다시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시몬의 통치를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마음 깊이 찬양하였다. “백성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 땅은 많은 곡식을 내었으며 들의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다. 노인들은 거리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태평성대를 구가하였고 젊은이들은 장식된 군복을 입었다. 시몬은 여러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방위를 튼튼히 함으로써 그의 명성이 멀리까지 들리게 되었다. 그는 이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고 이스라엘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으며 그들의 마음을 괴롭힐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원수들이 그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면목을 잃게 되었다. 시몬은 백성들 가운데 모든 가련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그는 율법을 매우 열렬하게 엄수하였으며 율법을 저버린 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을 없애 버렸다. 성소를 아름답게 꾸미고 성소의 기물들을 보강하여 갖추었다”(막카베어 Ⅰ서 14:8-15).
시몬의 시대는 막카베어 Ⅰ서의 이러한 말에서 열광적으로 찬양되었고 평화로운 상황은 예언자들의 약속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히 앉아 쉬리라(미 4:4). 시몬의 현명한 통치, 율법과 성전을 위한 그의 열심과 배려는 종말적 기다림 속에서 메시아에게 돌렸던 특징으로써 기술되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결코 모든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납득될 수 있도록 보인 것은 아니었다. 많은 제사장들과 경건한 사람들은 대제사장 혈통 출신도 아니고 다윗 혈통의 출신도 아니면서 대제사장의 직위를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자의 직위와 결합시켜 버린 하스모네어의 지배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난으로 대립하였다. 이미 요나단 시대에 이러한 경건한 사람들과 대제사장 및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율법에 엄격한 유대인 그룹이 율법에 대하여 온전한 복종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사해 바닷가 광야로 물러갔다(참조, 83–84면). 그들은 막카베어 Ⅰ서가 시몬의 통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찬양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기원전 134년 시몬이 그의 사위 톨레메우스에 의하여 꾸며진 살해 음모에 의하여 희생되자 그의 지배는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러나 살해범은 시몬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권은 시몬의 생전에 국민에 의하여 결의된 대로 그의 아들 요하네스 히르칸(Johannes Hyrkan)에게 돌아갔다.
첫댓글 좋은 내용을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번 글에 이어 이번 글도 시간을 내어 잘 읽어 보겠습니다.
정치권력과 대제사장을 겸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므로 경건한 비판을 받았군요. 훌륭한 임금 다윗도 하나님의 후원과 백성의 지지를 받았디만 제사장 직은 넘보지 않았습니다. 좋은 포스팅입니다.
네, 쉽지는 않지만 유익한 포스팅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번역자가 공동번역에 나오는 정도의 인명이라도 썼으면 좋았겠습니다.
메네라우스 --> 메넬라오스
공동번역의 외경을 보면 나옵니다.
비록 외경이지만 외경과 대조해서 볼 필요도 조금은 있겠습니다. 역사 내용에 한전해서는요.
@노베 네, 그렇습니다. 공감해요.
메넬라오스의 사람 됨됨이가 나오는 구절:
"마카베오하 4:45 메넬라오스는 자기가 불리한 입장에 있음을 깨닫고 도리메네스의 아들 프톨레매오에게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왕을 설득시켜 달라고 부탁하였다."
돈을 내고 대제사장이 되는 악행:
"마카베오하 4:27 대사제직에 오른 메넬라오스는 왕에게 약속한 돈을 바치지 않았다."
경건하지 않은 엉터리 제사장의 비참한 최후:
"마카베오하 13:7 율법을 어긴 자는 이렇게 죽었는데 메넬라오스 또한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성직 매매를 하고 왕권에 종속된 제사장 직은 매우 타락한 모습입니다ㅠㅠ
@노베 공감합니다.
///데메트리우스///는 마카베오1서에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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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 1서
마카베오 1서에는 유대 시대의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BC 175~164/163 재위)와의 관계에서부터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시몬 마카베오의 죽음(BC 135/134)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군사적·외교적 사건들의 역사가 기술되어 있다.
마타시아스가 비(非)유대교 종교의식을 거부한 일, 시리아의 패권에 저항한 유대인의 잇따른 반란,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2세///가 유대의 독립을 인정하게 만든 정치적 책동, 시몬이 유대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자 세속 통치자로 선출된 사건들이 서술되어 있다. 마카베오 1서는 유대 내란에 대한 당대의 유일한 자료이며, 안티오코스 4세 통치 이후의 유대-시리아 관계에 대한 유일한 자료로 남아 있다. 공식 문서자료, 구전 전승, 목격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해 편찬한 이 책의 역사적인 정확성은 역사 기술(記述)에서 상투적인 그리스어식 과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나중에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가 이 책을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한 사실로 보아 충분히 증명이 된다.
마카베오 1서의 저자는 하스몬 왕가의 궁정 역사가로 추측되며, 씌어진 시기는 시몬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이었던 때(BC 135/134~104)였을 것이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0954b
@장코뱅 보조자료를 올려주셔서 도움이 많이 됩니다. 공부가 더 많이 되고 좋네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외경은 정경이 아니지만 이스라엘과 정복 국가와의 관계 등 역사 공부를 위해서 조금 참조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포스팅 본문과 댓글에서 큰 유익을 얻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그래요.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