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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중앙군 7천명이 본진으로 중군.
고니시군대는 사기를 잃은 것으로 위장하여 깃발을 내리고 천천히 전진.
고니시 루이스의 유격부대가 충주성으로 기동하여 점령한다.
병력은 3,700명.
좌군 5천명을 이끄는 종의지(쇼 요시토시)가 달천강을 따라 북상하여 조선군 서쪽을 공략한다.
우군 3천명을 이끄는 마쓰라 시게노부가 단월역 동쪽으로 나와 매복하고 조선군 동쪽을 공략한다.
배후 공격부대로 확인되지 않은 왜군 부대가 조선군의 배후를 공략하여 무너진다(난중잡록 기록)
동쪽 남한강을 따라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전장을 관람하며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행운아라고 부러워한다.
이때 조선군은 8천 기마병력으로 고니시의 중앙군 7천명만을 상대하려 하다가 왜군에 대패한다.
전략, 전술도 모르는 형편없고 어리석은 전쟁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왜군은 조선 화포, 총통 등 조선 궁수들에 의해 약500여명이 전사하였을 것이라고 판단되고 있다.
주기학파[근대 이성철학파/근대식 개혁학파]의 교육을 받은 무관들을 보유하고 있는 지, 없는 지에 따라
1583년 니탕개의 난, 1585년 니탕개의 잔당 침공전과 1586년 잔당 소탕작전 토벌전을 비교하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583년 1만5천의 니탕개의 난 때 신립 휘하에서 중군장, 소군장으로 참전하였던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 정담, 황박, 이복남, 황진, 김경로, 선거이, 송상현, 이순신..등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1591년 2월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지방인 호남과 호남 동부지방 출신은 김해지방으로까지 직급 강등당하였다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맹활약을 펼친다.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은 1천기의 기병을 이끌고 이치에서 여산방향으로 나아가는
왜군 척후 선봉연대를 여산벌판에서 기마전술로 물리쳐 조선 관군 최초로
기마전법으로 승리하는 장수였다.
조선 정부군 최초의 승리전투는 최원의 기병대 승전으로 시작되었다.
이치전투에서 고경명의 6천 호남 의병군은 조헌, 영규부대의 죽음을 간과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조헌, 영규부대를 구하려고 6천 의병을 왜군 측면으로 투입하였다가
대패하게 되는데, 이때 8백여명이 살아돌아와 최경회 휘하로 들어간다.
근처에 호남 예비병력이 있어서 더 많은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소조총(천)융경/小早川隆景]가 이끄는 왜군 제6군 1만5천여명도 심각한 타격을 받고
무주, 진안, 장수, 상주, 거창으로 퇴각하기에 이르른다.
황진과 최경회는 웅치로 진격했던 왜군 제6군 휘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복도정측] 군대가
사령관 소조총융경군과 합류하지 못하도록 진안산성 [우화산]을 탈환하고
안성 [당시에는 무장군 안성면]으로 들어가 이치에서 무주로 퇴각하여 합류하려는 것을
차단시켜 버린다.
이치를 그당시에는 완주군 운주면 주변에 배밭이 많아 배티재, 배치재, 버티고개라고 불렀는데,
여기에서 "아닌 밤중에 버티고개 가서 앉을 놈"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오게 되었다.
왜군이 배꽃이 피어있는 배밭에 숨어 전주성을 노리자 생겨난 말이었다.
이말이 훗날 도둑을 빗대어 쓰여지게 된다.
또 "죽방을 날릴 놈들" "화살을 죽통째 날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이라는 말이
회자되게 되었다.
이때부터 웅치, 슬치,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황진, 이복남, 최경회, 최원(전임 전라 병마절도사/2천) 등이 경북 영덕, 영해, 울산, 함안, 진주까지
추격하여 왜군을 대파시켰다.
최원은 경질되었다가 영덕, 영해에서 최경회와함께 왜군을 섬멸하고 포로 200여명을 잡아 개선한다.
화약이 떨어진 왜군은 호남 관의병들의 궁수들에 의해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최경회가 진안 죽도 성주봉의 성주성, 죽산성 전투에서 황진, 최원이 탈환하는 사이에
동향면 성산리 성산에서 왜군의 퇴로를 막고 있다가 후쿠시마를 활로 쏘아죽이고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한쌍의 언월도 중 그반쪽을 획득한다.
왜군 잔당들은 진안군 동향면 성산리 성산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살아남은 잔당들은 거창 지레 사랑암으로 달아났다.
[왜군 제6군 후쿠시마 군대는 무주 무풍으로 나가는 퇴로가 막혀 1593년 3월까지 진안군 상전면,
동향면 죽도 죽산성과 성주봉 성주성에서 갇혀 있어, 이치에서 퇴각하는 왜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음]
무주, 진안, 장수에서는 적들과 뒤섞여서 치열한 난타전을 벌였기 때문에
왜군들이 너무 설쳐댄다고 해서 설천이라는 지명이 붙었으며,
무주 무풍대첩을 치루고 나서는 이곳을 무풍지대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래서 질서가 무질서한 곳을 무풍지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적들이 아주 많은 곳을 "무진장 많다" 라는 말이 붙었는데,
현재 이말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여있을 때 "무진장 많다" 라는 말로 유행하게 되었다.
화가 많이났을 때 "화살을 죽통채 날려죽여도 시원치않을 놈들" 이라는
유행어가 나온 이유였다.
전라도로 진입하려던 왜군은 격멸되어 왜군이 진입하지 못하였다.
유일하게 호남 관의병들만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다.
진주성 제1차 전투(1592.10.4~10)에서 임시 목사 진주 판관 (종5품) 김시민의 진주성이 함락되기 전
황진, 최경회, 이복남이 이끄는 관의병이 남원성에서 지원온 임계영, 민여운(태인)부대와 합류하여
사수부대를 이끌고 진주성 살수천으로 들어간다.
살천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한 2천의 관의병 부대는 왜군 후방을 들이쳐 진주성을 구원한다.
왜군은 대군이 들이치는 줄 알고 퇴각해버린다.
이 공로로 황진은 충청도 병마절도사, 최경회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경상도 병마절도사,
이복남은 남원부사에 올랐다가 후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된다.
김시민은 진주성 전투 종료 하루 전에 총에 맞고 전투가 끝난 후 9일후 1592년 10월 18일날 순국한다.
이복남은 정유재란 때까지 살아남아 남원성에서 전라 병마절도사 지위로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과 왜군을 상대하다가
불더미에서 산화하고 양호(양원)는 50~100여명을 이끌고 도망친다.
훗날 후금과의 전투에서 명나라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사한다.
왜란 때 조명연합군 사령관 유정도 후금과의 전투 때 양호에게 밀려나
동로군 사령관을 맡으면서 조선 남로군 김응하 [동로군의 지휘를 받음]등과 함께 전사한다.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명으로 부원수 김경서등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고 돌아와
친명파로부터 시달려 유배지에서 평생을 살게 된다.
양호는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이 울산전투에서 패전하였음에도
승전했다고 허위 보고하여 승전장으로 훗날 후금과의 전쟁 때
명나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유정 ㅠㅠ)
현재도 국궁 활은 호남에서 가장 많이 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휩쓸고 지나갔던 대구 팔공산으로 왜군이 재침할 이유가 없었다.
정유재란 때 강화 실패후, 왜군이 호남을 도모하기 위하여 총력을 다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대구 팔공산으로 군영을 옮긴 도원수 권율은 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 옮긴 것이다.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 전투를 회피하기 위하여 옮긴 것이다.
웅치전투의 제2방어선 주장 이복남 전라 병마절도사가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과 남원성에서 전투를 치룬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제2차 전투 때 왜군 10만이 공격할 때도 지원군을 이끌고 남원성으로 가다가
도중에 쉽게 패하여 나오지도 않았다.
남원의 변사정은 도망간 도원수 권율과 영남 의병장들을
모두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해줄 것을 요구하며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진주 제2차 전투는 남원성에서 호남 관의병들이 병력을 이동시켜 2만7천명이 들어가
임진왜란 전쟁 중 왜군 10만명을 상대한 가장 큰 전투이다.
김성일 경상우도 초유사가 남원성의 호남병력을 진주성으로 이동시켜 방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호남을 두번 죽이는 짓을 하였다. 초유사는 종3품까지 임시로 임명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논개가 이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의 부장 로쿠스케(기다 마고베이)를 끌어앉고
촉석루에서 뛰어내린다.
이때 김천일 창의사(진주성 우도절제사), 황진 충청도 병마절도사 (유격대장 도순성장)
최경회 경상도 병마절도사 (진주성 좌도절제사), 장윤 순천/승주부사(순성장/진주성 임시목사)
고종후 복수대장(고경명 아들), 고득뢰(남원) 방답첨절제사 [해남], 임희진[해남 의병장]등이
전쟁을 주도하였고, 김성일은 삼장사시를 남기고 2차전투가 벌어지기 두달 전에 병사하고 만다.
진주 목사 서예원은 파면되고 도주하려다, 김해부사 이종인에게 억류당하였다가
풍신수길에게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서 건져 올려 목을 친후 일본으로 보내진다.
진안 웅치전투는 김제 군수 정담(제3차 방어선 주장), 이복남(제2차 방어선 주장/나주 판관),
김제, 전주 의병장 황박(제1차 방어선 주장)이 치룬 전투이다.
권율이 전라도 절제사로 참여했다면 이치전투, 이치 고개 전투 중 한곳을 맡아 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치 제1차전투의 사령관은 5만 의병을 거느린 고경명 담양부사겸 창의사였다.
[창의사(의병 총사령관)가 비변사에서 공식 인정하는 종2품 도병마절도사급임.
선조실록에 비변사에서 창의사 직급을 종2품으로 예우해야한다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리는 기록이 존재함.
김천일이 학식이 우수한 학행으로 종6품 주부직 천거로 진출하여 정3품이 진출 한계였기 때문에
창의사 자격으로 1품계 올려주기 위한 것임]
도절제사는 전주 부윤 휘하의 종5품 도사병력(대대급), 절제사, 첨절제사 병력을 임시로 지휘하는 직책이다.
정3품 부윤(전주시장/가선대부직을 받아 종2품예우를 받지만 관찰사보다는 한단계 아랫계급),
도사(지방에 속해 있는 지역군), 정3품 절제사(지역 방위군),
종3품 첨절제사 [전략적 요충지 해안에 성을 쌓고 수성하는 해안 방위군] 등의 병력을
비변사에서 임시 권한을 가지고 특파되거나 현지 관료를 임시로 임명하여 한시적으로 작동되는 직책이었다.
정3품 절제사병력은 성안에서 그지역 지리에 익숙한 지역민으로 전주성을 수성하는 병력이다.
슬치전투는 호남의병 부창의사 양대박, 의병장 지장군이
임실 관촌면의 가야시대 성미산성 (백제시대 각산산성)과 성수 월평산성에 군량미를 쌓아놓고
슬치전투, 신평전투, 신덕전투를 치뤄 몰아내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할 때 이곳으로 남하하였다. (이순신 백의종군로 확보)
완주 운주, 충남 금산 이치전투(1895년까지 전북 용담군 행정구역/대둔산에서 동학 농민혁명군이
1895년까지 최후 항전한 곳이기 때문에 1895년 고종때 충남으로 행정구역을 편제시켜 버림/
일본군이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후 측량하여 충남 금산군으로 제시하자, 고종이 그대로 승인함)는
고경명 호남 의병사령관 창의사가 주력으로 싸운 전투이다.
전라 충청 순안어사, 전라 관찰사, 전라 순찰사 이광은 전주성에서 승부수를 띄우려 하였는데,
조헌, 영규가 무단 출정하는 바람에 고경명이 뒤따라가 말리다가 전투가 벌어진다.
지휘권도 없는 광주 목사 권율(정3품/무관이 임명되면 종3품/광주 목사만 종2품)이
주도했다는 말은 역사 왜곡이다.
권율을 거론할 때는 6천 대병을 거느린 고경명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고
전주성에 집결해 있던 5만 의병 사령관이었던 고경명 창의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치전투는 고경명이 사령관이었다.
이미 전라, 충청 순안어사, 전라 도순찰사, 전라 관찰사이자 관군 총사령관이었던 이광에 의해
고경명 담양부사겸 창의사가 이치전투 사령관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최고 지휘권자는 전라 충청순안어사겸 전라 순찰사겸, 전라 관찰사 이광에게 있었지만,
이광은 관군만 통제할 지휘권이 있었고, 실제 전주성의 5만명의 의병은
고경명 창의사의 지휘 관할에 있었다. 창의사라는 직책이 순찰사 (종2품/ 도순찰사는 정2품),
도원수급(북방에는 정2품~남방에는 종2품에 자헌대부 (정2품 예우)를 받으면 임명됨)에
해당하는 종2품품계다.
[관직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료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만든 직제가 대부직(1품계)제임].
이치 제1차전투는 고경명이 사령관으로서 의병을 이끌고 싸운 전투이다.
1592년 6월 5일 용인전투를 벌이기 전에 전주성에서 이광, 곽영, 유팽로, 양대박, 전주 부윤 남언경,
권율, 고경명, 김천일 등 고위직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로 고경명이 의병 사령관으로 결정된다.
이치, 웅치, 슬치전투가 벌어지기 전 전주성 외곽에서 이광의 본군은 진을 치고 왜군에게 돌파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유팽로가 임진왜란 발발초기 1592년 4월 곡성 옥과면에서 담양으로가서 최초로 임란창의군을 결성함.
임란 창의군은 전주성 5만 남원성 5만으로 총10만에 이름.
임란 창의군이 최초 의병임].
이 당시에는 자기 지역대표가 아니면 지휘할 권한이 없었고 실제로 의병들은 따르지도 않았다.
실례로 충청 순찰사 신경행도 고경명 휘하에 빌붙어서 따라 다니다가 고경명이 죽자,
다시 익호장군 김덕령밑에 빌붙어서 따라 다니다가,
실권이 없자 후일 김덕령(성리학자)을 모함하여 한현, 이몽학의 반란수괴 총사로 김덕령을 엮어
죽게 만든 자가 부여 (홍산)출신의 신경행이었다.
이치 전투이후, 전라 충청순안어사 [공무원 행정, 민간인력 동원 권한],
전라 도순찰사 [군수물자, 군사인력 징발권한],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가지고 있는 권한 중에서
권율은 전라 관찰사가 되어 1593년 강화도에서 호남 관군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이광에서 권율로 교체한 이유는 조헌, 영규가 청주성에서 전주성으로 들어오자
의병수가 많음에 사기 충천하여 의병 800여 명을 이끌고 금산이치로 무단 출정을 해버린다.
전라 충청순안어사 이광, 의병사령관 고경명, 광주목사 권율은 전주성에서 승부수를 띄우려고 하였고,
조헌, 영규가 무단 출정하는 바람에 뒤따라가 만류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이치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여 모두 죽을 처지가 되자,
어쩔 수 없이 고경명이 6천의병을 측면 투입하였다가 대패하였다.
왜군도 타격이 커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소조총융경]가 이끄는 왜군 제6군 1만5천여명이
무주, 상주, 거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고경명이 전사해버리자 그책임을 물었고 용인전투 패전책임이 더해져 이광을 1년후
권율로 교체하여 전라 관찰사로 오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관군을 승전장으로 하면 이광이 승전장이고,
의병을 승전장으로 하면 고경명이 승전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동원 예비군을 지휘하는 전라도 절제사 지위로 이치전투의 전체 승전장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정담, 황진 등은 이광의 휘하 부대였다.
[1592년 6월5일 용인전투는 동인정권 시기였기 때문에 수지면 광교산 전투에서 패하자,
전략적으로 후퇴하여 전주성,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퇴각하는 전투임.
전라도가 점령되는 것을 막기 위해 퇴각하고는 패전했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림
그리고 이광, 곽영의 용인전투,
수원 행고산성 전투(전라병마절도사 최원, 담양부사겸 창의사 김천일의 1천 특별사수부대,
광주목사 권율)에서 승리한 왜군은 호남 관의병군의 배후공략을 차단하기 위해
7월 7일 호남을 도모하다가 이치 1차전투에서만 승리하고
이치 2차전투, 웅치, 슬치, 금산, 상주, 무진장 전투에서 패하면서 호남 도모에 실패하는 것임].
1593년 전라 관찰사로 오른 권율은 강화도에 주둔 중인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의 1만병력을 나눠받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전주성에서 6천병력을 이끌고 수원으로 올라간 선거이가 한양 탈환작전을 벌이기 위해
시흥으로 옮겨 전진배치하고 있다가, 우희다수가(우키다 히데이에),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군 3만은
조선군이 명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행주로 집결하는 조선군을 먼저 치기 위해 출정하자,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가 되어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간다.
전라 병마절도사 사령관 최원은 용인전투가 벌어질 때 수원 행고산성에서 김천일, 권율과 함께
진을 치고 있다가 용인전투에서 패전하고 수원에서 쉽게 격파당하자 강화도로 들어가서
왜수군의 한양 입성 차단작전을 벌인다.
최원은 강화도에서 1만대군을 거느리고 1년여 간 묶여 있었다.
개전 초기부터 1593년 3월 행주대첩이 벌어지기 전까지 1만대군을 유지시킨 유일한 장수가 최원이다.
호남 관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김천일 2대 창의사, 황해도 방어사 김경로가 설득하여 병력을 나누어 권율에게 주는 것이다.
김경로, 김천일의 1천 사수부대는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의 1천 승병과 함께 최원을 설득하여
호남 관군을 권율에 나눠주게 하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행주대첩을 치루게 된다.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에게 최원의 휘하 군관, 종사관, 자원병 8천이 귀속되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전투를 치루는 것이다.
동인 정권 시기에 평양 몽진지에서 비변사와 선조는 황해도로 나가
북상하는 왜군을 막으라는 명령에 최원은 불복한다.
강화도를 이탈할경우 탈영병이 속출한다는 명분을 대고 나가지 않는다.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한 비변사는 김천일, 김경로를 시켜 설득하게 하여
행주산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행주대첩은 선거이, 김천일, 최원, 김경로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1592년 6월12일 서인정권이 들어서자,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는 전주성에서 6천 병력을 이끌고
수원에 주둔하고 있다가 한양 탈환작전을 벌이기 위해 시흥으로 전진 배치하고 있다가 4천을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가서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이 보낸 8천병력을 흡수하여 행주대첩을 치루게 된다.
김천일은 근대 이성철학파이자 근대식 개혁학파인 주기학파 이항의 제자이다.
태인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문관, 무관제자들을 키워내고 있었고,
이순신 역시 정읍 현감으로 1년간 있으며 주기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김천일 2대 창의사가 전주성에서 특별 사수부대를 편성하고 김제 금산사 주지 처영의1천 승병 병력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가 선거이가 이끄는 전라 병마절도사 주력군 1만2천명의 관군과
의병군 2,800명으로 주도하여 왜군 1만5천명을 사상시키는 최대의 승전고를 올리게 된다.
조선군 본군 주력군은 신임 임시 전라 병마절도사 선거이이기 때문에 관군을 승전장으로 내세워야 한다면,
선거이를 승전장으로 가장 먼저 내세워야 하는 대첩이었다.
아군사상자 130여명vs 왜군 사상자 1만5천여명.
[장성 출신의 변이중이 장흥에서 만들어온 화차부대와 처음으로 폭탄을 대포에 넣고 터트릴 수 있는
비격진천뢰, 김천일의 1천 특별 사수부대 등으로 초대승을 거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김천일 진주성 총사령관의 진주 제2차 전투에 대해 평하기를
의만 높고 재주가 없어서 패한 장수라고 격하시켜 놓았다.
근세 전투에서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 군사령관과 군단장급이 세명이나 동시에 전사하는 전투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물고 호남이 주도하는 진주 제2차 전투가 유일한 전투였다.
진주 제2차 전투에서 왜군 10만명 중 8만명이 밤낮없이 교대로 성을 공격하다 2~3만이 죽었고,
남원의 변사정과 임계영이 남강을 헤엄쳐 살아나온 의병들을 수습하여 진주성에서 살아나온 최억남을
부장으로 삼고 하동에 주둔하며 사천, 통영, 곤양 등으로 쳐들어오는 왜군을 격퇴하게 된다.
이 병력은 광주, 담양에서 의병을 모아 합류한 김덕령이 인수하여
진주성으로 들어가 주둔하며 곽재우 등과 연합하여 남해안 전투를 치루게 된다.
왜군은 반격을 받을까 두려워 부산으로 철군하였다.
p/s
이일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은 1585년 여진족 니탕개의 잔당들이 쳐들어 올 때
이순신을 버리고 도망간 장수였다.
그래서 녹둔도에서 조산보 만호, 녹도만호 (종4품/대령과 준장사이의 직급)이순신 혼자
여진족들을 막으며 싸워야만 하였다.
패전 책임을 이순신에게 덮어 씌워 이순신이 좌천되어 니탕개의 잔당 소탕작전에 백의종군하였다.
그런 이순신을 1587년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발탁하여 이광의 조방장(정3품~종3품/장군급)으로 활동한다.
그후 선전관(정3품~종7품)으로 진출시켜 장군급으로 복무하다가 1591년2월 동인정권이 들어서자
황박, 정담, 김경로, 이복남, 송상현, 고득뢰, 황진 등 호남 선전관, 비변사 출신들이 고향지방으로
직급 강등당하며 좌천될 때 정읍 현감[종6품]으로 좌천된다.
1591년 3월 정읍 현감을 마치고 비변사로부터 보직 변경되어 전라도 남해안 고사리 첨사[종3품 장군급],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거쳐 전라 좌수사(여수)로 임명된다.
정읍 태인에서 주기학파 이항이 남언경, 김천일 등 주기철학을 배우기 위해 호남에서 집결한
수많은 문무관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이순신은 정읍에서 주기학파 사상철학의 영향을 받아 해전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